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예슬과 구한 말의 '대학거부자'들
        2010년 03월 15일 07:3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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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 <경향신문>에서 고려대 경영학과 김예슬 학생의 ‘자퇴 선언’에 대한 기사를 읽었을 때에 거의 눈물 날 정도로 기뻤습니다. 

    죽은 이들의 유령만이 돌아다니는 황천에서 우연히 산 자를 봤을 때의, 그런 류의 기쁨이었습니다.

    고대 등 서울의 ‘명문대’들이 이미 죽은 지 오래됐습니다. 그러나 그 지성의 폐허에서 아직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어찌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8년 전인가 9년 전인가, 제가 오태양씨가 여호와 증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거의 최초로 병역거부를 선언했을 때에 바로 이와 같은 기쁨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황천에서 산 자를 만난 기쁨

    사실, ‘병역 거부’와 ‘대학 거부’는 많은 면에서 –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 동질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기관이 갖고 있는 기능, 그리고 이 두 기관의 각종의 문화적 특징이 상호 흡사한 면이 많기 때문입니다.

    군대란 상사 명령이라면 잔업이든 특근이든 회식이든 경제범죄든 무엇이라도 대꾸없이 다 할 수 있는 유순한 심신, 즉 한국형 자본주의에 필요한 인간기계를 대량생산하는 학교 다음의 남성 전용 사회화 기관이고, 대학이란 이미 학교, 군대에 의해서 심신이 유순해지고 충분히 ‘길들여진’ 인간기계들 중에서 고가로 판매될 수 있는 고급 기계들을 추가적으로 생산해내는 ‘공장’입니다.

    길들여진, 즉 영혼이 영원히 거세된 인간들을 만들어내야 하기에, 대학도 – 물론 군대만큼은 아니지만 – 개인에 대한 상당한 압박 구조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수님’들과 ‘선배님’들이 군림하는, 그러한 공간이 아니라면 유순한 인간기계가 어찌 생산되겠습니까?

    사실, 역사적으로 따져보면, 한국에서 근대식 전문학교 및 대학이 생긴 이후로는 늘 ‘중급 사회’ 내지 ‘고급 사회’로의 관문의 역할을 해온 것입니다. 즉, 무한한 거래의 장소인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잘 팔릴’ 인간들을 애당초부터 생산해온 것이죠.

    구한말에는 외국어학교 중에서도 유독 일어학교가 대접을 잘 받고 법관양성소(오늘날 서울대 법대의 전신으로 봐도 큰 무리 없음)에 유독 인재들이 많이 몰렸던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뻔하지 않았습니까? 잘되면 통감부에서의 통역, 아니면 지방 법원의 법관부터 시작해 출세의 가도에 오르고, 못돼도 변호사나 교사 정도 해먹을 수 있게끔 하는 건 그 당시로서 ‘대학’으로 칠 수 있는 교육기관의 역할이었습니다.

    대학거부자 명단은 위인전 목차

    물론 법관양성소에 다녔던 사람 중에서도 ‘조선의 장병린’이라고 할 변영만 선생이 있었다는 점, 즉 초기 근대의 ‘출세’ 체제에 개인적으로 반기를 든 위인들이 전혀 없지 않았다는 점도 기억해야 하지만, ‘상등 사회’로의 관문에서 친구를 짓밟아 들어가려는 풍경은 그 때라고 해서 본질적으로 다르지도 않았지요.

    다른 점이 있었다면 ‘사회 분위기’가 오늘날과 질적으로 달랐지요. 굶주린 농민 위에 군림하는 일제라는 ‘남의 국가’ 하에서 출세한다는 것부터 자생적 국가전통이 수천 년이나 되는 나라에서 좀 꺼림직한데다가, 아직은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는 식의 유교적 이상주의를 어릴 때부터 익힌 사람들은 배운 층의 다수이었어요.

    그러니까 이태준 선생처럼 일본 상지대를 중간에 그만두고 출세고 뭐고 다 팽개치고 작품들을 통해서 ‘조선’과 ‘인간’을 본격적으로 탐구해보려는 사람들이 그 때에 많았던 것입니다. 그 시대의 ‘대학거부자’ 명단을 보면 꼭 ‘위인전’ 목차를 읽는 기분이지요.

    염상섭(경응대 중퇴), 현진건(상대 호강대학 중퇴), 이찬(와세다대 노문과 중퇴), 강경애(평양 숭의여학교 동맹파업 건으로 강제 퇴학)… 그러니까 김예슬씨가 일제시절의 ‘대학거부자’들의 명단을 한 번 보면 용기를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통시대의 황혼이었던 그 때만 해도, ‘졸업장’보다 ‘문장’이나 ‘박식’이 더 잘 통했던 것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양심이 가장 강한 조선지식인들의 경우에는 유교적 이상주의는 바로 혁명적인 정열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제 과학적으로, ‘사회주의’라는 근대 개념어로 정의된 대동세상을 얻기 위해서 물 한 표주박, 밥 한 먹음의 지사적 삶을 택한 이들은, 대학을 나왔다 해도 ‘출세’에 아주 무관심했습니다. 김철수(1893-1986) 선생처럼 와세다대 정치과에 다니면서 김성수 등 유산 계급의 젊은 거두들과 말을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에 있었던 사람은, 마음만 먹었으면 무슨 출세 못했겠어요?

