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부식, 모화주의 지배세력의 정점
        2010년 03월 03일 04:12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고려가 후백제를 무너뜨리자, 신라는 고려에 나라를 바쳤다. 이런 항복에 대해 신라 내에서의 반발은 거의 없었다. 1천 년 가까이 이어져 온 국가 치고는 허무한 종말이었다. 신라 말기의 상황이 그러하였다.

    백성뿐만 아니라 귀족층도 이미 마음은 신라를 떠나버린 상태였다. 신라의 항복은 신라의 귀족층에게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들은 대거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귀족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나라가 바뀌어도 인물은 변함 없었다

    고려의 지배세력은 그야말로 잡탕이었다. 처음부터 왕건을 쫓아 다녔던 장사치 무리들이 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자 궁예를 따르던 무리들이 들어왔다. 이 시점부터 최언위 같은 신라의 6두품 귀족들이 투항하기 시작하였다. 왕건의 세력이 커지자 기회를 엿보던 지방 호족들이 왕건 지지를 선언하였다.

    신라의 중앙 불교에 반발하여 지방에서 선종 불교가 퍼졌는데, 이들 역시 대부분 왕건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라의 귀족층들이 대거 고려의 귀족층으로 편입되었다.

    지배세력만 잡탕인 게 아니었다. 사상 역시 잡탕이었다. 신라의 지배적 불교였던 교종과 이에 반발했던 선종이 모두 받아들여졌다. 신라의 지식인과 귀족층이 합세하면서 유교가 들어왔다. 지리 도참가인 도선이 왕건이 왕이 될 것임을 예언하였다 하여 온갖 도참설, 풍수지리까지 횡행하였다.

    이런 세력의 잡탕과 사상의 난무는 왕건 집단에게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 왕건과 처음부터 그를 따랐던 집단은 장사치들이었고, 장사를 보호하려 고용된 무사들이었다. 그들에겐 새로운 국가에 대한 철학도 설계도 없었다. 오로지 승리의 일념으로 자신들을 지지하는 세력이면 출신도 사상도 따지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런 그들의 행보가 신라와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승리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후삼국이 재통일된 후, 고려는 본격적으로 국가 체계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아는 게 힘이라고 집권 경험도 있고, 학식도 가진 세력들이 이 과정을 주도해 나갔다. 그들은 신라의 지식인, 귀족층이었다. 그들은 이 과정을 통해 항복자의 신세에서 벗어나 권력층으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신라의 골품제는 폐지되고 과거제도가 도입되었다. 새로운 관료 충원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는 층은 넓지 못했다. 신라 출신 귀족과 지식인들이 보다 많이 중앙 정부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의 중앙 정부는 점점 더 신라 출신들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고려 전기, 그러한 권력층의 정점에 김부식(1075년~1151년)이 있었다.

    유교는 출세의 수단

    신라의 6두품 출신으로 고려 초 재상까지 지낸 최승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교는 수신(修身)의 근본이고, 유교는 나라 다스리기의 근원이다. 수신은 내세를 준비하는 것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바로 지금 힘써야 할 것이다. 오늘은 아주 가깝고, 내일은 멀다. – 『고려사』, 최승로 열전

    고려라는 국가의 이념적 구조를 이렇게 정리해놓았다. 물론 최승로는 유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불교는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고, 유교는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철학의 입장에서 볼 때 나라를 다스리는 일보다 수신이 보다 더 본질적이다. 우주 만물의 이치를 따지고 세계관을 형성하는 일은 ‘수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승로의 말대로라면 유교는 철학을 포기하게 된다. 실제로도 고려 전기 유학자들 중에서 유교를 철학의 입장에서 다룬 사람은 남아 있는 기록상으로는 없다.

       
      ▲ 김부식

    김부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쓴 글을 보자. 공자를 봉황에 비유하며 찬양한 「중니봉부」의 한 구절이다. 

