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중정당 집권전략의 덫
        2010년 02월 09일 09:5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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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는 최근 노동계급의 시각에서 브라질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와 룰라 정부의 경험을 분석하고 평가한 책 『브라질에서 진보의 길을 묻는다』(후마니타스)를 펴냈다.

    저자는 룰라 정부의 경험이 보여준 것은, 노동계급이 노동계급 정당을 건설하여 정치세력화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노동계급의 이익 실현이 담보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또 노동계급 이익의 두 축을 구성하는, 물질적 이해관계 중심의 당면 계급 이익과 생산체제 변혁을 지향하는 근본 계급 이익이 서로 갈등하는 모순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양자를 동시에 실현하는 것은 어렵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따라서 노동계급의 정치 세력화가 당면 계급 이익을 중심으로 추진된다면, 집권하더라도 근본 계급 이익의 실천이 실종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집권 전략의 덫’이라고 말한다.

    그는 최근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룰라가 집권했다고 열광하고, 변혁적 정책 펴지 않는다고 냉소하고, 쉽게 잊는 냄비 같은 반응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브라질만큼 노동자 정치세력화 하기도 어려운 조건인데,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집권 이전에 뭘 준비해야 하는지 브라질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라며 이 책 출간의 의미를 설명했다.

    <레디앙>은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이 책의 머리말과 4부 ‘평가와 함의’ 부분을 몇 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6. 브라질 노동계급의 경험: 쟁점과 함의

    브라질 노동계급의 경험은 노동계급의 계급 형성 및 정치 세력화와 그 성과로 탄생한 좌파 정권의 실천과 관련하여 다양한 쟁점들과 함의를 던져 준다. 여기에서는 브라질 노동계급의 경험으로부터 일반화가 가능한 쟁점과 함의들을 추출해 추상적 수준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1) 대중정당 집권 전략의 덫

    브라질 노동자당과 룰라는 집권을 위해 대중정당 전략을 채택하고 1994년 대선 패배 이후부터는 집권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노동자당이 지켜 온 정체성과 가치들이 주변화될 수 있게 했다. 2002년 대선 과정에서는 IMF와의 협약 준수 서약서에 서명했고, 국내외 자본들의 공세와 주식시장 및 통화의 극심한 불안정 상황을 맞이하여 브라질이 체결한 국제 협약들을 존중하고, 물가와 통화의 안정, 외채와 공공 부채 문제 해결에 대한 약속을 천명하기도 했다.

       
      ▲ 룰라 정부 각료 회의 

    노동자당과 룰라의 집권 전략에 따른 일련의 조치들과 약속들은 룰라의 대통령 취임 이후 선택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들을 제약하는 덫으로 작용했다. 물론, 이러한 ‘집권 전략의 덫’ 효과는 브라질 노동자당이나 좌파 정권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대중정당에 일반화된 현상이다. 그것은 집권을 위한 공약들을 집권 후 파기할 경우 대중정당으로서 신뢰도를 상실하게 되어 국민적 지지를 유지‧동원하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노동자당과 룰라는 집권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최저임금 대폭 인상, 경작 가능 토지의 적극적 배분, 빈곤층에 대한 생계비 지원을 통한 생활수준 보장 등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폐해로 유발된 사회문제를 해소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채와 공공 부채를 삭감하고 물가 인상을 억제하고 화폐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대중주의적 사회정책과 긴축재정 통화주의 정책은 상호 모순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지만,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었다. 전자를 포기할 경우 까르도주 정부와 다를 것 없는 신자유주의 정부가 되는 것이고 후자를 포기할 경우 정치경제적 불안정을 수반하는 1930~40년대의 대중주의 정부를 재현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딜레마는 ‘재정적 위기’의 딜레마로서 선진 자본주의 복지국가들에 일반화된 현상이기도 하다. 시민들의 복지 증대 요구에 부응하여 사회적 지출을 증대하면 재정 적자가 커지게 되고, 국가 재원 확대를 위해 조세수입을 증대하고자 하면 시민들의 불만이나 자본축적에 대한 제약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복지국가들은 만성적 재정 적자에 빠지거나 복지 지출을 삭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복지국가의 딜레마는 정당성 과제와 축적 과제의 모순이라는 자본제 국가에 내재된 보편적 딜레마의 한 표현에 불과하다.

