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사민주의가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
        2010년 02월 24일 11: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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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래의 글은 25일 열리는 사회민주주의연대 주최의 토론회 <제3의 길인가, 사회민주주의인가?>에서 발표될 주섭일의 발표문「’제3의 길’의 종언과 사회민주주의의 새출발」에 대한 토론문입니다. 이 글을 포함한 토론회 자료는 독자게시판에서 다운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1. 사민주의 이념의 장점과 단점

    특정한 역사적 시기의 어떤 사회공동체가 가진 구성요소 내지 특징들을 그 본질을 중심으로 보편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이념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사민주의의 경우 그 본질적 구성요소들을 특정하기가 상당히 애매하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한 사회의 이상적인 경제적 분배체제나 사회정의 또는 평등에 관한 관념은 역사적 시기 별로 변화해왔고, 지금도 지역이나 나라마다, 그리고 사회구성원 각자가 가진 생각이나 의식 수준에서 다양한데, 사민주의 역시 이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등장한 근대 이후로 보았을 때, 사민주의는 대체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나 자본주의적 시장 자체의 철폐를 도모하기 보다는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와 시장의 효율성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조세와 사회보험과 같은 재분배 정책수단들을 동원하여 국가가 다양한 수준에서 분배와 복지정책을 추진하는 방식으로 시장이 야기하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완화를 추구해왔다.

    수정자본주의를 통해 시장자유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완화하고자 시도한 역사는 시기별로, 지역별로, 국가별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왔고, 그 중에서도 노동운동의 성과 위에 보다 평등한 복지국가를 실현한 유럽의 사민주의를 중심으로 사민주의 이념이 형성되었다.

    유럽 사민주의 내에서도 최근 북유럽형 사민주의, 대륙형 사민주의, 제3의 길 등과 같은 사민주의 이념과 정책의 다양한 분화나 사민주의가 달성한 성과와 한계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들이 존재하고 있다.

    결국 특정한 시기에 어떤 국가나 사회가 처한 구체적인 조건, 특히 경제적 조건의 차이에 따라 국가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완화하기 위한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의 다양한 조합을 모색해왔기 때문에 사민주의 이념은 다양성으로, 따라서 애매함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사민주의는 자신의 이념적 핵심요소를 적극적으로 정의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념이다. 다만,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 및 시장을 철폐하고 정치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추구하는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와 스스로를 구별함으로써, 그리고 자본주의적 소유관계 및 시장의 효율성을 우상화하는 극단적 시장자유주의와 일정하게 선을 긋는 수준에서 소극적인 정의를 택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구분만으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다양하게 민주주의가 진전해온 현실에 비추어 사민주의 이념만이 가진 독특함과 매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민주의는 그 이념적 애매함을 통해 서로 다른 조건을 가진 다양한 사회에서 그 사회가 처한 조건에 따라 그 사화에 적합한 이념적 내용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변화와 적응이 가능한 이념이라는 점에서 창조적 적응력을 보유한 이념이라는 점에서 그 변용능력은 장점이라고 할 것이다. 반면 이념적으로 너무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념으로서의 효용이나 응집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단점인 것 같다.

    2. 유럽 사민주의와 사민주의의 위기 문제

    발제자 선생님은 최근 유럽의회 선거에서의 사민주의 정당들의 패배, 영국 블레어와 독일 슈뢰더로 대표되는 제3의 길 노선의 실패, 독일의 메르켈과 프랑스 사르코지의 집권으로 대변되는 유럽에서의 중도우파의 약진 등을 이유로 유럽 사민주의의 위기를 논하고 있다.

    위기의 원인으로 제3의 길과 같이 사민당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이나 철학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구사민주의 전통에서 이탈하였다는 측면과 메르켈이나 사르코지 등으로 대표되는 중도우파가 사민주의적 정책을 실용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중간층을 중심으로 정치적 지지기반을 확대한 측면을 들고 있다.

