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뿔뿔이 흩어진 유학파 3최씨
        2010년 02월 23일 04:4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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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데없는 ‘강도론’

    난세라 한다. 사전에 보면, 난세란 전쟁이나 어지러운 정치 따위로 어지러워 살기 힘든 세상이라 설명한다. 전쟁이 일어난 상황이 아니니, 어지러운 정치가 난세의 원인이다. 어지러운 정치의 원인은 권력집단에 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국민들이 살기 어려워진다.

    난데없이 ‘강도론’이 등장한다. 대통령이란 사람이 자신의 반대파를 두고 ‘강도’라 말한다. 한 마디로 어불성설이다. 강도는 무기를 가지고 있는 자이다.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 인식의 문제요, ‘철학이 없음’을 드러낸다. 아니, 그런 인식이 ‘국정 철학’이라면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강도’라고 표현하는 대담함에서, 그의 ‘국정 철학’에 숨겨진 서늘한 칼을 보게 된다.

    같은 집안이 다른 식구가 반격에 나섰다. "집안 사람이 갑자기 강도로 돌변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이것은 맞는 말이다. 지배집단의 전횡에 빗대 ‘날강도’라고 하지 않는가. 실제로도 그들이 해온 건 ‘날치기’ 아닌가.

    국민은 무시당한다.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생명권이 내팽개쳐졌다. 수백만의 시민들이 촛불을 켜고 밤새워 항의를 해도 미국산 쇠고기는 들어온다. 그것의 문제점을 취재, 보도하였다 하여 조사받고 재판받아야 한다. 법에 따라 그 재판을 진행하고 무죄판결을 내린 판사는 ‘천인공노할 죄인’ 취급을 당한다.

    서민, 노동자의 삶은 막막하다. 강제철거가 부당하다며 항의하는 주민들에게 경찰 특수부대가 들이닥친다. 5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희생되었음에도 1년 가까이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게 방치해버린다.

    "먹고 살 수는 있게 해달라"고 파업하고 농성하고 단식까지 하는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건 차디찬 감옥일 뿐이다. 최악의 실업사태와 비정규직의 급속한 증가로 하루하루의 삶이 위태로운데, 대통령이란 사람은 딸, 손녀까지 데리고 해외여행을 다닌다.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좌파’란다. 무조건 몰아낸다. 방송사 사장도, 아나운서도, 심지어 연예인까지도 몰아내 버린다. 학교 교사, 기자, 교육감, 정치인 등 마구잡이로 법정에 서야 한다. 걸면 걸린다. 이게 ‘법치’란다.

    해외로! 해외로!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러 진골들 사이에 권력다툼이 극심해졌다. 왕위를 빼앗기 위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여기에 귀족들의 사치는 극에 달했고, 백성들은 가혹한 수탈을 당했다. 백성들이 참다못해 봉기를 일으키고, 기회를 엿보던 지방 호족들이 독립을 선언하며 나라를 세웠다.

       
      ▲ 최치원 영정사진

    이리하여 통일신라, 고려, 후백제가 겨루는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다시 기나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시대에 3최씨라 불리는 최치원, 최언위, 최승우가 있었다. 그들은 이 난세를 어떻게 살아갔을까.

    신라는 엄격한 신분 사회였다.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3두품. 이를 골품제라 한다. 신분에 따라 맡을 수 있는 직책, 결혼, 집의 규모 등이 정해져 있었다. 왕은 처음에는 성골에서 나왔다. 그런데 성골의 숫자가 줄고 줄어 선덕여왕,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성골의 시대는 끝난다.

    김춘추가 왕에 오르면서부터 진골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삼국통일을 이룬 후 한동안 평화로운 시기가 왔지만, 곧 진골 사이에 권력투쟁이 본격화하면서 사회는 극도로 혼란해지기 시작하였다.

    6두품은 진골과 함께 귀족층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신분적 제약을 크게 받았다. 17개의 관등 중 6두품은 제6관등까지만 오를 수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차관급인데 결코 낮은 것은 아니었지만, 신분적 차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6두품을 ‘득난’이라고도 하는데 주요 직책을 얻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6두품의 사람들은 대부분 유교를 공부하였다. 불교는 의상 대사의 ‘일즉일체다즉일’의 기치 아래 왕실 이데올로기를 담당하여, 진골이 불교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6두품은 그곳에서도 찬밥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교를 공부하였다. 공부의 목적은 관직을 얻어 일신의 영달을 꾀하자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강수, 설총 등이다.

