정리해고가 끝난 뒤 공장에서는
By 나난
    2010년 03월 15일 09: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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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고에 대해 노동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다”, “함께 살자”고 했다. 2010년에도 어디선가 ‘정리해고’ 이야기가 들린다. 정리해고 뒤 현장은 어떤 모습일까. 이미 오래전에 정리해고를 했던 곳이든, 가장 최근에 정리해고가 이루어진 곳이든, 앞으로 정리해고 위협을 받는 곳이든 정리해고 뒤 벌어질 일들은 별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래는 그 몇 가지 일들이다.

분사

파업이 끝나자 회사는 재빨리 분사 계획을 추진했다. 분사, 다른 말로 하청이다. 다르게 들리나 똑같다. 원공이었던 출고사무소, 시설팀, 부품도장, 자재를 보급하는 물류센터 등이 하청이 되었다.

구로에 있는 서울서비스센터를 빼고 대전․경남 양산 등 직영 정비사업소가 하청이 되었다. 「회사의 분사계획 추진과 관련한 노사합의서」(2009. 8. 6)에는 “회사는 기업회생을 위한 경쟁력 제고를 위해 추진된 분사계획을 원칙적으로 추진하되, 직영 정비사업소 및 관련 부품마케팅 일부에 대한 분사계획은 철회한다”고 적혀 있다. 회사는 약속을 어겼다. 분사는, 흔적 없이 티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노동자를 정리해고 하는 방법이다.

   
  ▲ 사진=여정민 기자 / 프레시안

희망퇴직한 관리자들 중 일부가 하청업체 사장이 되었다. 희망퇴직한 노동자들 중 일부가 하청업체 노동자로 다시 입사했다. 아니 말을 제대로 하자. ‘희망’퇴직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속이고 사실을 감춘다. 정리해고와 별다르지 않다는 것을. 희망퇴직한 노동자들에게 물어보자. 희망퇴직을 받아들이면서 ‘앞일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가지고 바라’게 되었는지, ‘앞으로 잘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였는지. ‘희망’이라는 말을 앞세워 옆구리에 칼을 들이대던 압력을 느끼지는 않았는지. ‘희망’이라는 말에서 몸서리나는 ‘절망’을 읽지는 않았는지.

다기능 노동자

파업이 끝난 뒤, 생산혁신팀 안에 ‘기동반’이 신설되었다. 이들에게 새 임무가 떨어졌다. 회사가 요구하는 대로 언제든 변신 가능한 다기능 노동자가 되는 것. ‘상황에 따라 재빠르게 움직이거나 대처하는 행동’에 굼뜨거나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된다.

기동반에 소속한 노동자들은 오제이티(OJT: On The Job Training, 직무간 훈련)를 통해 다기능 노동자로 새로 태어난다. 평균 근속년수 15년인 노동자들이 다시 현장실습을 받는다. 그동안 해 온 일이 무엇인지는 상관없다.

원래 부서마다 고정 릴리프(relief, 교체자)가 있다. 근무자가 사정이 생겨 자리를 비우게 되면 그 일을 맡아하는 노동자다. 릴리프는 자기 부서 일만 한다. 고유한 업무를 보는 셈이다. 여전히 각 부서에는 릴리프가 있다. 릴리프와 달리 기동반은 한 군데가 아니라 여기 저기 다른 부서 일을 한다.

기동반에 있다가 부서에 자리가 나면 배치를 받는다. 달마다 평가를 해 점수가 좋은 사람을 필요 인원을 요청하는 부서에 배치한다. 어디선가 나를 뽑아주기를 간절히 바라야 한다. 어떻게든 자기가 갈 자리가 나야 한다. 평가하는 눈을 의식해야 한다.

다른 공정, 다른 라인에 가서 새로운 일을 하고 잘 몰랐던 사람들을 배워야 한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지 않겠는가. 강제 전환배치는 불법이라는데…, 불법? ‘불법’은 노동자가 기업이나 정부를 향해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기업이나, 정부, 사법부가 노동자를 향해 내지르는 고함이 바로 ‘불법’이라는 낱말이다.

