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너지 빈곤층'과 '에너지 내전'
        2010년 02월 26일 05:3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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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한국에도 번역되어 나온 『기후변화의 정치학』에서 앤서드 기든스는 희망의 정치를 이야기하라고 말하고 있다.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가 야기할 파국적인 재앙을 강조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오바마의 백악관에서 환경특별보좌관을 지낸 반 존스도 『그린칼라 이코노미』에서 기후변화에 대응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좋은 결과부터 이야기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긍정적 사고에 기반을 둔 행동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습관인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처한 조건이 이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 탓인지 기후변화의 담론은 아직도 어둡기만 하다. 적어도 이명박 정권과 녹색 경쟁을 펼치고 있는 우리는 그렇다. 이명박 정권이 기후변화 위기를 자본축적의 새로운 계기로 삼으면서 내세우는 녹색성장의 담론은 무지개 빛 공약과 다르게 새로운 갈등과 위기를 야기할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우리의 가시권 안에 들어와 있는 에너지 가격의 인상 문제가 그렇다. 긍정적 사고보다는 비판의 힘이 필요할 때이다.

       
      

    장기적인 에너지가 인상은 불가피

    논쟁적인 사항이기는 하지만, 장기적으로 에너지 가격은 점차 인상되어야 할 것이고 또 그럴 수밖에 없어 보인다. 정부는 올해 3월부터 가스를 시작으로 원가연동제를 실시하겠다고 밝히고 있으며, 2011년부터 탄소배출권 거래제를 시범적으로 진행하고 탄소세의 도입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또한 올해 서울에서 개최되는 G20에서 화석연료에 대한 보조금을 폐지하는 의제가 다루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결국 이런 제도 변화는 에너지 가격을 상승시키고, 이것이 에너지 절약과 에너지 효율을 높이도록 하는 압력으로 작동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물론 온실가스 감축의 효과를 얻게 된다.

    우리 정부뿐만 아니라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에너지 가격을 높여 나가겠다는 계획이 정당화되는 것은 기후변화와 석유정점이라는 구조적인 위기를 해결한다는 명분 때문이다. 물론 기후변화와 석유정점을 객관적인 위기로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만 수긍이 가는 이유기는 하겠지만, 이제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드물어 보인다.

    하지만 화석연료에 기반을 두고 발전한 사회에서 그 파장이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이를 외면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더 이상 외면할 수만은 없다.

    문제는 에너지 가격의 인상이 어떤 영향을 야기할지를 현재로서는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탄소배출권 거래제든 탄소세든, 기후변화라는 문제를 경제학적으로 내부화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 과연 이산화탄소 배출 감축에 효과적인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기후 문제를 경제제도로 풀 수 있을까

    특히 탄소배출권 거래제는 모범으로 삼았던 아산화황거래제도와 비교했을 때 규모가 크고 복잡하다는 점이나 유럽 배출권 거래시장의 논쟁적인 사례를 봤을 때, 그 작동 자체에 의문을 제시하는 이들도 있다. 게다가 오염자가 돈을 벌게 되는 황당한 결과도 목격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제도의 도입․변화가 산업별, 사회계층별로 어떤 영향을 줄지도 아직 명확하지 않다. 즉, 에너지 가격의 상승에 따른 부담이 공평하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국조세연구원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탄소세가 도입될 경우 철강 및 금속제품, 운수보관, 시멘트, 석유화학, 비철금속, 자동차 및 선박, 펄프지류 등에서 원가경재력이 크게 약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또한 소비자의 차원에서 보자면 에너지 구입 시에 납부하는 간접세의 형태를 띠게 될 가능성이 큰 탄소세는 소득 역진적인 효과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점은 온실가스를 감축하기 위한 수단, 예컨대 탄소배출권 거래제와 탄소세 등의 도입에 있어서 그것이 과연 온실가스 감축의 효과를 가지고 있느냐 뿐만 아니라 감축의 비용이 사회적으로 공평하게 배분되느냐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국제적으로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안의 논의에서도 이런 점은 잘 강조되고 있지 않다. 정부는 온실가스 감축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가장 많은 책임이 있는 기업에게 이를 부담시키기보다는 소비자들에게 이를 떠넘기고 있다.

    작년 코펜하겐 회의를 앞두고 정부가 국가온실가스 감축 목표치를 설정했을 당시, 그 이면에서 기업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진행된 노력의 일부가 드러나기도 했다. 작년 11월에 민주당, 김상희․김재윤 의원은 정부(녹색성장위원회)가 산업계가 실행할 수 있는 온실가스 감축잠재량을 보수적으로 추산하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67백만 톤의 추가적인 감축잠재량이 있는데, 2006년 온실가스 배출량 599.5백만 톤의 11.1%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에너지효율 개선, 석유납사 분야 등, 주로 기업이 감축해야 할 몫이었다.

    기업에게는 친절하게, 소비자에게는 가혹하게

    기후변화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 누군가 온실가스 배출을 줄여야 한다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기업들보다는 소비자들에게 그 부담이 더욱 주어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건물이나 교통과 같이 소비자들이 에너지를 직접 구입하여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분야의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압박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정부의 가장 보수적인 시나리오에서 이 분야들의 감축목표 비중은 각각 전체의 24%와 23%로 제시되고 있다. 이것은 소비자들이 더 춥게 살고, 더 비싸게 출퇴근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가능성으로 인해서 ‘에너지 빈곤(Fuel Poverty)’라는 용어가 주목받고 있을 정도다. 점차 심각해지는 사회적 양극화와 빈곤, 꾸준히 높아져 가는 석유가는 빈곤층들이 적절한 난방과 냉방을 위해서 지불해야 할 비용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저소득층 가정에서는 음식을 살 것인지 난방을 할 것인지 잔혹한 딜레마에 직면하기도 한다. 에너지 빈곤층에 대한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에너지 가격을 높인다면, 기후변화의 또 다른 비극을 목격하게 될지 모른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언급하자면, 기후변화와 석유정점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현재와 같은 삶의 양식을 바꿔야 할 것이다. 그것은 몇몇 기업이나 부유층뿐만 아니라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대량생산과 소비의 생활 방식에 별 의문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일반 시민들도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에너지 빈곤을 완화하겠다고 에너지 효율이 낮은 전기장판을 공급하는 방식과도 거리를 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가 공평하게 이루어지는가, 더나아가 현재의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가에 관심을 둬야 한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누구에게 책임지울 것인가?

    전세계적으로 ‘기후변화의 정치’가 시작되었다. 1라운드는 국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교토의정서에 이어야 할 포스트-2013년 체제가 아직도 불투명하다. 그러나 2라운드도 이미 시작했다. 국내에서 온실가스를 총량적으로 얼마나 줄일지는 결정된 것이다(물론, 한국의 역사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언제든 다시 문제삼아야 할 일이다).

    이제 문제는 그 감축량을 국내에서 어떻게 배분하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다. 즉, 어느 산업이, 또 어느 부문이, 나아가 어떤 계층이 더 많이 감축해야 하는지를 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한 게임의 룰은 없다. 국민의 의견을 대의한다는 국회도 이에 관심이 없다. 정부와 기업, 그리고 전문가의 테이블 위에서만 논의될 뿐이다.

    누가 더 탄소를 더 줄일 것인가, 또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 혹시 이 과정에서 경제적 수입이 얻어진다면,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이런 문제가 공평하게 결정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탄소경제’의 부흥이 아니라 ‘탄소내전’을 겪을지도 모른다. 에너지 가격 인상 논의는 그 서막을 알리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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