    유교는 삼국 시대에 통치 이념은 아니었다. 통치 이념은 불교였다. 유교 학습은 당시 유일한 문자인 한자를 깨치는 수단에 불과하였다. 6두품들은 배운 한 자락으로 관직을 얻을 수는 있었다. 그들이 주로 담당한 일은 왕의 문서수발이나 행정실무를 담당이었다. 통일신라 말에 이르자 6두품의 설 자리는 좁아졌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 6두품은 미약하나마 쥐고 있던 정치적 영향력을 점점 더 상실해갔다.

    그래서 그들이 택한 게 당나라 유학이었다. 유학 가서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귀국하여 국내에서 좋은 자리를 얻자는 계산이었다. 당시 당나라는 외국인이라도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낮은 관직이라도 주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당나라 행 선박에 몸을 실었던 사람들 중에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등 3최씨가 있었다.

    3최씨가 선택한 길

    최치원(857년~?)은 12살에 당나라로 들어간다. 6년만인 18살에 과거 급제를 한다. 22살 때, 그는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벌대장인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을 지었다. 이 글은 그를 당나라에서도 알아주는 문장가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28살 때 귀국한다.

    최언위(868~944)는 17살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한다. 그리고 41살 때 귀국한다.

    최승우(?~936)는 890년(진성여왕 4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불과 3년 만인 893년 과거시험에 합격한다. 뛰어난 실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901년 전후 귀국한다.

    3최씨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귀국할 당시, 국내 상황은 그들이 유학을 떠나던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악화되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궁예가 태봉이라는 나라를 세워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옛 백제 땅에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워 신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3최씨는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다.

       
      ▲ 궁예(왼쪽)와 견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국내에서도 승승장구하였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직책인 아찬에까지 올랐다. 시무책 10여조를 작성하여 진성여왕에게 상소하였다. 그 내용은 남아 있지 않은데, 대단한 내용이 들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만약 전면적 개혁을 내세웠다면 당시 정치 분위기상 그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영달을 누리다 돌연 가야산으로 숨어 버린다. 난세의 현실을 피해 도피해 버린 것이다.

    최승우는 귀국 후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잡지 못한다. 그는 발길을 돌려 후백제의 견훤에게로 갔다. 신라를 뒤집어엎는 길로 나선 것이다.

    최언위는 귀국 후 재능을 인정받아 관리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곧 생각을 바꾸었다. 신라에는 비전이 없다고 생각하여 왕건에게로 갔다. 그 역시 최승우와 마찬가지로 현실 변혁의 길로 나아갔다.

    최승우와 최언위가 다른 나라를 선택한 데에는 현실 인식이 반영되어 있으리라. 최승우는 후백제가 최종 승자가 될 것이라 보았다. 당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최언위는 후백제를 군사력에만 의존하는 광폭한 집단이라 보았다. 그는 왕건에게서 ‘덕치의 냄새’를 맡았다. 즉, 왕건이 유교적 이상에 보다 가까운 군자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왕건과 견훤의 싸움은 중국의 유방과 항우의 싸움처럼 결국 왕건의 승리로 끝나리라 보았다.

    행동으로 읽어보는 철학

    3최씨의 철학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 그들은 유학을 공부했고, 유학에 대한 기본 소양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당시 난세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남겨 놓은 저서는 거의 없다. 많은 글들을 남겼다고 하나 실제 전해오는 것은 최치원의 『계원필경』과 한시 몇 편 정도이다. 이런 작품들과 행적을 통해 그들의 철학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을 뿐이다.

    최치원은 본시 인정을 받아 영달하고자 공부를 한 사람이다. 그는 『계원필경』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열두 살 때 중국으로 갈 때,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네가 십 년 공부하여 진사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말아라. 나도 아들 두었다고 하지 않겠다. 그곳에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을 다 하여라"고 말씀하셨으므로,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 머리를 묶고 다리를 찌르는 노력을 하며 아버님의 말씀을 받들고자 하였다. 다른 사람이 백을 하면 천을 하는 노력으로 중국에 들어간 지 6년 만에 과거 급제를 하게 되었다.

    자신이 공부를 한 목적과 과거 급제의 사실을 자랑스럽게 서술하고 있다. 최치원은 탁월한 재능을 가졌기에 중국 당나라에까지 필명을 떨쳤고, 자신의 뜻대로 신라로 돌아와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최치원이 신라의 화랑인 난랑을 위해 지었다는 비석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고 한다. 이 풍류 사상은 유교와 불교와 도교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시켰다. 가정에서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과 같으며, 모든 일을 순리에 따라 묵묵히 실행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고, 악한 행동을 아니 하고 착한 행실만을 신봉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같다.

