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족 옷 벗고 민중과 함께 춤추다
        2010년 02월 16일 09: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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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시작하며

    언제부턴가 철학이란 말은 알게 모르게 친숙한 단어가 되었다. 정권을 쥔 집단들은 입만 열면 국정 철학을 말한다. 속 된 말로 좀 떴다하는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인생 철학을 듣게 된다. 정치인이 하는 말은 그것이 궤변이건 뭐건 그들의 정치 철학이란다. 어쭙잖은 얘기를 하면 개똥 철학이라고 핀잔을 듣는다. 신년이면 사주 보러 가는 곳은 철학관이다. 공부도 철학이 있어야 잘 한단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철학이 없다"며 비난한다.

    이래 저래 갖다 붙이는 철학이지만, ‘철학 하기’를 말하면 손사래를 친다. 철학자의 얘기는 딴 세상 사람의 얘기라며 머리를 흔든다. 더 노골적으로는 먹고 살기도 바쁜 판에 무슨 철학이냐는 얘기다.

    이런 재미없는(?) 철학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것도 한국 철학 이야기를. 한국 철학이 있냐고? 근대 이전에 지배적인 사상이었던 유교와 불교는 중국을 통해 수입한 것들이었다. 현대에 들어 밀려 들어 온 무슨 주의, 주장 역시 외국으로부터 수입품이다. 그런데 한국 고유의 철학이 있겠냐고!

    철학이란 단어 자체가 서양의 ‘philosophy’를 일본 학자가 ‘철학’이라 번역하여 수입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학(學)’ 또는 ‘학문(學問)’이라 하였다. 비록 수입품으로 시작했지만 자신의 현실을 치열하게 고민하며 이루어 온 우리나라 고유의 학문은 존재한다.

    고민의 결과물은 학문서뿐만 아니라 수필, 소설 등 문학작품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한국 철학이다. 그래서 한국 철학 이야기는 철학과 역사와 문학을 짬뽕하면서 다루어야 한다. 이 글을 이런 입장에서 써 나갈 것이다.

    국민과의 대화?

    ‘소통의 부재’를 말한다. 서로 말이 안 통한다는 얘기다. ‘서민 행보’를 하신다는 대통령께서 서민들을 만났다. 물가가 너무 올라서 살기가 힘들다며 주부가 말했다.
    "학원비가 너무 올라서 걱정이에요."
    대통령이 대답한다.
    "학원 안 보내면 되잖아!"

    대학생이 말했다.
    "대학등록금 너무 비싸요."
    대통령이 대답한다.
    "등록금이 싸면 대학의 질 떨어져!"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농산물 가격에 한탄하며 농민이 말했다.
    "폭락하는 쌀 값 대책 세워주십시오."
    대통령이 대답한다.
    "쌀 값 싸게 해서 소비를 늘려야지!"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오는 ‘썰렁 개그’가 아니다. 대통령이 이곳저곳을 다니시며 나눈 국민과의 대화이다. 대통령과 국민은 서로 말이 안 통한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거나, 아니면 서로 다른 공간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일방성’이 더 문제라고 한다. 학원비, 등록금, 쌀 값 걱정을 하는 사람들의 절절한 심정을 대통령이란 사람은 알기나 하는 걸까. 그들의 불안과 걱정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그저 자기 생각만 툭 던져 버린다.
    돌아서면 국민통합을 말한다.

    그러나 이렇듯 말이 안통하고, 자신의 생각만을 던져 버리는 속에서 국민통합이 되겠는가. 오로지 지배집단의 독선과 밀어붙이기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이원적이었다

       
      ▲ 원효대사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 진정 국민통합이 필요했던 시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져 소통과 통합을 위해 살다 간 철학자가 있었다. 귀족 신분을 벗어던지고 보통의 사람, 민중과 함께 춤추며 살다 간 철학자가 있었다. 원효 대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고구려 372년(소수림왕 2년), 백제 384년(침류왕 1년), 신라 528년(법흥왕 15년)이었다. 흔히 우리나라의 불교를 호국 불교라고 한다. 인도나 중국의 불교가 ‘통불교’, 즉 교리를 강조하는 데 비해 우리나라의 불교는 정치적인 성격이 강했다는 말이다.