    보잘 것 없는 선비는 대대로 내려온 보물을 일찍 물려받았으나 아로새긴 붓은 아직 꿈도 꾸지 못한다. 어려서 장구와 수식을 공부하고 나이 들어서는 경전들을 즐기고 음풍하며 남기신 기풍을 찬양하며 기어이 공자께 붙은 영광을 차지하려고 한다.

    대대로 내려온 보물이란 공자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이것을 일찍부터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어렸을 때 배운 것은 장구와 수식이다. 한 마디로 해서 문장이다.

    어렸을 때는 그렇다 치고, 나이 들어서도 경전을 즐기고 음풍을 한다고 한다. 여전히 문장만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찬양하는 남기신 기풍은 문장이다. 결론적으로 문장을 잘 지어 문장가로서도 영광을 누리겠다는 얘기이다.

    또한 그는 「대각국사비문」에 ‘이름을 적어두게 되어 영광이다’라고 썼다. 또한 “부처님의 말씀이 항상 퍼져 나라가 번창하게 해달라”는 불교의 축원문을 쓰기도 하였다. 유교 철학자로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유교를 공부하는 목적은 경전에 나오는 문장을 배우고, 그것을 갈고 다듬어 ‘좋은 문장’을 익히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물론 일차적으로 출세를 위해서였다.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 게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목표였다.

    고려 시대의 과거는 제술업, 명경업, 잡업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제술업은 시(詩)와 부(賦), 요즘 말로 하면 글짓기 논술로 뽑는 시험이고, 명경업은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 내용을 가지고 치르는 시험이다. 잡업은 기술직을 말한다.

    고려 시대를 통틀어 제술업 합격자는 6천여 명, 명경업 합격자는 4백여 명이었다. 유학을 공부하는 목적이 경전 공부가 아니라 문장 공부임을 알 수 있다. 유학 공부는 과거시험용 출세수단이었던 것이다.

    모화주의 이데올로기

    김부식의 집안은 쟁쟁하였다. 김부필, 김부일, 김부식, 김부의 등 네 형제는 모두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올랐다. 이 형제들 중에서도 김부식은 더욱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철학을 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국가 정책 차원에서는 뚜렷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김부식의 형인 부일은 고려의 유학생을 송나라 국학에 입학시켜 달라며 보낸 청원서에서 “화(華)로써 이(夷)를 변혁시켜야 한다”고 썼다.

    중국의 문물을 가지고 고려를 바꾸어 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또한 김부식의 생각이었다. 중국을 모델로 해서 고려를 중국과 같은 사회로 바꾸어 놓아야겠다는 생각, 바로 모화주의(慕華主義)였다.

    김부식이 쓴 「하행국학표」를 보자. 이 글은 왕이 국학을 방문하여 공자에게 제사를 지낸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자 쓴 것이다. 

    임금께서는 도가 지극히 높으시고 정치를 인의로 하시니, 요순 임금을 생각하시는 것과 같고, 은주시대의 전통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예법에 따라 제사를 지내시어 공자께 절하고 잔을 드리시며, 박사들에게 명령하시어 경전을 강의하게 하시니, 장차 수많은 인재가 나올 것이고, 무신은 반드시 공을 세울 것입니다. 이는 다만 한때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대대손손 기리 남을 모범이옵니다.

    요순을 본받아 정치를 하고, 은주의 전통을 따르라는 얘기이다. 또한 공자를 정성껏 모시면 인재가 양성되고 나라가 튼튼해질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런 공자 모시기가 대대로 이어졌으면 하는 기대감도 드러낸다.

    요순과 은주를 들먹이는 것은 유학자들의 공통된 레퍼터리인데, 공자를 지극히 모시자는 데서 김부식의 모화주의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또한 그의 대표작인 『삼국사기』가 그 이전에 있던 『삼국사』를 중국의 역사서술방식에 맞춰 편집한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그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김부식의 모화주의는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고려를 변화시킨다는 명분을 가진 것이었다. 그것은 제도, 학문 등에서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당시 고려 사회를 고려하면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김부식은 선진 문물의 수입에서 나아가 반대파에 대한 억압과 사회 통제의 이데올로기로써 그것을 활용하였다.

