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이 하느님을 믿는 인간인가"
        2010년 02월 16일 09: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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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와 종교가 굴레가 되었을 때

    국가만큼 양면적 의미를 지닌 것도 드물다. 어떤 경우인지에 따라 자신을 보호해 주는 공동체의 이름이 되기도 하고, 법과 제도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며 의무와 억압을 강요하는 굴레가 되기도 한다. 개인 하나하나는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주체가 될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 통제와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객체로 대상이 된다.

    국민의 권력을 대리하는 위임체에서 시작된 국가는 이미 국민의 시민적ㆍ정치적 권리를 담당하는 최고 권력체가 되었다. 개별 개인들의 보호자가 된 지도 오래되었다. 현실의 세계가 국가로 이루어진 시스템 속에 있다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국가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 뿐만 아니라 처참할 정도로 빼앗기고 죽음을 당하기도 일쑤다. 국적을 잃거나 난민이 된다는 것은, 국가들의 연합체인 유엔의 권리헌장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개인 홀로 현실을 버텨야 함을 뜻한다.

    이 세계가 그런 만큼 영토를 두고 국가를 수립하는 일은 정당성을 지니게 되었고, 생존권 문제가 달려 있다는 점에서 절대적이기까지 했다. 특히 오랫동안 국가 없이 지낸 민족이나 피점령자 처지에 놓인 비(非)국민은 그래서 국가라는 것이 더 절절한 문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보와 생존의 문제는 국가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고 무너뜨려서도 의심해서도 안되는 성역으로 거듭나게 했다.

    이러한 국가에 종교가 결합된다면 국가의 지위는 더 없이 완고한 절대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종교와 함께하는 국가란 그 자체로 신성화되고 신화가 된다. 그런데 과연 이 종교국가라는 공동체는 ‘나’를 지키는 보호자일까, ‘나’를 억압하며 짐 지우는 굴레일까?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국가 만큼 민감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어디에서나 ‘국가’가 핵심으로 자리해 있었고 어느 곳에서나 국가를 상징하는 깃발이 이 아름다운 땅의 풍경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치 거기서 벗어나는 일이라곤 상상할 수도 없다는 듯이.

       
      ▲ 어느 곳에서나 국기가 보인다. 예루살렘 올드시티의 크리스천 지역인데도 유대인이 사는지 이스라엘 깃발이 곳곳에 있었다. (사진=염창근)

    그러나 바로 종교와 국가의 결합이라는 그 점에서 실존적 문제가 파생되고 존립을 무너뜨리는 시작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선 이스라엘이라는 종교국가의 모습은 극단적인 양면성을 내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폭력이라는 것의 속성이 그렇듯, 늘 상대를 가해하는 동시에 자기 파괴를 일으키기기 때문이다. 타자를 내치기 위해 만든 벽이 결국 자신을 갇히게 만들 듯이.

    민족의 신화라는 만들어진 역사, 그 위험한 유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여행에서 가장 큰 충격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통곡의 벽’이다. 거대 검문소나 고립장벽도 덜하지 않았지만 익히 들어왔던 터라 그 충격이 예상되었던 반면, ‘통곡의 벽’은 예상치 못했던 장엄함으로 치가 떨리는 경험이었다.

    ‘통곡의 벽’은 이스라엘인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벽이다. 예루살렘의 올드시티는 이슬람교 무함마드의 전설을 간직한 이슬람 3대 성지 중의 한 곳이고 8세기 초에 건설된 대표적인 모스크들이 있다. 이 모스크들이 서 있는 성전산의 일부에 ‘서쪽 벽(Western Wall)’이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이 벽을 고대 이스라엘의 왕국, 즉 기원전 10세기의 솔로몬왕의 궁전 터였다고 믿고 있다.

    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포함해 팔레스타인 전체를 점령했을 때 곧바로 진행된 작업이 이 서쪽 벽을 성지로 만드는 일이었다. 이 벽의 존재는 기억할 수 없는 시대에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존재를 실증하며 로마에 의해 무너지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확고하게 주장했다. 즉 서쪽 벽은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옛 터전이었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자신들이 추방당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중적으로 의미화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은 디아스포라의 민족사를 이 벽을 통해 드러내며 ‘통곡의 벽(The Wailing Wall)’이라고 불렀다.

    입구에서 엄격한 검문검색을 다시 거쳐 ‘통곡의 벽’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집단의식의 장엄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느 집단적 종교 의례를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옛 영광의 흔적이자 영광이 파괴된 흔적이라는 그 벽 앞에서 절절히 기도하는 이들은 자기 민족의 염원만을 담은 종이를 벽 틈새에 빼곡히 밀어 넣고 있었다.

