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과 공간을 잇는 사람들
        2010년 02월 08일 09:1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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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2월, 오랫동안 팔레스타인 문제를 한국 사회에 알리기 위해 글과 행동과 실천, 그리고 진심어린 우애를 바탕으로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라는 모임을 만들어 활동해 온 소설가 오수연과 함께 몇몇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을 다녀왔다.

    함께 한 이들은 오수연을 비롯해 소설가 김남일, 시인 김해자, 문화평론가 강영희, 영화감독 남선호, 평화활동가 염창근, 다큐멘터리 감독 성혜란,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회원 한아름, 그리고 영화칼럼니스트이자 <레디앙> 문화담당 객원기자인 이안. 모두 아홉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분쟁의 현장에 발을 디디고 이루어지는 삶과 문화를 보고 느꼈으며 그 경험을 <레디앙> 독자들과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나누고자 한다. 문인은 그곳의 문인들과 만나 억압이 있는 곳에서 언어와 문학이 가진 힘을 이야기했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그곳 영화 관계자로부터 영상을 통해 이을 수 있는 교류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모든 명분을 떠나 사람과 사람이 만났다. 서로 음식을 나누고, 정을 나누었다. 그런 만남과 대화가 특별하게 여겨지도록 만드는 것은 모든 만남과 대화를 가로막는 이스라엘의 철저한 ‘봉쇄’ 때문이다. 이 ‘봉쇄’는 어디서 비롯된 것이고, 어떻게 강화되고 있으며, 앞으로 무엇을 얻기 위해 지속되고 있는지 우리 모두 알아야한다.

    우리 일행의 경험이 ‘봉쇄’에 낸 틈이 지금은 비록 크지 않더라도 앞으로 거대한 균열을 일으키기를 바라며 방문단의 글들과 시편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잘라존,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다시 마을을 만들다

    잘라존은 라말라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난민촌. 이스라엘 초기에 팔레스타인 마을들이 통째로 파괴되면서 주민들 전체가 난민이 되었고 결국 유엔난민기구와 주변 팔레스타인 도시들의 협조로 이들이 머물기 시작한 난민캠프 중 하나였다.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모이면서 잘라존은 점점 마을이 되었고 지금은 1만 3천명의 난민이 모여 살고 있었다.

    잘라존으로 가기 위해서는 꼬불꼬불하고 좁고 낡아버린 길을 달려야 했다. 마치 도시에서 시골길을 가는 것처럼 풍경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러다 갑자기 길을 사이에 두고 오른편으로 높은 담장에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등장했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건물들이라도 있는 걸까 의아해 했지만 우리를 안내해 준 잘라존 출신의 아메르는 이곳이 이스라엘 점령촌이라고 알려줬다(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곳은 베트엘 점령촌이었다). 길의 왼편에는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 같이 낡고 낮은 건물들이 듬성듬성 있을 뿐이었다. 자동차로 지나가고 있는 그 길은 빈민촌와 부촌을 나누는 경계와 같았다.

       
      ▲ 잘라존의 아이들. 난민촌에서 태어난 이 아이들은 난민 3세가 되었다. 그러나 난민촌의 사람들은 활기와 용기로 넘쳐나 보였다 (사진=염창근)

    모든 팔레스타인 난민촌이 그렇지만 잘라존의 길은 매우 협소했고 차는 난민촌 입구에서 멈춰서야 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서니 마치 옛날 서울의 달동네처럼 낡고 낡은 건물들이 조밀하게 서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동양인 방문자를 신기하게 보면서 따라다녔다. 잘라존은 60년 된 난민촌이기에 이 아이들은 벌써 난민 3세인 셈이었다.

