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 예산은 남성이다"
        2010년 03월 05일 12: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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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3월 8일이면 102주년 여성의 날이다. 최근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평등 점수가 100점 만점에 59점이라고 한다. 참 낮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성인지’란 용어가 점차 익숙해져 가고 있다. 성인지란 사회에 구조화되어 있는 성불평등 문제를 개선하기 위하여 각종 제도나 정책이 남성과 여성에 미치는 영향을 주목하는 접근을 가리킨다.

    성인지적 관점에서 사회를 되돌아보면 새롭게 발견되는 것들이 많다. 이번 주 <매일노동뉴스> 표지는 15명의 근로시간면제심의위원회 위원들의 인물사진으로 장식되었다. 모두 남성이었다. 왜 조직사회의 요직은 남성들이 독차지하는지.

    이런 상황에서 여성운동이 오랜 노력 끝에 만들어낸 성과가 하나 있다. 바로 성인지 예산제이다. 이는 성인지적 관점을 국가재정 영역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부예산은 성 중립적이라고 가정하거나, 혹은 성별 영향을 무시한 채 편성되어 왔다. 국가재정마저 기존 성 불평등구조를 재생산하는 데 일조해온 셈이다. 이에 국가재정이 성 평등을 증진하는 방향에서 운용되도록 정부예산의 편성, 심의, 결산과정에서 예산이 미치는 성별 영향을 고려하는 것이 성인지 예산제이다.

    올해는 이 제도가 시행된 첫 해이다. 과연 애초 취지대로 가고 있을까? 여성의 날을 맞아 현행 성인지 예산제를 진단해 보자.

    사례로 본 성인지 예산제

    우선 성인지 예산제의 내용과 역사를 살펴보고 가자. 성인지 예산제는 모든 정책이 사람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혜택을 줄 것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라고 요구한다. 종종 소개되는 ‘공중화장실 예산’ 사례를 보자.

    보통 공중화장실은 남녀가 건물의 절반씩을 차지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왔다. 그 결과 항상 여자화장실의 기다리는 줄은 남자화장실에 비해 길다. 하루에 화장실 이용횟수가 여성은 7.7회로 남성의 5.5회에 비해 많고, 한번 이용할 때 소요되는 시간도 여성은 3분으로 남성의 1.24분에 비해 길다. 성인지 예산제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화장실 이용의 성별 차이를 감안해 여성화장실 예산을 늘려나갈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보자. 현재 미술가 사회의 남녀인원 비중이 6:4라면 정부의 미술가지원사업 예산도 남녀 6:4로 배분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왜 남녀비율이 6:4일까? 남성이 여성보다 선천적으로 더 많은 미술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남성 비율이 높은 이유는 여성이 미술가로 성장하는 데 사회적 장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지 예산제라면 어떻게 할까? 현행 미술가의 성별 비중을 그대로 반영하기보다는 성평등을 제고하는 방향에서 예산을 배정해 나갈 것이다.

    한가지 유념할 것은, 성인지 예산제가 여성만을 위한 제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성인지 예산제의 목표는 ‘여성’을 넘어 ‘성 평등’에 있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아이 기저귀를 가는 교환대가 설치되어 있는 곳은 여성화장실뿐이었다. 하지만 아빠가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경우도 있기에, 최근 일부 공공시설 남자화장실에도 기저귀 교환대가 설치되고 있다. 이 역시 성인지 예산제가 적용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성인지 예산제, 한국에서 법제화되다

    성인지 예산제은 1984년 호주에서 처음 도입되었다. 이어 1995년 제4차 북경 UN 세계여성대회가 성주류화전략의 주요 의제로 성인지 예산제를 결의하였고, 유럽의회도 2003년 ‘성인지 예산 결의문’을 채택하였으며, 국제의회연맹(IPU)는 2004년 총회에서 각국 의회에 성인지 예산제 도입을 권고하였다. 현재는 세계 60여개국에서 성인지 예산제가 시행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후반부터 여성단체들이 여성 관련 예산활동을 벌였다. 이것의 성과로 2002년 ‘성인지적 예산편성 및 여성관련 자료제출 촉구 결의안’이 국회에서 채택되었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 성인지 예산제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져 마침내 2006년 국가재정법이 제정될 때 성인지 예산 관련 조항이 명시되었다.

