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규보, 조물주에게 묻다
        2010년 03월 11일 10: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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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물주에게 묻다

    한 여름 밤, 모기에게 시달려 잠을 설치게 되면 몹시도 괴롭고 짜증난다. 그래서 이규보가 조물주에게 물었다.

    “하늘이 사람을 먼저 내고 온갖 곡식을 냈으므로 사람이 그것을 먹습니다. 그 다음에 뽕나무와 삼나무를 냈으므로 사람이 그것으로 옷을 입습니다. 그렇게 보면 하늘이 사람을 사랑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독을 가진 것들 또한 내었습니까? 곰 ․ 호랑이 ․ 늑대 ․ 승냥이에서부터 모기 ․ 등에 ․ 벼룩 ․ 이에 이르기까지 사람에게 몹시 해로운 일을 합니다. 그렇게 보면 하늘이 사람을 미워하여 죽이려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이 이렇듯 일정치 않으니,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 이규보

    조물주가 대답했다.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은 원인을 알 수 없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라 하늘도 알지 못하고 조물주도 알지 못한다. 사람은 스스로 태어나지 하늘이 내지 않는다. 곡식과 뽕나무 ․ 삼나무도 자기 스스로 생겨났다. 어찌 하늘이 이로움과 해로움을 가려서 조치를 취할 수 있겠는가.” …… <중략> ……

    그래서 다시 물었다.

    “하늘도 알지 못하고 조물주도 알지 못한다 하는데, 하늘은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니 모른다 하여도 조물주가 어찌 모른다고 하십니까?”

    조물주가 다시 답했다.

    “내가 만드는 걸 네가 보았느냐? 물(物)은 스스로 생겨나서 스스로 변화한다. 내가 어찌 만들겠느냐. 내가 어찌 알겠느냐. 나를 조물주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 이유도 모르겠다.” – 이규보, 『문조물』

    물(物)은 인간과 자연을 포함하는 만물을 말한다. 이 ‘물이 스스로 생겨나서 스스로 변화한다[물자생자화(物自生自化)]’고 했다. 이렇게 이규보는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알렸다. 이것은 고려가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였고,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문신의 씨를 말려라

    1170년(고려 의종 24년),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문신의 씨를 말려라’는 기치 아래 문신들에 대한 처참한 도륙이 행해졌다. 산 속 깊숙이 숨거나 절로 도피하여 스님이 된 문신들만이 겨우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정권을 잡은 무신들 사이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이의방 – 정중부 – 경대승 – 이의민 – 최충헌으로 이어지는 투쟁과 권력 교체의 역사가 26년간 이어졌다. 1196년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혼란은 수습되고 정치는 안정되었다.

    무신들에 의해 문신들이 대거 제거된 것을 두고 문화의 암흑기를 맞이하였다고 평가하는 의견들이 있다. 그러나 무신정변 이후 걸출한 학자, 문인들이 출현하였다는 사실은 그러한 평가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무신정변으로 결정적으로 몰락한 것은 고려 전기의 문벌 귀족과 그들의 문화, 그들의 철학이었다. 그들이 몰락한 자리에 새로운 세력, 새로운 철학이 생겨났다. 그것은 역사적 단절이었다.

    최충헌은 정권을 잡은 후 적극적으로 인재 등용 정책을 펼쳤다.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전 시기와 전혀 다른 계급 출신이었고, 전혀 다른 사고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은 훗날 고려를 뒤집어엎고 조선을 세우는 세력들의 시작이었다. 이 새로운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 이규보이었다.

    이규보(1168년~1241년)는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고, 그가 보여준 행적은 결코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지방에서 낮은 벼슬자리를 하고 있던 집안 출신이다. 2살 때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28살이 될 때까지 무신들 간의 끝없는 권력투쟁으로 극심한 혼란의 시기를 살아야 했다.

    그는 39살 때 최충헌에 의해 발탁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63살이 되던 1231년부터 몽고의 침략이 시작된다. 수도가 강화도로 옮겨지고 전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규보는 73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이렇듯 그는 혼란기와 평화기 그리고 전란기라는 급변하는 시대를 살다 갔다.

       
      ▲ 최충헌

    격변하는 시대였지만 이규보의 관직생활은 평탄하였다. 39살 때 권보직한림에 발탁된 이후 69살 때 문하시랑평장사로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고 관직생할을 하였다. 그의 관직생활의 밑천은 탁월한 문장능력이었다. 그는 최충헌의 문서수발을 거의 도맡다시피 하였다. 또한 그는 최충헌을 찬양하고 아부하는 글을 써서 한림, 사재승, 우정언지제고 같은 벼슬을 얻기도 하였다.