노동강도

공장은 주간만 돌아가는데 컨베이어 라인 가동률이 평균 98%다. 컨베이어가 한 번도 서지 않을 때 라인 가동률 100%라고 한다. 예전에는 평균 60~80%였다. 거기에는 여러 복합 요인들이 들어간다. 100%에 가까운 98%, 그 요인들을 없앤 측면도 있겠지만, 그만큼 노동강도가 세지지 않았겠는가. ‘잡(job)수’와 ‘타임’으로 따져 보자.

한 시간에 차를 몇 대 만드는가를 ‘잡수’라고 한다. 파업 전에는 17잡이었는데 지금은 22잡으로 늘었다. 다시 말해서, 한 시간에 17대를 만들었는데 똑같은 시간에 22대로 늘어났다. 라인에 선 인원은 똑같거나 오히려 줄었는데 말이다.

‘타임’은 차 한 대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전에는 한 대 만드는 데 3분 40초가 걸렸다. 지금은 2분 40초에 1대를 만든다. 이제 노동자들은 잠깐 어깨 펴거나, 한숨 돌릴 틈이 없다. 그 시간을 빼앗겼다. 작업 습득률이 빨라 2분에 일을 끝내는 사람이 있다면 예전 같으면 1분 40초라는 여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멈추지 않는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잠시 멈출 수 있었다. 그건 훔친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2분 40초를 넘었던 사람들도 죄다 이 빨라진 시간에 적응해야 한다. 적응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렇게 하루를 일하고 나면 지쳐 쓰러지기 일보직전, 집에 가면 그대로 쓰러진다.

산업재해

이제 사람들은 사정이 있어도 조퇴를 하지 않는다. 되도록 월차도 안 쓰려고 한다. 아무도 이것이 평가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으나 사람들은 스스로 평가 기준을 찾는다. 혹시 이것도, 저것도 평가 점수에 반영되는 건 아닐까, 지뢰 찾기 게임을 한다. 애먼 일을 당하지 않을까 알아서 몸을 사린다.

이제 사람들은 일을 하다 다쳐도 공상이나 산재를 신청하지 않는다.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에서 다치는 일은 비일비재. 그러나 이상하게 정리해고 뒤, 공상․산재 신청이 거의 없다. 그냥 혼자 병원에 가서 치료받고 출근한다. 입원해야 할 환자가 통원치료 받으며 출근한다.

노동자가 쓸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는 사람들. 왜일까? 몸이 스스로 긴장하고 촉수를 세우기 때문이다. 공상처리든 산재처리든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돌아왔을 때 과연 자기 자리가 남아있을까, 사람들은 두려운 거다. 자기 자리가 그대로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는 게다.

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 한다, 내 자리는 없어진다, 내가 아니더라도 부서 배치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는데, 지금 현장에는 없으나 여전히 ‘산 자’들이 있는데, 하는 생각에 마음 편하게 치료를 받지 못하는 거다. 다쳐 몸이 아픈 고통쯤은 그냥 이겨내는 사람들. 그 고통에 쓰러지면 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기다릴 테니 어떻게든 이 악물고 버티게 된다.

예전에는 산재환자로 치료를 충분히 받고 공장으로 복귀해도 자기 자리에 대한 불안함이 없었다. 3개월 이상 치료를 받은 경우, 우선 산업안전팀으로 발령을 받아 당사자가 원래 부서로 배치받기를 원하거나 다른 부서로 배치받기를 원하면 노조가 나서서 회사와 노사협의회를 해서 조절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장담 못한다. 누가 ‘나’를 위해 앞에서 말해 줄까. 그 노조가 지금은 없다.

위기감

정리해고가 ‘산 자’와 ‘죽은 자’를 만들어 낸 뒤, 공장 분위기가 달라졌다. 사람들은 이제 말하지 않는다. 일하는 현장에서 제기해야 할 문제가 있어도 현장 간부나 관리자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두 눈 꾹 감아 못 본 척 하거나, 두 귀 막아 안 들은 척하거나, 없었던 일이었다고 마음을 속인다.

