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합의, 가치보다 공학 우선한 것"
        2010년 03월 09일 05:2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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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3일 야5당과 시민단체들이 참여한 회의에서 합의문이 나왔다. 합의문이 나오자 진보신당은 혼란에 휩싸였다. 일부 당원들은 합의문의 파기와 지도부 책임을 이야기하고, 지도부는 합의문은 앞으로 성실히 협상에 임하겠다는 ‘선언’에 불과하다며 진화에 애를 쓰는 모습이다.

    문제 제기를 하는 당원들은 주로 민주당 또는 국민참여당과의 선거연합이 지니는 정치적 문제점과 합의 과정이 민주적인 절차를 걸쳐 충분히 논의되고 공유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이런 지적은 타당할 수도 오해일 수도 있지만, 이 각각의 주장과 논점들이 진보신당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는 논의인 것도 분명하다. 따라서 이 각각의 쟁점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와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이번 사태를 좀 더 다른 시각에서 볼 필요도 있다. 나는 단지 ‘민주당, 국민참여당과 손을 잡을 것인가, 잡지 않을 것인가’의 정치적 판단과 당의 의사결정 및 집행구조의 문제점을 넘어서 진보신당이 창당 이후 걸어온 길과 그 공과가 이번 합의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진보신당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않으면 이런 합의는 언제든 되풀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무례’와 진보신당의 ‘무능’

    올해 초 민주노동당이 대표 신년기자회견을 통해 진보신당에 지방선거 전 통합을 제안하고, 중앙위원회를 통해 진보대통합을 공식적으로 결정하자 진보신당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두 당의 관계를 이혼한 부부에 빗댄 격한 표현도 등장했다.

    ‘풍찬노숙할 각오’로 분당을 결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 민주노동당 주류의 종북주의와 비민주적 행태에 대한 어떤 반성이나 평가도 없이 다시 합치자고 하니 ‘대체 우리를 어떻게 보는 거냐’며 분노하는 것도 당연하다.

    재통합은 최소한 분당의 원인에 대해 성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추구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분당의 원인에 대한 어떤 반성도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은 채 재통합에 응하지 않으면 민중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협박하니 기가 찰만도 하다.

    그러나 분노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민주노동당과 분당한 지 채 2년이 안 지났는데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어떤 성의 있는 조치도 없이, 재통합을 압박하고 다닐 정도로 진보신당의 처지가 힘겨워졌다는 것에 그 근본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분당과 창당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진보신당의 지난 2년이 자리잡고 있다.

    정당은 사회적 비전을 제시하며 이것을 통해 힘을 확대한다. 이런 의미에서 독자적이고 다른 정당에 비해 차별성 있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정당은 유권자의 선택을 받기 힘들다.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 주류의 종북주의와 비민주성을 비판하며 진보정당운동의 혁신과 재구성을 통해 진보정당운동의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을 자임하면서 출발했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서는 민주노동당과의 차별성을 적극 부각시켜 ‘구(舊)진보’를 넘어선 ‘새진보’로서 진보신당을 자리매김하면서 기존에 민주노동당에서는 포괄하지 못했던 진보운동의 다양한 흐름을 적극 포괄해 나갔어야 했다.

    그러나 분당 후 2년이 지났지만 안타깝게도 진보신당은 아직 민주노동당과 차별성 있는 진보의 내용과 영역을 개척하지도, 새로운 세력을 포괄하지도 못했다. 그 결과 국민들에게 진보신당은 진보세력의 소수파로 언젠가는 민주노동당과 통합할 세력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이것을 잘 아는 민주노동당이 진보신당에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고 그 첫 번째가 바로 재통합 압박이다. 결국, 진보신당은 당의 내용과 정책, 당의 운영과 내부 민주주의에서 민주노동당을 넘어서는 차별성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민주노동당의 ‘황당한 구애’에 시달려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독자적인 정치적 비전과 자산을 만드는 일에 집중할 수도, 다양하게 형성된 세력관계를 활용하여 비어있는 정치적 자산을 일시적으로 커버하며 새로운 상황을 조성하고 다시 이를 활용하는 전략을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번 5+4 선거연합 합의는 진보신당 지도부가 독자적인 정치적 자산과 비전을 만드는 것보다는 세력관계의 활용을 통한 단기적 성과에 매몰되는 정치로 나아가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