    사실 사민주의의 위기가 역사적으로 사민주의가 추구해온 정책이 서구 유럽에서는 이미 복지국가의 형태로 상당 부분 실현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역설은 상당히 수긍이 가는 논지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유럽의 중도우파도 어느 정도 유럽이 이미 성취한 복지국가시스템을 인정하고 기본적으로 그러한 틀 내에서 정치를 하고자 한다면 역으로 사민주의는 무엇을 통해 중도우파와 자신을 차별화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중도우파와의 차이가 질적 차이가 아닌 양적인 차이로 유권자들에게 받아들여진다면, 그래서 중도우파의 집권에 대해 유권자들이 복지국가의 해체를 우려하지 않는다면 사민주의가 중도우파에 비해 떨어진다고 평가될 수 있는 다른 요소들(예를 들어 외교능력, 치안 등 사회 안정 유지능력, 경제위험을 관리하는 능력 등과 같은 실용적 통지능력에 대한 신뢰도)에 있어서의 열위로 인해 결국 집권을 기대하기 어렵게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유럽의 사민당들이 지지율 하락에 따른 위기의식을 느끼고 생태사회주의를 사민주의의 새로운 가치로 수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녹색당과의 연대에 적극 나서고 있다는 점은 그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생태라는 새로운 이념적 가치 역시 유권자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수준의 정책으로, 그것도 중도우파 정당과 차별화된 방식으로 정립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할 것인데 이러한 전환은 지금 진행 중인 현상인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적 시장은 세계화되어 있지만 세계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일국적 경제, 사회정책을 통한 자기 완결적 제도는 존재하기 어렵다. 어느 국가든 세계시장의 압력을 조건으로 삼아 정책을 조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국민적 테두리 내에서 생태적 가치를 경제와 결합하여 제도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수 있으며, 그 실현가능성에 대해 유권자들이 신뢰를 갖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유럽 사민당이 새로운 가치를 수용하여 이념적 진화를 모색하고, 이를 토대로 중도우파에 대한 차별화에 성공하면서 제도화의 수준까지 나아가게 된다면 다시 한 번 이념적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이는 한국사회와 정치의 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3. 한국사회와 사민주의의 비정상적 관계

    왜 한국사회에는 사민주의 이념을 내건 사민당이 존재하지 않으며, 진보정당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그것도 극히 작은 정치적 영향력만 가진 수준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한국사회가 가진 어떠한 조건으로부터 이러한 사태가 초래되었으며, 향후 한국사회에서 사민주의적 담론이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사민주의 이념과 정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배우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이를 대중적으로 설득하여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는 일, 나아가 그러한 정치적 힘을 기초로 집권을 통해 그 가치와 철학을 제도로서 실현하기까지 하는 일 등은 이와는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 사민주의의 내용과 흐름을 이해하고, 또 유럽에서 성공한 사민주의적 제도들을 벤치마킹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근본적으로 사민주의는 일국적 관점, 즉, 일국적 모델을 중심으로 하는 케인즈주의적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그 중요한 정책수단으로 추구해왔다는 점에서 한국경제를 일국적 차원에서 분석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수출을 통해 먹고 산다고 하는 관념은 한국의 유권자들에게는 거의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러한 조건에서 내수 중심으로 먹고 살자는 방식으로는 잘 설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세계시장과 통합되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한국경제의 현실을 감안하여 적용이 가능한, 그리고 대중들에게 설득력과 신뢰를 줄 수 있는 일국적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수출 중심의 한국경제를 상수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한국적 사민주의는 재벌 대기업 중심의 수출경쟁력을 유지하는 복지국가의 건설이 가능함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로, 한국사회는 아직도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경험이 대중들과 지식인들의 상당 부분의 의식을 규정하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한국자본주의가 달성하고 있는 경제적 차원만으로는 분석하기가 어려운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요소이다.

    사민주의는 일국적 경제사회정책을 중심에 놓고 있기 때문에 남한을 중심으로 한 정책을 중심으로 추진되어야 할 성격의 이념인 반면 북한과의 통일을 통한 근대민족국가 건설을 1차적인 과제라고 생각하는 경우 사민주의 이념과 정책은 후순위가 되게 된다.