    재정위기와 복지국가의 딜레마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는 시민들의 지지를 확보하여 권력을 창출하고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대중적 요구들에 부응하는 정책들을 집행해야 하는 정당성의 과제를 지니는 한편, 공공 재원을 확보하고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윤 창출과 자본축적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해야 한다는 축적 과제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자본제 국가에 일반화된 정당성 과제와 축적 과제의 모순이 복지국가의 경우 사회적 지출과 재정 안정의 딜레마로 표현된 것이며, 룰라 정부의 경우 그러한 자본제 국가 일반의 모순과 복지국가의 딜레마가 중첩적으로 발현된 것에 불과하다. 룰라 정부의 경우 대중정당화와 그에 기초한 집권 전략으로 인해 그러한 모순과 딜레마들이 선거 공약 형태로 확정되면서 집권 이후 정책적 제약의 덫으로 작동하게 된 것이다.

    좌파 정권의 경우 자본제 국가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모순과 딜레마들의 제약이 더 극대화된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은 노동자당과 룰라 정부의 경험에서 확인될 수 있다. 좌파 정당의 집권 기회는 우파 정부에 의해 사회구조적 문제점들이 크게 악화되고 우파적 대안들이 모두 고갈된 뒤에 주어지는 것이다.

    시민들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안정의 유지를 희망하고 있으며, 시스템의 안정적 조정이 불가능할 때 비로소 변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좌파적 대안들에 기회를 주는 것이다. 따라서 룰라 정부가 출범할 때의 경제사회적 여건은 외환 보유고 대비 외채의 규모, 공공 부채와 재정 적자 누적, 무역수지 악화와 산업 기반 훼손과 같은 열악한 상태에 있었으며, 열악한 구조적 조건은 시민들로 하여금 노동자당과 룰라를 선택하게 한 원인이 된 동시에 룰라 정부의 정책적 대안들을 크게 제약했다.

    결국, 룰라 정부는 집권 전략에 기초한 시민들과의 약속 및 열악한 구조적 조건으로 인해 정책적 대안을 선택함에 있어 극히 제한된 수준의 자율성밖에 지니지 못했으며, 그 과정에서 변혁적 정책들이 이중적으로 배제 압박을 받았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노동자당과 룰라에게 집권 프로젝트만 있었고 사회 프로젝트 즉 통치 프로젝트는 없었다는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당과 룰라 정부를 평가함에 있어, 자본제 국가의 모순과 함께 사회‧통치 프로젝트에 대한 집권 프로젝트의 제약이 가져온 결과라고 설명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자본제 국가 일반의 정당성 과제와 축적 과제의 모순 및 복지국가의 딜레마는 피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들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실천적 여지도 있음을 브라질의 경험은 보여 주고 있다. 즉, 수단은 목적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타당하듯이 집권 프로젝트는 사회‧통치 프로젝트에 기초하여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노동자당과 룰라 정부의 경험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2) 노동계급 이익 갈등과 변혁의 실종

    노동계급이 노동계급 정당을 건설하여 노동계급 정치 세력화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노동계급의 이익 실현이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 이익의 두 축을 구성하는 당면 계급 이익과 근본 계급 이익은 서로 대립‧갈등하는 모순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동시에 실현하기 어렵다. 이런 노동계급의 이익 유형들 사이의 갈등 속에서 노동계급 정치 세력화가 당면 계급 이익을 중심으로 추진된다면, 집권하더라도 근본 계급 이익의 실천이 실종될 수 있는 것이다.