    신년 기자회견과 5+4합의, 그 사이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의 진보신당과 재통합 추진 기자회견 다음날 노회찬 대표는 신년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서 노대표는 “‘진보적 가치’에 입각한 선거연합만이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라며 노대표의 제안에 대한 다른 정당의 반응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지방선거가 진보정당에게 마지막 선거가 아닌데, 원칙과 기준도 없이 연대한다면 그것이 국민 눈에 담합이나 야합으로 비춰질 것”이라며 제시한 내용-가치연합의 내용-이 최소기준임을 밝혔다. 이는 누가 보아도 당대표가 직접 선거연대의 가이드라인을 밝히며 이 기준에 합의하지 않으면 자기 갈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런데 3월 3일의 5+4 합의문은 협상 책임자가 스스로 “핵심적 정치 의제인 비정규직, 사회복지세 신설, 그리고 과거부터 미래까지 중요한 쟁점인 한미 FTA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이 부분은 의견 접근이 이뤄지지도 않았다”고 밝힐 정도로 선거연합의 전제 조건인 가치연합의 최소 조건도 합의되지 않았는데 덜컥 선거연합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그래놓고 실은 이번 합의의 핵심이 광역자치단체장 후보 배분 문제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선거연합의 핵심이 ‘가치중심’에서 ‘광역자치단체장 분할’-정확하게는 수도권 1곳, 호남 1곳의 광역자치단체장에 민주당이 아닌 다른 당의 후보도 단일후보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정도의-로 바뀐 것이다.

    선거연대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가치에서 선거공학으로 바뀐 것이다. 이번 합의는 협상을 계속하겠다는 선언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협상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그 사이에 바뀐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 이번 5+4 합의의 경우 단지 협상의 중요한 기준이 바뀐 것을 넘어 한미FTA에 찬성하고, 노동유연성 확대에 적극적이며, 부동산 투기 조장에 열심인 세력하고도 선거공학상 거래가 가능하면 연대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 더 심각하다.

    신년기자회견에서 당 대표는 당의 최소한의 정체성에 반하는 정치협상을 진행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이제는 광역자치단체장 야권 단일후보 레이스에서 조금이라도 진전된 룰이 도입된다면-그 실효성에 대해서도 자세히 따져야겠지만-당의 강령과 정면 충돌하는 정치세력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앞의 민주노동당과 통합 관련해서도 언급했듯이 아직 당의 정체성과 차별성이 내외적으로 튼튼하게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 합의문은 그나마 미약한 당의 정체성과 정치적 기반을 결정적으로 허물 수 있다는 점이다.

    진보신당의 정치적 색깔이 분명하게 국민들에게 인식된 상황에서는 정치연대의 폭이 넓을 수도 있다. 무리한 연합을 해도 국민들은 진보신당의 ‘색깔’을 많이 혼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진보신당 자체의 정체성이 굳건히 확립되지도, 명확히 인식되지도 않는 상황에서 민주당까지 포괄하는 선거연합에 어떠한 내용적 기준도 없이 참여하는 것은 진보신당을 민주당의 2중대로 비춰지게 할 위험성이 높다.

    독자적 정체성과 정치적 자산을 형성하기도 전에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번 합의는 진보신당 지도부가 독자적 정체성과 정치적 기반의 확립을 희생하더라도 선거에서 자당의 야권 단일 광역후보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합의문을 통해 이런 전략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것이 올해 1월 초와 3월 초 두달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다.