    이규보는 걸출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한편으로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여 한껏 출세를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전 시기의 철학과 문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철학과 문학관을 제시하였다. 한 시대의 마감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심(心)의 철학 vs 물(物)의 철학

    고려 전기의 사상을 지배한 사람은 의천 대사(1055년~1101년)였다. 그는 고려 11대 왕 문종의 넷째 아들로, 왕실불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집약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심(心)은 본래 깨끗하고 자유자재이며 평등하다. 성인에게든 보통사람에게든 심은 하나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번뇌와 생사의 세계이고, 이것을 알면 보리와 열반의 세계이다. 심이라 하면 심이 되고, 물(物)이라 하면 물이 된다.

    … 다만 심이 자신의 본성을 지키지 못하고 물에 현혹되어 움직이고 인연에 따라 변하면서 중생들은 허망하게도 뒤집어 버린다. 깨끗한 것을 더럽혀서 유혹이 생겨나고, 자유자재한 것을 얽어 묶어 번뇌가 생겨나고 평등한 것을 차별하여 업보를 만든다. – 의천, 『대각국사문집』

    심과 물의 관계를 다루었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심과 물은 하나이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심과 물이 나누어진다. 이런 상태에서 심이 물에 현혹되어 유혹, 번뇌, 업보가 생겨난다는 얘기이다. 심이 물보다 우위에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규보와 동시대 사람인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심에 대해 "하늘에서 마련해 준 것이기에 물에 따라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의 우월성, 초월성, 절대성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규보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앞에서 인용한 『문조물』에서 ‘물은 스스로 생겨나고 변화한다’고 말한다. 물을 초월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사회생활 속에도 수미일관되게 적용한다. 

    물은 도(道)의 기준이다. 그 물을 그 기준에 따라 지킨 이후에야 도가 존재한다. 그것을 버리면 도를 잃게 된다. 관직은 도의 그릇이다. 도를 지키지 못하면 관직도 잃는다. …… 허황되게 도를 찾는다면서 스스로 도를 지킨다면서 관직에 소홀하게 되면 관직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화를 당하게 된다.

    이 어찌 일반인이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사람을 어렵게 만드는 일이다. 만약 도를 지키는 일이 관직을 지키는 일보다 어렵다면, 힘써 일하고 각별히 조심해서 관직을 지킴으로써 도에 가깝게 다다를 수 있다. – 이규보, 「반유자후수도론」

    ‘물은 도의 기준이고, 관직은 도의 그릇이다’는 말은 당나라 때의 문인 유종원이 한 얘기이다. 물을 떠나서 도를 말할 수 없고, 관직은 도를 실천하는 수단이라는 얘기이다. 이규보는 유종원의 주장에 토를 단다. 도를 지킨다면서 관직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일반의 사람들은 자신의 관직에 맞게 열심히 일을 한다면 도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도를 관직보다 우선시 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이다. 일상의 사회생활을 넘어서 있는 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열심히 일하고 생활하는 속에 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규보에게 있어 일상의 생활과 주위 환경에 대한 연구는 각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구시마문」에서 "물과 만나고 물의 비밀을 연구하며, 연구의 결과를 근거로 세상의 잘 잘못을 가리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고 했다.

    사회비판의 철학

    이규보는 자신의 ‘물의 철학’을 문학을 통해 실천하였다. 그의 문학의 출발점은 물, 즉 현실에 대한 연구였다. 이런 연구를 통해, 그는 독창적인 문학작품들을 생산해냈다. 최자는 『보한집』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인로는 말하기를 "나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황정견과 소동파 두 사람의 문집을 읽은 뒤에 말이 굳세고 운이 맑은 소리를 내게 되었고 시 짓는 지혜를 얻었다"고 하였다. 이규보는 말하기를 "나는 옛 사람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말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고려의 문인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사람은 중국의 소동파였다. 문인들은 소동파의 작품을 연구하고, 그의 글을 모방하려 애썼다. 그래서 과거 시험을 알리는 방이 나붙으면, "올해도 30명의 소동파가 나오겠구나" 하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과거 시험 답안지가 온통 소동파 문장의 모방으로 채워질 것이라는 얘기이다. 이런 모방 풍조에 대해 이규보는 ‘도둑질’이라고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헷갈림이 심해서 훔친 물건이라도 눈을 즐겁게 하면 탐내고 즐긴다. 누가 그 말의 유래를 알겠는가 하고 생각하지만, 백세후에 이르러 누군가 참과 거짓을 판별한다면 도둑질을 잘 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잡히고 만다. – 이규보, 「답전이지논문서」

    이규보의 문학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다. 사회비판과 주체적인 역사의식의 표현이 그것이다. 먼저, 사회비판은 백성들의 삶과 애환 그리고 분노를 드러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군수들이 장물죄를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문군수수인이장피죄」 두 편을 보자.