    현재 성인지 예산제가 법제화된 나라가 한국, 프랑스, 필리핀 정도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나라 성인지 예산제는 주목할만한 제도임에 틀림이 없다.

    이제 정부는 국가재정법에 따라 예산이 여성과 남성에게 미치는 효과를 평가하고 그것을 예산편성에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작년 정기국회 때 올해 예산안의 첨부서류로 “예산이 여성과 남성에게 미칠 영향을 미리 분석한 보고서”(국가재정법 제26조)인 성인지 예산서를 제출했고, 내년부터는 이것의 집행을 평가하는 성인지 결산서도 선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 제도를 운용하는 주체가 이명박 정부이다. 왠지 걱정이 앞선다. 우려하던 대로 정부는 ‘이름’뿐인 성인지 예산서를 제출해 사실상 제도를 무력화하고 있다. 올해 성인지 예산제에서 드러난 다섯 가지 문제점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문제점 1 – 총론: 성인지적 재정전략 없는 성인지 예산서

    성인지 예산서는 향후 성 평등과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재정운용의 방향을 담은 문서이다. 그런데 올해 성인지 예산서에는 성인지적 재정전략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개별사업에 대한 간략한 요약만 있을 뿐, 현재 성 불평등 상황이 어떠한지에 대한 진단도 없고, 성평등 제고를 위해 어떠한 방향으로 재정을 운용하겠다는 전략도 없다.

    성인제 예산제가 단순히 여성분야 예산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재정 운용에 성인지적 관점을 적용하는 성주류화 전략의 의제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성인지 예산제의 본질을 훼손하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2009년에 우리나라 경제활동참가율은 평균 59.7%이다. 그런데 여성의 참가율은 남성의 72.2%에 비해 47.7%에 불과하다. 또한 전체 남성노동자 중에서 정규직 비중이 58.2%인데 반해 여성노동자 중 정규직은 34.4%이다. 제대로 된 성인지 예산서라면 현단계 노동시장 성불평등 실태를 진단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단계적·전략적 목표를 수립해야 하며, 재정을 통한 실행계획을 담고 있어야 한다.

    문제점 2 – 사업 자료: 개별사업별 1쪽 분량의 형식적 자료

    성인지 예산서에 포함된 성인지 대상 사업의 설명자료도 빈약하기 짝이 없다. 산모·신생아 도우미 지원사업, 보육돌봄 서비스 지원사업 등 개별 사업당 보통 1쪽 분량으로 형식적인 사업목표 몇 줄에다 사업의 대상자와 수혜자 현황을 남녀로 구별해 제시한 것이 전부다. 이는 성인지 예산서라기보다는 일부 여성관련 사업을 병렬적으로 취합한 것에 불과하다.

    성인지 예산서가 “예산이 여성과 남성에게 미칠 영향을 미리 분석한 보고서”가 되기 위해서는 성별 격차가 생기는 원인, 해당사업이 성 불평등 해소에 미칠 효과, 향후 해당사업의 목표 등이 제시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 문화관광체육부의 스포츠산업 인력육성 지원사업을 보면 수혜자 남녀비율이 각각 91%, 9%로 표시되어 있는 게 전부이다. 현재 스포츠산업 인력구조가 어떠한 지, 왜 해당사업 수혜자 중 여성이 9%밖에 차지하지 않는지, 향후 여성수혜자 비율을 높이려면 어떠한 조치가 필요한지 등의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문제점 3 – 대상: 정부사업 중 2.5%에 불과

    정부가 제출한 성인지 예산서는 적용 대상 사업 규모에서도 상식을 벗어나 있다. 올해 성인지 예산서는 전체 51개 정부부처 중 29개, 약 8,000개의 세부사업 중 단지 195개 사업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금액으로 보면 전체 정부총지출안 292조원 중 7.3조원이다. 사업수나 금액에서 모두 정부총지출의 2.5% 수준이다.