    선거공학에 매달려서는 백년정당 안돼

    앞에서 나는 민주노동당의 무례의 다른 면에는 2년 동안 자신의 분명한 정체성을 확립하고 정치적으로 확고히 하지 못한 진보신당의 현실이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런 현실이 당 대표 신년기자회견과 3월 3일 5+4합의의 차이를 가져온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독자적인 내용과 정책을 형성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확고히 인식시킬 능력의 부족은 독자적 정치력의 부재를 낳고, 이런 독자적 정치력의 부재는 결정적인 시기에 선거공학과 이벤트에 의존하는 정치를 부채질 한다. 그러나 문제는 선거공학과 이벤트에 의존하다가는 그나마 있는 독자적 정치색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이런 상충관계 때문에 지도부는 해당 시기에 어디에 집중할지 우선순위를 선택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창당 1년째인 진보신당은 폭넓은 선거연합을 위해서라도 우선 자신의 고유한 정치적 내용과 정책, 진보정당에 걸맞는 참여민주적 당 운영의 전형을 확립하도록 노력하고 이런 자신만의 색깔이 침해되지 않거나 더욱 돋보이는 방식으로 연합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자신만의 정치력을 하나하나 튼튼히 확보해 가야 다른 세력과의 관계에서 흔들리지 않고 사태 장악력을 가진 정당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5+4합의를 통해 당 지도부는 장기적으로 당의 독자적 정치력을 형성하기보다는 정치공학과 선거공학에 의존한 단기적 성과를 우선시하는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이렇게 해서는 민주노동당과 차별성을 부각시킬 수도, 따라서 민주노동당의 ‘무례’를 멈추게 할 수도 없다. 뿐만 아니라 앞서 이야기한 당의 독자적인 정치력 부재가 정치공학과 선거공학에 따른 당운영을 부채질하고 이는 또다시 당의 독자적 정치력을 약화시키는 악순환을 가져올 수도 있다.

    당은 선거 때마다 흔들릴 것이고, 국민들은 진보신당을 어디든 곧 합쳐질 당이나 독자적 집권의지가 없는 당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국민과 지지자들로부터 당으로서의 연속성과 집권의지에 대해 신뢰를 받지 못하는 당은 결코 오래 갈 수 없다. 이렇듯 향후 당의 발전 방향을 가르는 기로에 5+4 합의가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번 합의에 대해서는 보다 깊고 치열한 당내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5+4합의,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어야

    민주노동당에서 한참 탈당 러시가 있을 무렵 그 당시 선도탈당을 했던 한 분이 쓴 ‘이번을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길바닥에서 얼어 죽을 각오로 자기성찰과 진보정치의 혁신과 재구성을 하겠다’는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의 진보신당에 ‘그 당시의 그 마음’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방침과 관련한 논란이 그 중 하나인데, 지금 진보신당에 있는 분들도 민주노동당에 있을 때 민주노총이 배타적 지지방침을 택하도록 많은 역할을 했었다.

    그런데 그때는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분들이 이제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창당한 후에는 민주노총이 배타적 지지방침을 고집한다고 분노한다. 그러나 이런 입장변화의 과정에 과거의 행위에 대한 깊은 성찰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과거에 대한 성찰적 비판 없이 처지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면 과연 이런 자세로 어떻게 자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찰해도 모자란 진보정치의 혁신을 하겠다는 것인지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진보정치의 재구성은 진보신당의 분명한 창당 정신이지만 막상 진보신당 지도부는 사회당, 사노준 등 진보정치 재구성의 주요한 주체들과는 성의 있는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민주당과 선거연합을 하고 민주노동당의 재통합 운운에 말리고 하는 것은 사회당, 사노준 등의 의구심을 더욱 키워 진보정치 재구성에 심각한 장애를 가져올 것이 분명한데도 진보신당 지도부는 가까운 이웃을 버리고 먼 나라의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기에는 열심이다. 이래서야 진보정치 재구성은 버려진 자식일 뿐이다.

    나는 이런 모든 과정이 진보신당의 창당 정신을 좀먹고 그 결과 5+4합의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원칙 없는 합의와 선거공학에 매몰된 단기성과적인 발전 전략이 자리 잡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5+4합의 이후 당 홈페이지를 통해서, 혹은 다른 자리를 통해서 표출되는 당원들의 수많은 항의와 의견이 진보신당에 활기가 있음을,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근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당원들로부터 시작하여 진보신당에 새로운 흐름이 형성될 수 있기를, 그래서 5+4합의가 진보신당에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훗날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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