사람들은 이제 현장 관리자나 사무실 관리자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다. 일방으로 업무를 지시해도, 그게 부당해도 별말 없이 따른다. 예전에는 불만이나 애로 사항이 있으면 “이런 걸 왜 내가 해야 하나” 문제제기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여론이 형성되었다. 불합리한 일들을 현장 대의원에게 얘기하고, 노동조합에 제기해 해결해 나갔다. 그 역할을 공장 안에 새로 만들어진 노동조합과 새로 뽑은 대의원들이 해 줄까? ‘현장의 힘’보다 ‘관리의 힘’이 더 세진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각각 고립된 한 노동자가 되어 명령과 지시에 순종해 자기 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 사진=이명익 기자 / 노동과세계

그래서 어느 누구도 불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지금 불만을 누설했다가는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지난 정리해고 과정처럼 다시 고통과 불안이 닥쳐올 때, 자칫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람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위기는 끝나지 않은 게다.

말을 하지 않는 건 관리자들을 향해서만이 아니다. 노동자들끼리도 마찬가지다. 동료와 술 한 잔 하는 것도 더는 예전 같지 않다. 아주 친한 몇 사람들끼리가 아니면 술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으려고 한다. 조심하는 건 술만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한 사람, 두 사람 담배를 끊기 시작했다.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니 사람들은 확실한 걸 부여잡으려고 한다. 내 몸을 건사하는 일, 돈을 아끼는 일. 위기감을 만들어 내는 근원을 바꾸는 건 힘드니, 술을 줄이고 담배를 끊는 일로 그 위기감을 이겨내려 하는 게 아닐까.

고립

이제 현장에서 노동자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의지할 데가 없다. 새로 만든 노조를 신뢰할까? 새 노조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그렇다고 밖에 있는 노조를? 노동자들은 밖에 있는 노조와 만날 수 없다. 밖에 노조와 조금이라도 연관되면 징계를 받게 될 테니, 지금은 아무 모색도 가능하지 않다. 지금은 살아남아야 하니까.

이제 현장에서 노동자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기업도, 정부도 믿지 않는다. 단지 일한 것밖에 없는데, 단지 일만 한 게 죄가 되는 세상을 겪고 난 뒤 얻은 깨달음이다. 밥줄을 흔들고 목숨 줄을 흔드는 저들이 자신을 살려주리라 믿지 않는다.

오로지 믿을 수 있는 건 지금 살아서 일을 하는 자기 자신, 지금 살아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자기 몸뿐이다. 믿을 게 자기밖에 없는 이들은 외롭다. 이 외로운 시간이 얼마나 길지 아무도 모르나 외로움 한가운데서 묵묵히 살아남아야 한다.

걱정

매각이 되면 회사가 살아날 수 있는지, 어디로 매각 되는 건지, 매각이 된 뒤 다시 구조조정을 하는 건 아닌지 공장 안 사람들은 걱정한다. 절대로 투기자본에게 매각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간절히 바란다. 제대로 된 데에 매각되기를 이들은 바란다.

그리고 걱정 하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마음에 열 가지 걱정이 들어차 있다면 그 중 한 가지는 ‘죽은 자’이다. 구속된 사람들과 해고자들은 어떻게 되는 건지, 아이들을 키우며 사는 처지가 똑같은데 대체 생계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구속되고 해고된 이들은 청장년 한 시절을 공장에서 함께 지나온 이들이다.

그런 그이들이 저 뜨거웠던 여름에 동료들을 밀어내던 사람들일까? 몸에 걸친 작업복이 똑같아서 그렇지, 동료들을 밀어낸 사람들은 대부분 관리직이다. 그 수가 2,300여 명이다. 물론 생산직 사람들도 구사대로 동원돼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이들은 차마 앞에 설 수 없었다. 뒤로 물러난 이들을 관리자들이 등 떠밀어도 앞에 나가지 않았다. 잠 못 드는 밤과 고통으로 한숨 쉬던 낮이 이들에게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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