    조선 역사상 일천년 내 제1대사건

    1135년, 묘청이 반란을 일으켰다. 서경(지금의 평양)을 근거지로 하여 ‘대위국’을 세우고, 고려 중앙 정부와 일대 전쟁에 들어갔다. 이 내전의 성격과 결과에 대해 단재 신채호는 다음과 같이 썼다. 

       
      ▲ 묘청

    낭(郞), 불(佛) 양가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의 역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 즉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 만약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리하였더라면 우리의 역사가 진취적, 독립적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니, 이 전쟁을 어찌 ‘일천년 내 제1대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 신채호, 「조선사연구초」

    독립운동가 신채호의 절절한 마음이 우러나오는 평가이다. 신채호는 김부식의 승리 이후 우리나라에서 민족정신이 쇠퇴하였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런 평가를 그냥 따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지나친 단순화와 이분법, 묘청에 대한 과대평가 등 곱씹어보아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

    역사가 승리자의 기록이란 말이 있듯이, 패배자 묘청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서경 출신의 승려로서 1127년 인종의 고문이 되었으며, 서경 천도를 주장하다 실패하자 1135년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짧은 기록에서 독립당, 진취 사상 등을 읽어내기는 몹시 어렵다.

    묘청이 ‘대위국’을 세워 칭제건원, 즉 황제라는 호칭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들어 그의 자주파로서의 면모를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칭제건원의 주장은 묘청만의 것이 아니었다.

    김부식은 인종에게 올린 글 「광주사상표」에서 윤언이를 탄핵하면서 그가 칭제건원을 주장하였다고 쓰고 있다. 윤언이는 함경도 일대에 9성을 쌓은 윤관의 아들로서 서경천도파인 정지상과 가깝게 지내기는 하였지만, 서경천도파는 아니었다. 실제로 윤언이는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과 함께 반란 진압에 나섰던 인물이다.

    금나라와의 관계를 들어 묘청의 진취성을 말하는 견해도 있다.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워 세력이 커지면서, 고려에 대해 군신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였다. 여진족은 그 이전까지 오랑캐라 하여 고려에서 한 수 아래로 보는 종족이었다. 여진족의 요구에 대해 김부식 등은 현실적으로 싸워서 이길 힘이 없다는 근거를 들어 수용을 주장했다. 이건 사대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국제 정치에서 현실론의 문제이다.

    이제 서경천도운동의 경과를 보자. 시작은 권력투쟁이었다. 왕의 고문이 된 묘청은 인종에게 서경천도, 즉 수도 이전을 주장한다. 서경천도는 권력의 교체를 의미하였다. 집권 개경파가 몰락하고 서경 출신 중심의 서경파가 권력을 쥐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서경천도의 논리는 풍수도참설이었다. 개경의 기운이 다 끝났다는 것이다. 당시의 분위기는 이런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금나라가 군신관계의 요구를 해오고, 이자겸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매우 어수선한 시기였다.

    풍수도참사상의 영향력이 여전하였던 시기에 개경의 기운이 다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분위기였다. 인종 또한 이런 주장에 우호적이었다. 서경을 방문하였고, 그곳에 새로운 궁궐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집권 개경파의 힘을 막강하였다. 왕의 생각이 어떻든지 간에, 왕은 개경파의 손아귀에 있었다. 서경천도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묘청은 반란을 일으켜 내전에 돌입했다. 김부식을 대원수로 하는 정부군에 맞서 1년 2개월여의 싸움을 벌였으나, 정부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싸움의 결과는 무엇인가. 집권세력 내 판도의 정리였다. 여러 세력이 잡탕처럼 엉켜있던 지배세력 내의 판도가 신라 출신 세력 중심으로 재편된 것이었다. 김부식은 그 세력의 정점에 위치하여 자신의 시대를 열었다.