    불교는 소수림왕, 침류왕, 법흥왕 등 왕들이 직접 나서서 들여왔다. 그 왕들의 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왕을 정점으로 하는 정치체제를 갖추게 된 시점이었다. 즉, 왕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를 도입했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처음 도입될 때부터 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교는 만민 평등사상을 가지고 있는 종교이다. 세상사람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설파하는 종교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불교는 이원화할 수밖에 없었다. 왕과 귀족에 봉사하는 지배층의 불교 그리고 민중의 불교.

    이 두 가지 불교 사상을 뚜렷하게 대변했던 인물이 의상(625-702)과 원효(617-686)이었다. 두 사람은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살았던 동시대인이다. 이 시대는 다툼의 시대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나라의 운명을 건 전쟁을 벌였다.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후, 신라는 당나라와 오랜 전쟁을 치렀다.

    삼국통일 후에도 고구려인, 백제인, 신라인 사이의 적대와 갈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귀족과 평민은 화합하지 못하였다. 사상적 지주인 불교는 여러 개의 종파가 난립하면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 시대의 최대 화두는 당연 ‘통합’이었다.

    의상과 원효는 모두 귀족 출신이다. 의상은 진골이고 원효는 6두품이었다. 비록 그 시대에 진골과 6두품 사이에 신분 차별이 있기는 하였지만, 모두 귀족층이었다. 여러 가지 문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상과 원효는 살아간 삶의 자취와 사상에서 달랐다. 두 사람은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도중에 원효는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한다. 그 유명한 해골의 물을 마신 사건이다. 요샛말로 의상은 유학파요 원효는 국내파이다.

    두 사람이 지향했던 불교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 굴 안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재계한  지 7일 만에, 깔고 앉은 자리를 새벽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의 시종들이 동굴 안으로 인도해 들어갔다. 공중을 향해 예를 올렸더니, 물에서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내주었다. 의상이 이를 받아 가지고 나왔다……

    그 후에 원효가 이곳에 와서 예를 올리려고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에 이르자, 논에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법사가 장난삼아 그 벼를 달라고 하자, 여인도 벼가 영글지 않았다고 장난조로 대답하였다. 또 가다가 다리 아래에 도착하니 한 여인이 월경 개짐을 빨고 있었다. 원효가 물을 달라고 하니,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주었다. 원효는 그것을 엎질러 버리고 새로 물을 떠서 마셨다.

    원효와 의상은 같은 곳을 방문하였다. 지금의 낙산사이다. 그리고 방문한 목적도 같다.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만나게 되는 대상과 방식이 다르다. 의상은 용천팔부의 시종의 안내를 받았고, 공중에다 예를 올렸다. 관음보살은 아득히 저 먼 곳에 있어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반면 원효는 여인을 만났다. 벼 베기도 하고 빨래도 하는 평범한 여인이었다. 그 여인과 농담도 주고받았다. 그 여인이 바로 관음보살이었지만 원효는 알아보지 못했다.

    이 이야기가 전해주는 메시지는 명쾌하다. 의상이 말하는 관음보살은 저 멀리 아득한 곳에 있다. 반면 원효가 말하는 관음보살은 바로 우리 주변에 있다. 의상의 불교는 백성과 멀리 떨어져 있고, 원효의 불교는 백성 속에 있다.

    짐이 곧 국가다

       
      ▲ 의상대사

    의상이 주장하는 핵심 사상은 ‘일즉일체다즉일’이다. ‘하나가 모든 것이요, 많음이 곧 하나이다’라는 말이다.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표현했다. 그런데 이 사상을 당대의 정치 질서 속에 가져다 놓으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된다.

    하나는 왕이다. 그러므로 왕은 모든 것이다. 많음은 백성이다. 백성은 하나, 즉 왕으로 일체가 된다. 결국 왕 중심의 정치 질서를 옹호하는 논리가 된다. 그 철학의 정치적 의미가 이러하니, 왕실에서 적극 보호하고 권장하게 되었을 터, 의상의 철학은 통일신라 시대의 지배적 사상이 되었다.