    어떻게 성인지 예산서가 이리 빈약해졌을까? 우선 정부는 성인지 예산서 이름이 ‘예산’이라는 이유로 전체 사업 중에서 기금사업을 모두 제외했다. 그래서 정부총지출안 292조원의 30.5%를 차지하는 기금사업 89조원이 아예 성인지 예산서 대상에서 사라졌다.

    예를 들어, 노동부의 올해 총지출안 12.3조원 중 91%를 차지하는 11.2조원이 고용보험기금, 산재보험기금 등 기금사업비이다. 모성보호육아지원, 육아휴직장려금 등 기금 사업이 원천적으로 성인지 예산서에서 빠져버렸다.

    또한 정부는 시행령의 한계를 악용해 성인지 예산서에 포함될 대상사업을 축소했다. 현재 국가재정법 시행령(제9조)은 기획재정부장관이 여성부장관과 협의해 마련한 기준에 따라 성인지 예산서 적용 대상사업을 정하도록 하고 있다.

    국가재정법이 예산편성의 일반 원칙으로 성인지 예산서를 규정하고 있는 데 반해, 하위법령인 시행령이 모법인 국가재정법의 성인지 예산제 취지를 훼손하고 있고, 정부는 이를 근거로 성인지 예산 대상 사업을 줄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육과학기술부의 평생학습계좌제 사업, 보건복지가족부의 방과후돌봄서비스사업, 문화체육관광부의 공공도서관 개관시장 연장사업 등은 누가 보아도 성별 영향이 중요한 성인지 예산서 대상사업들이지만 포함되지 못하고 있다.

    문제점 4 – 세입분야: 성인지 예산서에 포함되지 않음

    정부의 성인지 예산서는 세입 분야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 국가재정법에서 예산은 ‘세입과 세출’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정부의 재정지출과 마찬가지로 세입에도 성별 차이가 존재한다면, 이에 대한 원인 분석과 개선방향이 성인지 예산서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재산세 수입구조에서 성별 차이가 확인된다면,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지, 어떻게 완화해 갈 것인지를 따져 나가야 한다. 또한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여성의 무급노동에 대해서도 성인지적 평가가 필요하다. 가사노동이 공식 부가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아 재정수입의 대상은 아니지만 국민경제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 않은가.

    문제점 5 – 국회 심의: 심의체계 부재

    현행 국가재정법 및 국회법은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의 첨부서류들(성인지 예산서, 조세지출예산서, 국가채무관리계획 등)에 대한 구체적인 심의 절차를 규정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예산안을 제외한 첨부서류들에 대한 심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데, 성인지 예산서 역시 국회 심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미 성인지 예산제가 법제화될 때부터 국회예산정책처가 성인지 예산서에 대한 국회 심의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국회는 이를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국회 역시 정부가 제출한 성인지 예산서를 그대로 용인하며 자신의 임무를 방기하고 있다.

    성인지 예산제를 살리기 위한 개혁 방안

    지금까지 현행 성인지 예산서의 다섯 가지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올해 성인지 예산서가 워낙 부실해, 엄밀하게 말하면, 국가재정법에 따른 성인지 예산서는 아직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성인지 예산제를 살려내기 위한 개혁방안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인지 예산서에 성인지적 재정전략이 담겨야 한다. 성인지 예산서가 본연의 모습을 가지기 위해선 정부의 성인지적 정책방향, 성인지적 재정배분 원칙, 성평등 제고 목표 등을 담은 재정전략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둘째, 성인지 예산서에 포함된 사업들의 내용도 대폭 보완되어야 한다. 성인지 예산서가 ‘예산이 남성과 여성에게 미칠 영향을 미리 분석하고, 그 결과를 예산편성에 반영하기 위한’ 법적 문서가 되기 위해서는, 해당사업 영역에서 존재하는 성별 격차에 대한 원인 분석, 해당사업의 성별영향 분석, 향후 사업 목표 등이 서술되어야 한다.