    철학의 측면에서 볼 때, 낭가와 불교 대 유교의 싸움에서 유교가 승리하였다고 할 수 없다. 불교는 여전히 지배적인 사상이었고, 낭가 역시 그 영향력이 계속 이어졌다. 유교가 전면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조선이 개국되면서였다.

    결국 서경천도운동은 잡다한 여러 요소가 개입되기는 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권력투쟁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배세력 내의 판도 정리였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이유

    묘청의 난이 진압된 후, 김부식은 『삼국사기』 편찬 작업에 들어갔다. 그것은 사회 통제의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는 『삼국사기』를 편찬해야 할 이유에 대해 『진삼국사기표』에서 이렇게 썼다. 

    옛 『삼국사』는 문자가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도 빠진 것이 많아서 군왕의 선악, 신하들의 충성과 사악함, 나라의 안위, 백성들 속에 떠도는 어지러운 이야기가 모두 드러나지 않아 교훈을 삼을 수가 없다.

    그래서 유교적 전범에 맞춰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문자가 거칠고 졸렬하다거나 빠진 사적이 많다거나 하는 얘기는 명분에 불과하다. 김부식이 실제로 하고자 한 일은 ‘고구려 의식’의 제거였다. 그는 ‘백성 속을 떠도는 어지러운 이야기’라 하여 단군신화와 고구려 건국신화를 삭제했다. 발해의 역사는 사라졌다.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며 세워졌다. 그리고 옛 고구려의 영토회복을 위해 북진정책을 추진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구려 의식’은 왕건을 따라 고려를 세운 세력들의 주요한 의식의 하나였고, 또한 옛 고구려 영토 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의식이었다.

    그러나 새롭게 고려의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신라 출신들에게는 이런 ‘고구려 의식’이 애당초 없었다. 그들은 신라의 문화적 전통을 이어받고자 하였다. 그들이 권력의 최정점에 섰다. 그들에게 있어 ‘고구려 의식’은 없어져야 할 것이었다. 그 일을 김부식이 담당하였다.

    김부식과 정지상

    김부식과 정지상에 관한 일화가 전해온다. 묘청의 반란이 일어나자 김부식은 즉각 정지상을 처형하였다. 묘청을 처음 임금에게 소개한 사람은 정지상이었다. 서경천도운동도 함께 하였다. 그러나 묘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정지상은 개경에 있었다.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김부식은 서경으로 출정하기 전에 정지상부터 제거해버렸다.

    김부식이 죽고 난 반세기 후에, 이규보는 『백운소설』에서 김부식과 정지상에 얽힌 에피소드를 소개하였다. 

    정지상은 김부식에게 죽음을 당한 후 귀신이 되었다. 하루는 김부식이 “유색천사록 도화만점홍(柳色千絲祿 桃花萬點紅), 버드나무 가지는 천 갈래 실처럼 푸르고 복숭아 꽃은 만 개가 붉구나”라는 싯귀를 지었다. 이 때 귀신이 된 정지상이 나타나 “누가 천 갈래인지 만 개인지 세어보았느냐? 왜 ‘유색사사록 도화점점홍(柳色絲絲綠 桃花點點紅), 버드나무 가지는 가닥 가닥 푸르고 복숭아 꽃은 송이 송이 붉구나’라고 하지 않느냐”고 하였다. 하루는 김부식이 화장실에 갔는데 정지상 귀신이 나타나 힐난을 하며 그의 불알을 잡아당겨 김부식이 죽었다고 한다.

    정지상의 독창성이 보인다. 김부식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경위야 알 수 없으나, 이 에피소드는 이규보가 김부식에게 보내는 조롱이다. 이규보는 「동명왕편」을 지으면서 그 서문에서 김부식의 역사인식을 비웃는다.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김부식은 고려 전기 지배세력의 정점이었다. 그의 모화주의는 자신들의 지배권을 지키기 위한 반대파 억압과 사회통제의 수단이었다. 그에 이르러 정점이 되었다는 것은 곧 몰락과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