    그 오랜 세월 노예로 유랑민으로 살아가며 고통받아온 이들이 오늘날 자신의 폭력적 가해는 정당화하고 ‘통곡의 벽’ 앞에서 스스로를 피해자화하는 모습이란, 과연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유대인 홀로코스트에서도 살아남았지만 끝내 자살을 택했던 프리모 레비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던 말이 떠올랐다. ‘이것이 인간인가.’

    등골이 오싹했다. ‘통곡의 벽’ 광장에는 끊임없이 유대인들이 찾아들었다. 검은 모자와 검은 정장에 토라를 든 유대인은 물론 평범해 보이는 남성과 여성이 키파를 쓰고 벽 앞으로 다가가 한참을 기도했다. 광장에는 이스라엘 아이들이 책가방을 메고 어깨동무를 한 채 유대민족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고, 군인들은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는 듯 곳곳에서 그 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 벽 앞에서 유대인들은 태어난 아이의 할례의식을 거행하고 매주 금요일마다 성인식을 진행한다. 자신들 머리 위에 항상 하느님이 있다고 믿는 유대인들이 무너진 자기네 성전을 다시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이 이처럼 수치심이 없어도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고 평화를 위해 침략을 일삼는 짓을 계속하는 권력자들이 있지만 내외부의 거센 비판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민족 전체가 수치심 없는 선명한 이중성을 그대로 드러내며 국가의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삼는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의 폭력과 겹쳐져 무서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빌며 평화와 사랑을 위해 기도하는 여느 종교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 유대인 민족의 신화가 담긴 벽, ‘통곡의 벽’. 이 벽 앞에서 절절히 기도하는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의 염원만을 담은 종이를 벽 틈새에 빼곡히 밀어 넣고 있었다. (사진=염창근)

    그러나 이들이 민족의 역사라고 믿고 있는 것들은 신화다. 익히 알려진 대로 고대의 역사가 모두 만들어진 역사이듯 이스라엘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인들이 유대교 최고 성지라고 주장하는 ‘통곡의 벽’도 고고학적 발굴 결과 가장 밑단의 돌조차 단지 기원전 1세기경의 헤롯 왕 시대인 로마 시대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분명한 것은 이 벽에 대한 이스라엘의 해석은 67년 전쟁의 승리를 신성화하는 과정에서 널리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기록 문화가 거의 없었던 2천년 이전의 역사를 성경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구성하고 이를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 성경들조차 그 기술에 대한 논란이 사라지지 않는데 이를 기반으로 한 고대 국가의 역사를 만들어 내는 일은, 신화를 만들어 내는 일과 다르지 않다. 고대의 이야기란 애초부터 신화와 전설에 기대지 않고서는 구성되기 어렵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야 진실성 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고 또한 그 이야기들을 민족의 역사라고 믿을 것도 아니다.

    문제는 신화를 신화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사실로 믿게 하는 데에 있다. 종교국가의 문제점이란 바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를 등에 업기 때문에 파생된다. 민족의 신화를 사실처럼 만드는 일은 다분히 그 맥락에 어떤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봐야 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것이 민족을 피해자화하고 고유한 특성으로 삼으며 나아가 이를 빌미로 오늘날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끝내야 할 판타지일 뿐이다.

    유대국가, 폭력을 재생산하는 기구가 될 뿐

    중요한 것은 성경들에 담긴 이야기들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일이 아니라 이야기에 담긴 맥락을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성경들에서 이야기하는 고대의 역사에 담긴 뜻은, 이스라엘 왕국이 부패가 만연했고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고 핍박했기 때문에 민중과 괴리된 이스라엘의 멸망과 추방이 일어났다는 교훈이 아닐까. 이는 예수를 비롯해 여러 예언자들의 이야기에 나오는 공통된 부분이며 그래서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역사의 흐름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유대인의 모습은 과거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아무리 ‘통곡의 벽’ 앞에서 민족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통곡한다 하더라도, 아무리 약속의 땅이니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믿는다 하더라도, 그때와 똑같다면 하느님은 이들을 인정할 리 없으며 선택할 리는 더 만무하다. 구원을 희망했으나 자유가 아닌 굴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오랜 세월 동안의 유대인들의 슬픔과 고난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쫓겨나고 나치에게 가혹하게 희생당한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다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고 쫓아내고 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이란 원래 이런 것이라고 체념해야 하는가. 피해를 받은 보상으로 가해가 존중될 수도 있는가. 하느님을 믿는 자들이라면 신 앞에 겸허함으로 인간으로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아픔을 공유하고 공존의 연대를 모색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겸허함을 잃었을 때 인간이 무슨 일을 벌일지는 이미 너무 많이 경험해 보지 않았나. 