       
      ▲ 브라질 룰라 대통령

    노동자당과 룰라의 대선 승리와 높은 지지율은 노동계급의 근본 계급 이익에 대한 동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당면 계급 이익과 시민들의 물질적 이해관계 및 사회적 요구들 사이의 수렴을 나타낸다. 그것은 노동자당의 집권 전략과 룰라의 선거공약으로 구체화되었다.

     룰라 정부는 빈곤 퇴치와 소득 재분배를 위한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집행했지만 은행 및 사유화 기업들에 대한 국유화는 추진하지 않았다. 이러한 당면 계급 이익의 적극적 추진과 근본 계급 이익의 포기 행위는 대중적 요구와 선거공약에 따라 정책을 집행하는 것인 동시에 노동계급과 그 대행 조직들의 선택 또한 반영하는 것이다.

    노동계급 이익들 사이의 모순 관계 속에서 CUT와 노동자당의 다수파는 모두 당면 계급 이익을 선택했다. 이러한 선택은 브라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절대 다수의 노동계급 대행 조직들에서 발견된다.

    노동계급 정당은 집권을 위해 대중정당화하며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집권 전략을 수립하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여타 계급들을 포괄하는 계급 연합 전략을 추구하게 되고, 시민들의 최대 관심사들을 중심으로 선거공약을 조직하게 된다. 그렇게 집권한 다음 선거공약들을 중심으로 정책들을 수립하여 집행하게 되는데, 룰라 정부의 경우 고용‧빈곤‧치안 같은 사회적 문제들이 핵심을 구성했으며 은행과 사유화 기업 국유화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노동조합 또한 노동자들의 물질적 이해관계에 호응하게 되며 근본 계급 이익 대신 당면 계급 이익을 우선시하게 된다. 이것이 노동조합의 경제주의(union economism)이며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자들에 의해 꾸준히 지적되어 온 문제이다. 노동조합이 경제주의에 매몰되는 것을 벗어나서 근본 계급 이익에 헌신할 수 있게 되는 가능성으로는 두 가지가 지적되고 있다.

    첫째, 노동자들의 당면 계급 이익에 대한 헌신은 자연발생적 현상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에 호응해야 하는 노동조합들은 경제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노동조합 경제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정당의 인위적 개입이 요구된다는 것이 레닌과 루카치 같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입장이다.

    둘째, 네오마르크스주의 현금 고리 이론(cash nexus theory)에 따르면, 당면 계급 이익과 근본 계급 이익은 수렴할 수 있다. 그러한 수렴 현상은 예외적으로 경제 위기 상황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근본 계급 이익의 실현 없이는 당면 계급 이익을 증진시킬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근본 계급 이익을 수용하여 변혁적 실천에 헌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브라질의 경우 이런 두 가지 메커니즘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노동자당은 이념적 전위 정당이 아니라 대중정당으로서 CUT의 이념적 흐름들의 분포와 유사한 구성을 지니고 있어 CUT에 인위적으로 개입해 근본 계급 이익을 확산시킬 위치에 있지 않았다.

    또한, 경제 위기 시기라고 해도 당면 계급 이익과 근본 계급 이익 사이의 수렴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실천의 성과로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1990년대 말 경제 위기 이후 2002년 대선에서 브라질 시민들은 노동자당과 룰라를 선택했으나, 이는 근본 계급 이익을 통한 당면 계급 이익의 실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근본 계급 이익의 개입 위험에도 불구하고 당면 계급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한 차선의 대안이었다.