    의상의 불교 사상을 잘 드러내 주는 시 한 편을 보자. 월명사가 지었다는 <제망매가>이다. 죽은 누이를 애절하게 그리워하는 이 시는 결론부에 이르러 ‘아아, 미타찰에 만날 나 / 도 닦아 기다리노라’ 하며 끝을 맺는다. 죽은 누이를 극락세계에서 만나기 위해 열심히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다는 얘기다.

    불교의 천국인, 극락세계에 가려면 도를 닦아야 한다. 그런데 도 닦는 게 쉬운 일인가. 우선 시간 여유가 있어야 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먹고 살기에 바빠 도 닦을 시간이 없다. 여유 있는 사람, 아예 머리 깎고 중이 된 사람만이 도를 닦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란 귀족층 밖에 없지 않은가. 실제로 당시 스님의 대부분은 귀족 출신이었다. 의상의 불교는 귀족불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흔히 하는 농담. "있는 게 없는 것이고, 없는 게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불교 사상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란다. 이 세상 만물이 하나라는 얘기이다. 의상의 불교 사상 역시 이런 철학에 입각해있다. 왕, 귀족과 평민은 하나이다. 그 사이에 어떠한 갈등도 존재할 수 없다. 왕 중심의 정치질서를 철저하게 옹호하는 철학이 된다.

    백성과 더불어

    원효는 이런 사고방식을 배격한다. 있는 건 있는 것이고, 없는 건 없는 것이다. 유명한 성철 스님 말마따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어찌 산과 물이 하나일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원효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있는 것은 없어지고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가 생겨난다. 즉, 있음도 부정되고 없음도 부정된다. 있음과 없음은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함께 부정된다. 역설의 논리이다.

    원효의 철학을 ‘화쟁 사상’이라 한다. 화는 화합을, 쟁은 다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원효의 철학은 ‘갈등과 조화의 철학’이다. 만물은 하나라는 사상이 현실 세계의 모순과 갈등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원효의 철학은 그것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귀족과 평민은 대립관계이다. 따라서 갈등이 일어난다. 또한 그 관계 속에 조화도 있다. 즉, 원효는 갈등과 조화가 공존하고 있음을 말한다. 갈등을 통해서도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조화를 통해서도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원효는 있음과 없음, 하나와 둘, 귀한 것과 속된 것, 중심과 주변 등 네 가지를 들어 자신의 철학을 설명했다. 그는 어느 한쪽을 우월하게 생각하는 데서 다툼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치우침에 대한 경계이다.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데 장애가 되는 편견은 무엇이든지 배제해야 한다. 거기에 진리의 길이 있다.

    원효는 자신의 울타리에 매몰되지 말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그것을 벗어난 허황한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진리를 추구하라는 얘기이다. 도를 닦기 위해 시간을 내고 절에 가고 하는 게 아니라, 일상적 삶 속에서 깨우침을 얻으라는 말이다. 민중불교의 진수이다.

    원효는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였다. 그는 귀족적 편견에서 벗어났다. 귀족 신분을 내팽개치고 승복을 벗어던지고 백성들 속으로 들어갔다.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어 박춤을 추며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그렇듯 평민과 어울려 살면서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였다. <삼국유사>는 원효의 업적을 이렇게 평가한다.

    "가난하고 무지한 무리까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된 데에는 원효의 교화가 컸다."

    그러나 귀족층은 원효를 배척하였다. 100명의 스님을 뽑는 데에도 원효를 제외할 정도였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원효의 삶과 사상은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 원효는 협소한 생각과 편견 그리고 자신의 신분까지도 벗어던지고 민중과 함께 하고자 했던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가 추구하고자 한 것은 ‘소통과 통합’이었고, 그것을 ‘갈등과 조화의 통일’로 표현하였다.

    필자 소개

    홍승기는 오랫동안 비정규직도 못되는 ‘부정규직’으로 살아오면서, 세상 잡사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공부하던 중, 느지막하게 한국 철학을 우연히 접하고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어줍잖은 실력으로 감히 ‘한국의 철학자들’을 쓰게 되었다.

    1980년대의 대학생 교양서였던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거름)]을 공저했고, [레닌 저작선(거름)]을 번역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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