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석학, 고가 구매?
        2010년 03월 08일 08: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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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으로 갈 때마다 생기는 한 가지 추가적 이점은, 항공기에서 공짜로 나누어주는 보수 신문들을 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저는 다소 게으른 중생이기에 국내 소식을 알아야 한다는 궁금증과 의무감에 <한겨레>이나 <경향>을 인터넷으로 그냥 한 번 쯤 검색하곤 하지만, 귀한 시간까지 들여서 <조선>이나 <동아> 등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해외석학 10명에 5백억원?

    그 시간에 제 공부를 위한 원자료 한 줄 더 읽는 것이 아무래도 더 절실하게 느껴지기에 말씀입니다. 그런데 기내에서 ‘공짜’로 주는데다 제 서가 속의 원자료도 없고 시간이 좀 남기에 대개 <조선>, <중앙> 등을 정독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늘 놀라운 발견들은 잇따릅니다.

       
      ▲ 필자

    예컨대 이번에, 약 2주에 국내에 갔을 때에 포항공대(요즘 이름은 포스텍인가 그렇답니다. 영어 공용화한다고 해서 이렇게 과감하게 ‘내지어’로 개명했습니다…)의 새로운 희소식을 <조선>에선가 접하게 됐습니다.

    노벨상 등 주요 상들을 받은 ‘해외 석학’ 10명을 초빙하는데 500억을 쾌척하여 유관업계에서 화제에 올랐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500억이 아이들의 등록금을 더 인상시켜서 얻을 것인지 중앙정부의 또 무슨 ‘세계화’ 프로젝트 일환으로 납세자의 주머니에 가져가 석학분들께 공손히 바칠 계획인지 그 기사에서 밝혀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뭐, 그것까지 밝혀주지 않아도 계획의 윤곽은 좀 보입니다. 500억에 사올 석학들의 ‘권위’에 힘을 얻어 ‘세계 50위 대학 진입’을 하는 등 대학가의 삼성이나 LG가 되어보자는 것인 셈입니다. 그 ’50위 최고대학’, ‘100위 최고 대학’ 등 랭킹을 정하는 고약한 양놈들이 우리의 권위를 알아주지 않고 있기에 일단 비싼 돈에 가장 권위 많은 그 중의 ‘몇 명’을 사와 그 난공불락의 ‘세계적 권위’의 성곽을 함락시키자, 이런 계획인 셈. 참, 제갈량과 원나라 태조 성길사한(칭기즈칸)이 따로 없습니다.

    ‘권위 구매’ 프로젝트는, 꼭 이공계 내지 자연과학에 국한되는 것도 아닙니다. 국내의 해외 한국학 지원 기관들이 ‘해외석학’이 (그 본래 전공이 중국학이든 일본학이든) 한국학 프로젝트를 해줄 경우에 커다란 연구비를 지급하겠다고 유혹하고 있으며, 서울대 국사, 국문/국어 계열부터 비롯하여 ‘외국인’ (물론 이 경우에는 외국과 영미권은 동의어입니다) 교수 모시기에 역시 바쁜 것입니다.

    권위 구매 프로젝트

    몇 군데의 주요 대학은 인문학 분야 등까지 포함하여 본 학교의 교수와 ‘협력 연구’를 해줄 해외석학에게 또 커다른 장려금을 지급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한 마디로, 요즘에 들어 ‘권위’를 매개로 하는 국제거래들이 대한민국에서는 대단히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셈입니다.

    옛날에는 단순한 ‘노벨상 대망론’, 또는 ‘노벨상 따기 00년 계획" 정도의, 다소 단순하고 일차원적 프로젝트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본격적인 ‘시장’이 형성돼갑니다.

    사실, 우리의 신성한 권위를 저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건 꼭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이 세계는 국민국가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국민국가 내지 국민국가의 조합(유럽 연합 등)마다 자기 나름의 독특한 권위 체계가 다 잡혀 있는 실정입니다.

    패권 국가의 조합, 즉 영미권의 권위는 – 극우의 헌팅턴부터 극좌의 캘리니코스까지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 일단 나머지 국가의 교양인 사이에 적어도 ‘인식’돼 있지만, 나머지 국민국가 사이의 상호적 권위 체계 인식은 다소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의 권위 체제에 전통적 지적 패권의 무게가 실려 있을수록, 그리고 문제의 국가들이 서로간에 문화적으로 가까울 수록 권위 체제에 대한 이웃에서의 인식은 강할 수 있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일반적 경우에는 국내적 명성은 국외에서 다소의 할인을 받아 거래됩니다.