    2002년 6월 20일 ‘검은 목요일’ 주식시장이 붕괴되고 브라질 화폐가치가 폭락하는 가운데 노동자당과 룰라는 근본 계급 이익에 대한 헌신을 선언하지 않고 물가와 통화의 안정을 포함한 당면 계급 이익에 대한 보장을 선언했다. 노동계급 정당이 경제 위기에 직면하여 경제 위기 담론을 발전시켜 변혁을 수용하도록 압박하기보다 위기의 심화를 부정하며 경제 사회적 안정과 현상 유지를 보장한 것이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도 계급정당이 근본 계급 이익과 사회변혁을 위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개입을 실시하지 않는다면 당면 계급 이익과 근본 계급 이익의 수렴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덫에 걸린 정권, 그리고 CUT

    계급정당이 대중정당 집권 전략을 기획하여 집권을 성사시킨 점을 고려하면 대중정당 집권 전략의 덫에 걸린 좌파 정권을 구출하여 변혁적 정책들을 집행하도록 할 수 있는 주체는 노동운동이며, 브라질의 경우 CUT였다. 근본 계급 이익과 사회변혁을 위해 CUT에게 요구되었던 역할은 룰라 정부에 대해서는 변혁 정책의 집행을 압박하고 노동계급 구성원들에게는 근본 계급 이익에 대한 헌신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CUT는 두 가지 역할 가운데 하나도 실천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 CUT는 룰라 정부에 대해 변혁 정책의 수립‧집행을 압박할 역량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CUT는 노동자당을 통해 정권 창출에 기여했지만, 힘의 역학 관계는 이미 ‘룰라 정부>노동자당>CUT’로 역전되어 있었다. 변혁적 정책은 고사하고 연금제도 개혁과 같은 당면 계급 이익 관련 정책들의 수립 과정에서도 CUT의 입장은 관철되지 못하는 정도였다.

    둘째, CUT는 당면 계급 이익에 대한 노조원들의 헌신과 단위 노조의 경제주의에 개입하여 근본 계급 이익에 대한 헌신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할 수 없었다. CUT가 룰라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그러한 실천은 노조원들과 룰라 정부를 괴리시킬 뿐이기 때문이었다.

    당면 계급 이익 중심의 주체 형성에 비해 근본 계급 이익 중심의 주체 형성이 어렵다는 것은 브라질의 사례에서 잘 확인할 수 있었다. 당면 계급 이익은 구체적인 물적 자원의 문제로서 수혜자 중심의 방어동맹 형성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빈곤 퇴치 프로그램과 가족 지원 제도를 중심으로 하층 시민들의 지지가 조직화되어 노동자당과 룰라의 정권 재창출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는 스웨덴 등 서구 국가들에서 복지국가에 대한 공세에 맞선 복지 동맹의 형성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반면, 근본 계급 이익은 권력 자원의 문제로서 수혜자가 불분명하며, 노동자 대중의 자연발생적 요구에 노동조합이 호응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실천에 노동자 대중이 호응하는 것으로서 노동자 대중의 수동성과 소극성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체 형성의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근본 계급 이익에 헌신하는 노동계급 구성원들의 헌신성을 강화하고 그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생산관계 변혁의 계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은행들과 기간산업의 전면적 국유화 조치를 취할 수 없더라도 정부는 개별적 실험 공간들을 제공할 수 있으며, 룰라 정부가 농지개혁을 위해 추진했던 정책들을 원용할 수 있다.

    소유주가 재정적 위기 상황에서 경영을 포기하거나, 기업과 생산 설비가 유휴 상태로 방치되어 있거나, 소유주가 노동기본권을 유린하거나 부정부패 등 심각한 수준의 범법 행위를 저지른 경우에 한해 정부는 해당 기업과 생산 설비의 사적 소유권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생산관계의 변혁적 실천에 대한 참여를 통해 주관적 의미 부여 기준과 우선순위가 변화하고, 변혁과 연대의 문화를 구성원들이 공유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은 노동계급 구성원들의 변혁적 요구를 동원‧조직하여 제도성 게임과 전투성 게임을 병행하며 정부를 압박함으로써 노동계급 구성원들의 근본 계급 이익에 대한 헌신성을 강화하는 한편 정부로 하여금 변혁 정책을 확대‧집행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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