    셋째, 성인지 예산서는 원칙적으로 정부의 재정사업 모두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 현행 국가재정법은 예산(일반회계, 특별회계)과 기금을 모두 포괄하는 법이고, 국회가 심의하는 나라살림도 당연히 예산과 기금을 포함한다. 성인지 예산서 역시 이름은 예산이지만 중앙정부가 다루는 살림살이, 즉 예산과 기금을 모두 포함한 것으로 이해하는 게 상식이며 입법취지이다.

    넷째, 성인지 예산서는 재정지출 사업뿐만 아니라 세입분야 분석도 포함해야 한다. 세입은 우리사회 존재하는 성평등 구조의 문제점을 확연히 보여줄 수 있는 분야이다. 성인지 예산서는 세입구조에 대해서도 성인지적 평가를 수행해야 하며, 그것을 기초로 성인지 예산서는 성 평등을 위한 조세지출(조세감면)과 사업지출을 제안해야 한다.

    다섯째, 성인지 예산제를 다루는 국회 심의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여성위원회와 예결특위의 역할이 중요 하다. 여성위원회가 예결특위 ‘성인지 예산 분과’ 역을 맡아 개별 상임위원회 심사 전에 전체적으로 성인지 예산서를 검토해 상임위원회에 의견을 제출해야 한다. 이후에는 예결특위가 다시 상임위원회 심사결과를 종합해 성인지 예산서 전체를 다루는 절차를 밟아나가야 한다.

       
      

    위 <표>는 현행 성인지 예산제의 5대 문제점과 개혁방안을 요약한 것이다. 개혁방안들은 모두 법령 개정과 관련이 있다. 성인지 예산제에 소극적인 정부와 국회를 압박하기 위해선 국가재정법, 국회법 등을 개정해 정부와 국회의 과제와 역할을 명확히 정하는 것이 시급하다.(법개정 내용에 대해선 사회공공연구소 이슈페이퍼 20-03 “성인지적 재정전략 없는 성인지 예산제”를 참조)

    시민사회와 노동조합의 적극적 역할 중요

    성 불평등이 구조화된 한국사회에서 성인지 예산제가 지니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올해 처음 도입된 제도라는 점을 감안해도 성인지 예산제의 부실 정도는 도를 넘은 수준이다.

    한편 성인지 예산제의 성공을 위해선 시민사회의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표면적으로 성 중립적으로 보이는 정부정책 속에서 성 불평등 문제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지닌 주체들의 활동이 필요하다. 시민사회가 매년 성인지 예산제 감시활동을 왕성히 벌이며 정부와 국회가 포괄하지 못하는 성인지 예산의 한계를 지적하고 공론화해야 한다.

    노동조합의 역할도 작지 않다. 성인지 예산서에 기금사업이 모두 제외되면서 가장 타격을 받은 부처가 노동부이다. 결국 손해를 보는 사람은 여성노동자들이다. 또한 모성보호 범위, 사회보험 수혜, 공공기관 간접고용 등에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조치들이 성인지 예산서에 반영될 수 있도록 활동을 벌여야 한다.

    올해 하반기에는 다시 2011년 성인지 예산서가 국회에 제출될 것이며, 내년에는 올해 정부 예산활동에 대한 성인지 결산서도 선보일 것이다. 사실상 성인지 예산제를 무력화시키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행태에 맞서기 위해서는 여성계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노동운동의 적극적인 관심이 요청된다. 사회운동이 어렵게 만들어 낸 성과인데 잘 키워나가야 한다. (다음은 ‘국가채무와 재정건전성’ 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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