    국내적 명성의 해외 디스카운트

    예컨대 전통적 지적 패권을 쥐고 있는 독일의 하버마스는 프랑스에서도 한국에서도 교양인 사이에 ‘역시 그 하버마스’지만, 독일에서는 일본의 마루야마 마사오는 과연 누구입니까? 일본에서는 (일정 수준까지 한국이나 대만에서도) ‘사상의 왕’인 그는, 독일에서는 ‘영문으로 저서 두 개를 낸’ 일개 지식인으로 거래될 것이니 그 ‘할인의 폭’은 알 만합니다.

    동아시아학이나 파시즘 연구 분야에서는 알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일반 독일 교양인들이 마루야마를 알 리가 없다는 것인데, 독일 바깥에서의 하버마스의 위치와 대조됩니다. 마루야마뿐만입니까? 왕휘 선생의 경우나 백낙청 선생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약간의 정도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대신에 백낙청에 대한 일본 교양인 일부의 인식, 내지 왕휘에 대한 한국 교양인 일부의 인식 등을 위안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패권 국가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의 경우에는, 지식인의 명성은 대체로 이웃나라끼리 가장 잘 거래된다는 법. 지식인들이 맞딱드리는 상황들이 서로 일정 수준까지 비슷하니 서로에 대한 관심이 일단 높다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선진화’의 과업을 이끌겠다는 우리들의 위대하신 국가적 CEO님께서 한-중-일 지식인들의 자연스러운 ‘서로 알기’에 전혀 만족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삼성 휴대폰들이 미국 시장까지 ‘막 치고 들어가는’ 것처럼 한국 대학과 대학 교수의 ‘권위’도 이제 패권국가의 지식 시장을 쥐고 흔들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위대하신 지도자의 3년(남은 임기)지계.

    ‘빨리빨리’ 해야 되는데, 시간이 없고 돈은 (아직까지) 많으니까 일단 ‘치고 올라간다’는 것은 ‘돈을 갖고 치고 올라간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모범적인 기업국가 건설을 향하여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고 있는 ‘스파클링 코리아’의 국가 브랜딩(branding)에 약간이라도 도움 줄 ‘양놈’마다 아낌없이 퍼줄 터이니 올 사람이 빨리 오라는 것입니다.

    글쎄, 응용과학 분야의 경우에는 ‘파격적 투자’가 어쩌면 (제대로 관리할 경우에는) 어느 정도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명의 ‘석학’만을 집중적으로 양성하다가는 제2, 제3의 황우석이 생길 가능성도 높지만, 비싼 설비가 필요한 이공계/응용과학에 한해서 금전적 투자의 효과는 분명하긴 합니다.

    인문학에 ‘빨리빨리’는 없다

    그런데 문학이나 인문학의 권위 문제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을 경영하고 있는 건설사 출신 분들이 조금 잘 모르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들이 알아야 할 게 대체로 세 가지 정도입니다:

    1) ‘파격적 연구비’를 보고 스파클링 코리아의 품에 안기려는 사람은 – 그가 비록 하버드에 속한다 해도 – 꼭 좋은 인문학자는 아닙니다. 세상의 월러스타인들에게는 돈보다 말이 잘 통하고 같이 연구하기가 좋은 ‘동료’들이 더 중요한데, 영문 학술지 논문 편수로 학자의 질을 재는 국내 대학에서는 ‘깊은’ 학자가 구조적으로 버티기가 힘듭니다.

    2) 인문학이나 문학 등에서는 ‘빨리빨리’는 절대 통하지도 않습니다. 일본 문학의 세계화는 최초 영문 ‘일본문학통사 출판과 함께 이미 명치 시대 말기에 시작됐기에 오늘날 (일본적 맥락을 거의 떠나버린, 후기 자본주의의 모범적 작가라고 할)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렇게 세계적 ‘권위의 사다리’에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해외 한국학의 경우에는 아직은 기초적 작업 (예컨대 제대로 된 영문 ‘한국근현대 문학통사’)마저도 해놓지 않은 상태니까 몇 년간의 ‘역량 축적 시기’는 어차피 필요할 것입니다.

    3) 지역주의라는 것은 미국 패권이 쇠약해지는 탈냉전 시기의 특징이기도 하니, 아무리 ‘하얀 낯짝’들을 사오는 데에 납세자들의 혈세를 많이 바쳐도, 함석한이나 김우창을 가장 제대로 이해할 곳은 당분간 일본이나 중국일 것입니다. 그것을 ‘천하게’ 여기는 것보다는 동아시아적 지식인들의 상호 연대를 위한 기본적 조건부터 만들어주는 것은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슨 말을 해도 피 같은 아이들의 동록금은 아마도 계속해서 ‘석학 모시기’에 이용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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