    역사적으로 식민지시절 지식인은 사회주의자도 민족주의자였으며, 분단 이후 남한의 운동권의 역사 역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큰 틀에서 보면 통일과 민족주의적 과제를 중심에 놓고 있었다고 할 수 있고, 현재 NL로 대표되는 운동권 노선이나 이들이 장악하고 있는 민노당이나 민주노총의 존재는 한국사회에서 민족주의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증명해주고 있다.

    저항적 민족주의라고 하더라도 사민주의는 기본적으로 민족주의라는 이념과는 친하지 않다. 지식인과 운동권 주류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한국사회 대중들의 정서적인 민족주의 성향 및 박정희 정권 시절의 경험을 통해 주로 함양된 것으로 보이는 대중들의 국가주의적 성향도 장애물일 것이다.

    세 번째로, 한국사회가 가진 이념적 협소함이 사민주의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사민주의를 포함한 사회주의적 성격의 이념은 적어도 50대 이상의 세대에게는 한국전쟁이라는 프리즘과 북한이라는 현존재를 통해 인식되면서 매우 협소화되어 있다.

    뇌리에 깊이 뿌리박힌 이와 같은 왜곡된 관념으로 인해 사민주의조차 북한식 사회주의와 뭐가 다른지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경제적 조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의식과 관념은 쉽게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조건은 이념적 협소함으로부터 해방되고 글로벌화된 마인드를 가진 세대가 주류가 되지 않는 한 쉽게 해소되기 어려울 것이다.

    네 번째로, 한국사회가 압축적인 성장을 해오는 과정에서 형성된 세대간의 문화적 달등 또한 한국정치의 중요한 정치적 갈등의 축이 되고 있다. 한국사회의 윗세대가 가진 개인적 의식은 봉건적이고 유교적인 것에 가깝지만 이는 자본주의화된 현실에 부합하지 않은 채 퇴행적으로 존재하면서 자본주의 이후의 의식인 사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유교적 사회주의로 나아갈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해체된 상태이기 때문에 과거 기독교 사회주의적 전통을 통해 사회주의를 쉽게 수용했던 유럽에 비해 한국사회는 한국적인 전통에 의거하여 사회주의 의식을 구축하는 것이 어렵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섯 번째로, 박정희 시절 개발정책의 성공신화가 만들어낸 부산물이기도 한 지역갈등과 개발주의는 계급적 이해관계를 은폐하고, 사교육과 아파트로 대표되는 한국 중산층의 욕망구조를 재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지역주민들 역시 지역개발을 지역의 발전 내지 자신의 삶의 진보와 동일시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개발과는 친하지 않은 사민주의적 가치들이 현실적인 정치적 지지를 받기 어려운 구조이다.

    이와 같이 한국사회가 사회주의적 또는 사민주의적 이념과 가치를 수용함에 매우 취약한 조건과 이유들에 대해서는 더 풍부하고 전문적인 연구와 분석, 토론이 행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냉정하고 명확한 현실인식을 토대로 보다 효율적인 설득의 수단들과 정치적 전술들을 개발할 수 있어야 수용기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다만, 위와 같은 불리한 조건들 중 과거로부터 기인하는 의식적인 요소들은 앞으로 갈수록 약화되거나 소멸될 운명에 놓여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점, 개발주의 역시 현재 그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점, 경제의 고용창출능력이 약화되면서 국가의 고용에 대한 보장과 복지국가로의 전환에 대한 압력이 점점 강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사민주의의 전망은 밝다고 생각된다.

    4. 결론에 대신하여

    복지국가 경험이 없는 한국사회에서 복지국가로 가기 위한 도정에서 사민주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유럽의 모델과 정책을 알리고 계몽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작더라도 대중들이 보편적 복지에 관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드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최근 지방선거를 둘러싸고 중학교까지 무상급식을 하자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과거 김대중 정부시절 도입된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가족복지에 의존해온 틀에서 벗어나 최초로 국가복지의 개념을 대중들에게 심어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한국의 사민주의자들이 교육기회의 보장, 실업과 직업훈련에 대한 국가적 책임, 노동시장의 임금격차 완화와 노동력의 탈상품화 추진 등과 같은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한국적인 사민주의적 대안을 마련해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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