    그래도 와세다를 다 팽개치고 결국 감옥들을 전전하는 공산주의자의 길을 택한 것이지요. 지금의 서울 ‘명문대’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벌써 다른 나라, 아니 다른 행성의 이야기만 같지요?

    해방 이후에 적어도 80년대 말~90년대 초까지 이와 같은, 이상주의가 강하게 섞인 캠퍼스 분위기가 당분간 지속된 데에는 또 여러 가지 역사적 이유들이 있습니다.

    이승만부터 노태우까지의 ‘비정상적인 국가’가 근대적 이성을 교과서적으로 배운 젊은 지식인들의 정의감을 크게 자극한데다, 식민지 말기와 해방 전후 시대를 거쳐온 윗세대 지식인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큰 학생들에게 ‘사회인’,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은 일차적이었습니다.

    강만길 선생의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 조동걸 선생의 <일제하 농민운동사>와 같은 책을 읽고 자란 세대에게는 비록 나 한 몸이 고대를 나와 상섬이나 현대의 잘 나가나는 머슴이 될 수 있다 해도 옆에서 가난뱅이들이 빈곤과 압제 무게 밑에 짓눌린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사고방식을 갖기가 쉬웠습니다.

    근대 초기의 – 아직도 대단히 유교적인 – 희생적 지사 정도 아니더라도, 근대 중기(해방 이후 1990년대 초까지)의 지성인은 여전히 사회적이고 연대적이었습니다. 거기에다 현실적으로 – 이윤율이 아직 높고 국가 기구와 시장이 아직 확장돼가는 사회에서는 – 마음만 먹으면 출판사에서 번역하든 학원 강사를 하든 ‘운동’에 매진하는 몸을 먹인다는 것은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식민지하의 ‘지사들의 시대’를 방불케 하는 1980년대를 한국이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저야 그 때를 보지 못했지만, 1991년에 본 고대만 해도, 아직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같이 하면서 여생을 보내겠다는 사람부터 도스토예프스키에 매달려 공부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까지 말이지요.

    사회적 개인 사라지고 인간 상품만 남아

    그런데 고성장 시대가 막을 내리고, 한 때에 ‘군바리 깡패’ 집합이었던 국가가 이제 좀 얌전한 모습을 –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 취하면서 천하제후의 회의라고 할 G20 회동을 주도하겠다는 기염을 아주 국제적으로 토하고, 국내의 계급 분화가 고도화돼 계급간의 구분선이 아예 세습화돼가는 경향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기에 근대 후기(1990년대 초부터)에 접어들어 ‘사회적’ 개인이 점차 그 자취를 감추고 대학가를 휩쓸기 시작한 것은 각종 ‘인간 상품’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시장’과 ‘거래’ 이외에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들이 보는 세상이란, 개인이 그 노동력을 고가로 팔고 그 여가 시간에 해외여행부터 똑같이 소외된 개인들과의 적당히 멀고 적당히 가까운 ‘친구 관계’까지, 각종의 거래들을 누리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공부도 (당연히!) 거래, 대인관계도 (당연히!) 서로 당겨주고 밀어주고 아픈 구석을 만져주고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상호 거래, 직장/직업도 거래, 종교도 (하나님에게 천당 입장료를 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거래, 사랑도 (듀오에서 서로의 레벨을 맞추어주는) 거래…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어도 되는" 도는 이미 원시시대 토템 이야기나 된 것이고, 사회도 그들에게 아주 무의미한 말입니다. 서로에게 서비스를 사고 팔고 세금을 내는 경제 주체들의 집합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요. 이들의 세계에서는 ‘꿈’이라는 타워팰리스에서 집 한 채 사고픈 욕망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진실 탐구’는 재테크 익히기의 딴 이름입니다.

    이 ‘죽은 영혼’ 사이를 산 사람이 벗어나고 싶은 것은 아주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한 발짝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근대 후기의 패러다임을 넘어서 서로 연대를 해, 대학에서 ‘인간’과 ‘사회’를 다 같이 복원해보는 것은 보다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닐까요?

    자신만을 위해서는 아니고 나와 남, 모두를 위해서 하는 등록금 인하 투쟁부터 시작해서 무상 교육을 위한 투쟁, 대학의 민주화(학생들의 대학운영 참여)를 위한 투쟁, 고등교육의 공공화를 위한 투쟁… 이 연대적 과정에서 우리가 포스트모던의 지옥적인 원자화를 좀 극복할 수 없을까 해서 기대를 걸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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