    유교는 불교와 도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의 글에서는 전혀 그런 비판을 엿볼 수 없다. 자신이 공부한 유교의 철학조차도 제대로 수립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영달을 누리다 현실 도피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심경을 드러내는 『추야우중』이란 시가 있다. 끝 두 구절만 인용해보자. 

    창 밖에는 한밤중에 비가 오는데 / 등불 앞에서 만 리의 마음 일어난다

    바깥세상은 난세인데 방 안에 들어앉아 갖가지 생각만 한다는 얘기이다. 세상에 대한 고민도, 그것을 헤쳐 나갈 철학도 없어 그저 고고한 척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대견훤기고려왕서』가 남아 있다. 견훤이 왕건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당시 견훤 주변의 인물들을 고려해 볼 때, 최승우가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 편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승부는 알 만하지 않은가. 평양 누각에 활을 걸고 폐수의 물을 말이 마시게 하겠다고 기약하노라.

    자신들이 이길 것이라는 자신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현실을 뒤집어엎겠다고 나섰으나 어떤 국가를 만들겠다는 내용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게 후백제의 실상이었다. 군사력만 내세우던 견훤의 후백제는 멸망하고 만다.

    최승우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신은 최언위가 작성하였다. 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 

    요즈음 삼한이 액운을 만나 구토가 흉년이 들고 황폐해져 많은 백성이 도적의 무리에 들어갔으며, 밭이나 들이 모두 적토가 되었도다. 풍진의 소리를 거의 멈추고 나라의 재난을 구하고자 하는 바 있어, 선린이 관계를 맺어 과연 수천 리 땅에서 농사짓고 길쌈하는 백성이 업을 즐기고 칠팔 년 동안 사졸이 한가하게 잠을 잤다.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드러난다. 민본을 내세우는 유교 정치철학의 일단을 볼 수 있다. 현실을 변혁하여 어떤 국가로 나아가고자 하는가 하는 방향이 보여진다. 왕건의 고려는 백성들의 지지를 확보하며,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신라의 항복을 받아내어 재통일을 이룬다.

    <훈요 10조>와 최언위

       
      ▲ 왕건

    최언위는 고려 건국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왕건의 아들인, 태자의 사부가 되었고 문필에 관한 업무를 도맡았다. 오랜 전쟁으로 군인들만이 가득한 시기에 최언위의 존재는 특별한 것이었다.

    왕건은 자손들에게 <훈요10조>를 남겼다. 여기에는 불교, 유교에서부터 민간신앙, 풍수도참설에 이르기까지 온갖 요소들이 짬뽕되어 있다. 왕건 주변의 인물들을 생각해 볼 때, 최언위의 정치철학이 왕건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론된다.

    『고려사』에 따르면, 왕건은 <훈요10조>를 남기는 배경을 설명하면서 중국의 요와 순을 거론한다. 요와 순은 유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 받드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후사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욕심을 부려 기강을 무너뜨릴까 염려"되어 <훈요10조>를 남긴다고 하였다. 이것 또한 유교적 색채가 짙게 배인 말이다.

    그리고 제7조에서 "왕은 신하와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백성들에게 함부로 세금을 걷지 말고, 그들을 함부로 군대에 동원하지 말라"고 덧붙인다. 그렇게 해야 "민심을 얻어 나라가 부유해지고 백성이 편안해 질 것"이라 하였다. 맹자가 말한 ‘왕도 정치’ 사상이다.

    이런 대목도 있다. 제4조에서 "우리나라가 중국 당나라의 풍속과 제도를 본받아 왔지만, 나라마다 사람마다 사정이 다르니 구차하게 당나라의 제도를 따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자주성의 천명이다.

    고려 시대에 지배적인 철학은 불교였다. 왕건은 제1조에서 불교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한다. 그러나 국가 운영 원리는 유교적 사상에 따랐다. 신라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는 사라졌다. 과거를 실시하여 유교 학자들을 대거 관직에 등용하였다. 최언위는 이러한 고려의 기틀을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최언위는 독창적인 자신의 철학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현실의 변혁을 이루고, 고려라는 국가를 유교 철학에 입각하여 운영할 수 있게 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만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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