       
      ▲ 홀로코스트의 잘못을 잊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홀로코스트를 자행하는 일을 과연 하느님은 인정할까?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유대인 홀로코스트에서도 살아남았지만 끝내 자살을 택했던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고뇌한 바 있었다.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표지=창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건국을 선언하면서부터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고 이스라엘은 유대국가라고 외쳐왔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수많은 유엔 결의들과 평화협정들과 평화 프로세스가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은 유대국가를 포기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란 무슨 의미인가?

    유대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극단적인 종교주의이자 인종주의이며 민족적 차별이 내재한 개념인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이런 배제의 고통을 수없이 겪었음에도 배제하는 자의 입장에 서 있는 정당들에게 계속 정권을 맡겼다. 이스라엘 평화단체 ‘피스나우’가 지적했듯, 평화협정이 준비되던 때에 오히려 이스라엘 점령촌 건설은 더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왔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민주주의 유대국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국가를 세우고 민주주의를 덧씌운다고 해서 사회가 민주적으로 변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와 각종 자유를 권리로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유대교-유대인 우선주의 국가에서 차별은 내재된다. 국교가 기독교인 유럽 국가들에서 유대인들이 박해받고 제약받아 인간답게 살 수 없었듯, 국교가 유대교인 나라에서 비유대교인과 비유대인이 민주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미 이스라엘 지역에 살고 있는 무슬림이나 아랍인들은 납세의 의무를 모두 감당하면서도 필요한 권리는 보장받고 있지 못하다. 또한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은 자신의 생각을 비밀에 부쳐야 한다. 반면 랍비가 되어 토라를 읽고 율법대로 살기만 하면 국가가 생계에 필요한 전부를 제공한다. 점령촌과 키부츠에 살기로 하면 세금을 면제받고 지원금을 받는다.
    오히려 사실은 유대인끼리의 민주주의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땅에서 비유대인을 배제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미 그 땅에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세 종교의 최고 성지가 몰려 있고 각각의 교인들이 어울려 살고 있고 그 외 다른 여러 종교들도 섞여 있다. 설령 이들을 모두를 무시하고 유대국가를 완성한다고 하더라도 내부의 국민은 이를 한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렇게 하고도 과연 하느님을 믿으며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 그래서 유대민족이 번성한다고 치자. 그러면 홀로코스트의 잘못을 잊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홀로코스트를 자행하는 일을 과연 하느님은 인정할까? 아무리 종교적ㆍ민족적 신념이 있다지만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렇게 살고 싶은 걸까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 예루살렘이 한눈에 보이는 올리브산(감람산)에는 유대인들의 무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예수의 일화가 많이 담긴 이 산은 예수가 끌려가기 직전에 기도했던 곳이기도 하고 부활 후 승천했다고 하는 곳이기도 하다. 올리브산의 절반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의 무덤으로 하얗게 덮어져 있다. (사진=염창근)

    이미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 이스라엘은 안보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지만 자신만을 위한 몰이, 추방, 배제, 폭력을 낳고 있고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를 우려하며 반대하고 있다. 폭력은 다시 되돌아오고, 팔레스타인을 지키려는 운동을 더 견고하게 할 것이며, 세계인의 반대도 더 커져만 간다.

    오랜 세월 디아스포라로서, 그리고 홀로코스트를 당한 경험으로 그들에게 고통, 분노, 공포 같은 것이 몸과 마음에 유전자로 각인되어 있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으로 이겨내려 하는 점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고통, 분노, 공포를 다스리지 못하고 그대로 매몰된다면 폭력의 악순환밖에 남지 않는다는 점은 자명하다.

    이스라엘 건국 운동과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 운동이 일어날 때 이를 반대했던 유대인들이 있었다. 팔레스타인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을 쫒아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홀로코스트가 무엇인지 겪었던 이들은 ‘앞으로 영원히 국가 없이 디아스포라로 살아가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또한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에도 이주하길 거부하고 이스라엘 정책을 비판하는 유대인들이 늘 있어 왔다. 이 땅을 다니는 내내 이들의 생각들이 가슴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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