    흉년 들어 백성들이 거의 죽게 되어 / 앙상하게 뼈와 가죽만 남았구나
    몸속에 살이 얼마나 남았다고 / 파먹어 아무 것도 남지를 않는구나

    너희들은 보느냐 강물을 마시는 두더지도 / 자기 배를 채우는데 지나지 않는다
    묻노라 너희들은 입이 몇 개나 되기에 / 탐욕스럽게 백성의 살을 먹어대는가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 극에 달했음을 폭로, 비판한 것이다.

    주체적인 역사인식으로

    다음으로, 주체적인 역사의식의 표현을 보자. 이규보는 『백운소설』 서두에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시를 기록하였다.

    그대의 신기한 꾀는 하늘의 이치를 꿰뚫었고 / 그대의 슬기는 땅의 이치를 다했도다
    전쟁에 이겨 그 공이 이미 높으니 / 만족하여 그만두기 바라노라
    – 을지문덕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던 것을 기록하면서, 을지문덕의 굳센 기상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후대에 시가 말이나 다듬는 데에 치우쳐 이런 기상의 시가 나타나지 않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였다. 당대에 소동파의 시나 모방하는 풍토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은 것이었다.

    이규보의 주체적 역사의식이 집약적으로 드러난 작품이 『동명왕편』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 서사시를 쓰게 된 이유를 밝혀놓았다.

    세상 사람들이 동명왕의 신통하고 이상스러운 일을 이야기한다. 내가 일찍이 그것을 듣고, "공자께서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으셨다. 동명왕의 일은 황당하고 기괴해서 우리가 이야기 할 바가 못 된다"고 말했다.

    공자의 말씀에 따라 동명왕 얘기를 무시했다는 말이다. 모화주의에 대한 비꼼이 들어있다.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옛 <삼국지>를 얻어 동명왕 본기를 읽어보니 그 이상한 사적이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 귀(鬼)이고 환(幻)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세 번 깊이 읽고 음미하니 점차 그 본뜻을 알게 되었는데, 환이 아니고 성(聖)이며 귀가 아니고 신(神)이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동명왕 신화를 삭제하여 버린 것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동명왕의 일은 사람들을 현혹하자는 것이 아니고 나라를 처음 일으킨 신성한 발자취이니 이것을 기록하지 않으면 후세 사람들이 우리를 무어라 할 것인가? 그래서 시를 지어 기록해서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나라임을 천하에 알리고자 한다.

    『동명왕편』을 쓰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역사에 대한 주체적인 해석과 자기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난다. 이전 시기의 모화적, 사대적 역사관을 청산하고 주체적인 역사관을 세우고자 한 것이 이규보가 장편의 서사시를 쓰게 된 이유였다.

    몽고가 침략하자, 이규보는 이를 규탄하고 투쟁하는 데 앞장섰다. 「맹고문」에서는 "저 극악무도한 무리들이 국경을 침범해 우리 백성을 살육하고 있다… 사방을 유린하고 겁탈하여 죽은 자가 길에 즐비하다"고 규탄하면서 끝까지 싸울 것을 천명하였다. 또 「시월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하늘이 교만한 녀석들을 풀어놓아 독이 이미 퍼졌는데,
    이 겨울에 천둥 번개는 또 어찌된 일인가?
    계절을 뒤집었으나 오랑캐의 머리를 향해 내리친다면
    때 아닌 때이지만 알맞은 때라 하겠다

    몽고를 몰아내고자 하는 이규보의 절절한 마음이 드러난다.

    이규보의 철학이 끼친 영향

    이규보는 고려 중기 무신정변 이후 등장하는 새로운 세력의 원조였다. 그는 고려 전기의 ‘심의 철학’에 맞서 ‘물의 철학’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물에 대한 연구를 통해 사회비판 의식을 높이고, 주체적인 역사인식을 고양하였다.

    그의 철학은 후대의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색은 "물은 스스로 끝없이 생긴다.", "물의 이치가 서로 바탕이 되는 것이 자연이다."라고 말한다. 조선 건국의 설계자 정도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천지 사이에 있으면서 하루라도 물과 떨어져 살아 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처사접물(處事接物)하여 그 도를 다하고 어그러지거나 잘못된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 정도전, 『삼봉집』

    처사접물. 일을 할 때 항상 물을 연구하라는 말이다. 이규보의 철학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이색과 정도전 등은 고려 후기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이다. 성리학의 도입이 무조건적인 수입이 아니라, 당대 학자들의 철학적 입장에서 주체적인 수입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선이 세워지기까지 성리학자들은 치열하게 사회를 연구하고 대안을 만들어내는 생동감을 보여준다. 그들의 사상과 활동의 저변에 이규보의 철학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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