    난민촌이 고향이 된 아이들을 보면서 난민촌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과연 예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아이들의 부모와 조부모들은 여전히 고향의 집 열쇠를 품에 지니고 있지만 이미 그 집은 사라지고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늙어가는 사람들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사라질 것이고 아이들은 노인들의 과거를 만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난민촌에서 만난 생동하는 희망

    그러나 잘라존은 터전을 잃은 사람들을 다시 이웃으로 삼으며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국제기구와 이웃 도시의 원조에 기대는 삶을 살더라도 학교를 만들고 아이들을 키워 오고 있었다. 조그마한 이곳 학교들 출신의 어린이들은 석박사가 되었고 팔레스타인의 지식인이 되었다. 그렇게 난민촌의 사람들은 높은 사회의식으로 인티파다(반이스라엘 저항운동)와 민중 저항의 중심이 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난하고 비루한 난민의 삶을 벗어날 수 없어도 이들은 모두 한결같이 손님을 이웃처럼 맞이하는 친절함과 넓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누추한 처지에도 우리를 불러 세우며 좁은 집 안으로 방문을 허용하는 손짓에 안타까웠던 마음조차 누그러지게 했다.

    이제 난민촌에서 태어난 이가 더 많아졌지만 지치지 않고 삶을 이어가는 모습 속에서 오히려 가진 자의 무료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것들은 들어올 틈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활기와 용기로 넘쳐나 보였다. 가진 자의 좁은 마음과 이기심을 질타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과거의 고향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갈지언정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와 희망은 더 넘쳐나는 것 같았다. 땅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의미로 가득 찬 공간이 사라졌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이 땅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그 힘으로 끊임없이 생동하고 있었다.

    헤브론, 파괴된 터전에 복원하고 다시 거주하며 공간을 지키다

    헤브론에 갈 때는 꼬불꼬불한 지방 도로를 이용했다. 서안을 남북으로 곧게 뻗은 60번 도로를 이용하려면 여러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택시 기사는 우리에게 검문을 피하게 하려고 샛길로 멀리 돌며 헤브론으로 데려갔다.

    남부 도시 헤브론으로 가는 길은 마치 사막의 언덕들을 지나는 느낌이 들 정도로 황량하면서도 고고한 길이었다. 제대로 닦이지도 않은 언덕길을 따라 곡예를 하듯 가면 군데군데 모래 가운데 마을들이 나타나곤 했다. 이런 곳에서도 땅을 일구고 살아가는 팔레스타인의 모습은 마치 고대 이야기 속에서나 그려졌던 이미지를 보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헤브론의 올드시티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극심한 공격을 받는 곳 중 하나다. 유대 민족의 조상과 아랍 민족의 조상이 함께 묻혀 있는 모스크가 있다는 이유로, 극우 시오니스트들이 폭력적으로 팔레스타인 도시 안으로 진입해 유서 깊은 옛 건물들을 파괴했고, 팔레스타인 건물 위에다 이스라엘 건물을 지어 점령촌을 만들고, 길을 봉쇄하거나 통행을 금지하거나 세로로 나누어 이스라엘 길을 설정하면서 자기들 공간을 곳곳에 심어놓은 곳이다.

       
      ▲ 팔레스타인 주택 위에다 지은 이스라엘 건물에서 던져진 돌과 쓰레기들. 이를 막기 위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철망을 쳐 놓았다. 건물 아래 누런 부분은 팔레스타인 주택이었으나 지금은 이스라엘 건물이 있어 사용할 수 없다 (사진=염창근)

    헤브론은 골목마다 이스라엘 군인 초소가 있었고 검문소가 있었고 CCTV가 작동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건물 위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해 벽돌과 쓰레기를 던지고, 납치해 때리고, 물탱크에 구멍을 내는 폭력을 일삼았고 이스라엘 군인들은 이런 유대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검문하고 통제하고 제한하고 있었다.

    가로 세로 1킬로미터, 서울로 치자면 지하철역 하나 정도의 거리의 헤브론 올드시티에는 4만 5천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조밀하게 살고 있지만 여기에 무려 5개의 이스라엘 점령촌이 있고 400명의 유대인이 들어와 있다.

    헤브론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떠날 것을 요구했지만 이들 400명은 끝까지 버티며 오히려 팔레스타인을 향해 오랫동안 잔인한 공격들을 해왔다. 그리고 이 400명의 유대인을 지키기 위해 1500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110개의 체크포인트를 두고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초소에는 보안을 핑계로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을 벌주듯 이유 없이 세워놓고 있었다.

       
      ▲ 길 가운데에 있는 검문소. 헤브론 올드시티 내에만 110개의 검문소가 길과 건물 곳곳에 있다. 이 길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분리선 오른쪽으로만 다녀야 한다. 왼쪽은 이스라엘 길이다. 아예 아무도 다니지 못하도록 텅 빈 길도 많다 (사진=염창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부수고 봉쇄해 버린 유서 깊은 헤브론 올드시티에 다시 거주하는 운동(Rehabilitation)을 1996년부터 시작했다. 유대인 점령촌에 의해 옛 공간이 빼앗기고 파괴되었지만 공간을 복원하고 올드시티의 삶을 재생시켜 온 것이다.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불러오고 새로 건물을 보수하고 학교를 세워 그 공간의 문화를 보존할 길을 찾아냈다. 학교에서는 옛 건물을 복원하는 다양한 기술을 가르치고 있었고 곳곳에서 묵묵히 옛 터전을 복구하고 모습이 드러왔다.

       
      ▲ 헤브론 재거주 운동을 위해 옛 건물 복원 기술을 익히는 팔레스타인 젊은이들 (사진=염창근)

    ‘헤브론 재거주위원회’의 한 활동가는 아름다운 도시와 이스라엘 군인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군사적 폭력에 맞서 공간을 지키는 재거주 운동이 끝내 이길 수밖에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금까지 남은 유대인들은 매우 극렬한 시오니스트들이고 점령자들은 항상 종교를 이유로 폭력을 행사하지만 실은 필요할 때만 종교를 들먹일 뿐 자기들 이익만을 위한 행위이다.“

    우리가 오기 전날에도 유대인에 의한 팔레스타인인 살해 사건이 일어났던 만큼 극단적 공격이 일상화된 헤브론이지만 그런 공격의 근본 이유를 꿰뚫어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팽팽한 긴장마저 뛰어넘어 삶의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 노력들에서 기억은 공간을 통해 재현되고 미래로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엿볼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 공간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 재거주한 건물의 창밖으로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동양인 여행자를 신기한듯 쳐다보았다 (사진=염창근)

    책을 통한 어린이 문화교육을 왕성히 하고 있는 ‘타메르 공동체교육센터’는 몇 년 전부터 아이들과 함께 ‘천 개의 이야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천일야화’의 구성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온 이 캠페인은 아이들에게 여권 모양의 작은 노트를 나누어주고 어떤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적어오게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2009년에는 예루살렘에 관한 천 개의 이야기를 모으기로 했고, 아이들은 실제로 예루살렘에 가지는 못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 같은 이웃 어른들에게 예루살렘 이야기를 여권 노트에 적었다. 목표는 천 개 이야기였지만 그렇게 모은 예루살렘 이야기는 6천 개가 넘었다고 했다.

    타메르 센터는 아이들과 함께 예수가 걸었던 길을 따라 가며 팔레스타인 땅을 지리적이고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해 왔다. 종교를 현실의 폭력이 아닌 문화로 받아들이고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어우르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공간을 빼앗겼음에도 현재에서 이미 미래의 공동체를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점령촌의 역사가 그대로 표현하고 있듯 과거를 대한 이스라엘의 파괴는 물리적으로 강대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라는 두 공간의 외관적 차이만큼 누구나 슬쩍 보기만 해도 단번에 알 수 있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공간들 속에는 점령자의 오만함과 피점령자의 슬픔으로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넘어설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식민지 시민이라는 굴욕 속에서도 살아가고, 잘라존의 주민들이 다시 마을을 만들고, 헤브론에서 옛 터전에 재거주를 하고, 타메르의 아이들이 오래된 기억을 되살려내는 모습은 어쩌면 현실의 폭력이 얼마나 퇴행적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파괴된 팔레스타인 땅에는 기억과 공간을 다시 연결시키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이스라엘이 소멸시키려 해도 팔레스타인의 공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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