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는 노조로 돌아가지 않겠다"
        2010년 02월 06일 12:5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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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석호 민주노총 전 조직실장(사진=이재영) 

    한석호는 ‘육두품’이다. 1980년대 노동조합운동의 저급한 노동자주의 풍토에서 ‘육두품’은 결코 위원장이 될 수 없는 대학 재학 이상 학력의 활동가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민주노총이 만들어지고, 조신하게 취업 공부한 수많은 대졸 조합원들이 생긴 이후에 그 말은 기업노조에 현직 기반을 두지 않는 직업 활동가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이래저래 ‘성골’과 ‘진골’과 ‘육두품’은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후진성, 즉 반사회주의와 기업별 노조주의의 잔재로 남아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민주노조운동, 그 영광과 부끄러움을 있게 한 주역들을 열 명쯤 꼽자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성골’ 총연맹 위원장들은 두엇밖에 끼지 못할 것이다.

    대규모 노조나 정파에 힘입어 위원장 자리에 올랐으되, 그들 대개가 한 일이라곤 취임일과 퇴임일을 노동조합운동사에 남긴 것뿐이라면 너무 지나친 평가일까.

    22년 몸바친 노조운동 떠난다

    한석호는, 보통의 총연맹 위원장들이 끼지 못한 그 열 명쯤에 능히 낌직하다. 물론, 그의 노고와 악명 모두에서 그러하다. 이제 한석호가 노동조합운동을 떠난다. 지난 주,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가 끝나자마자 한석호는 민주노총 조직실장 직을 사임했고, 그 다음 주부터 ‘문화운동’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는 “다시는 노조운동으로 복귀하는 일이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한석호는 왜 22년을 몸바친 노조운동을 떠나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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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 활동가로 일하다 복귀한 민주노총은 어떻던가?

    = 작년 4월 20일 민주노총 미조직 비정규실장으로 복귀했고, 9월 20일부터는 조직실장으로 일했다. 2004년 12월에 금속노조를 떠난 후 4년 4개월만의 복귀였다.

    민주노총 미조직 비정규실은 조직실과 합쳐졌다 나뉘어졌다 하는 등 안정적이지 못해 부서를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조직실에서도 내부를 정비하는 일을 많이 했고, 실원들끼리 즐겁게 일하려 노력했다.

    돌아가 보니 노조운동이 생각 이상으로 어려운 처지에 처해 있더라. 위부터 아래까지 다 바뀌어 있더라. 생동감이 없었다. 이전에 혁신을 제기할 때는 민주노총 중앙과 간부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는데, 막상 복귀해 보니 현장도 죽어 있었다. 집회 참석이나 파업 등 투쟁도 안 하려 하고.

    그리고, 그래서인지 정파들도 바뀌어 있었다. 일을 할 때는 정파들이 서로 힘을 합쳐 뭔가 함께 하려는 기운들이 느껴졌다.

    문화운동과 당운동으로 돌아가는 것

    – 왜 사직했나?

    = 원래부터 보궐 집행부에서만 일하기로 했었다. 임성규 보궐 집행부가 출범할 때는 조합원들이 민주노총 조끼 입는 것을 부끄러워 할 정도로 엉망진창인 상황이라,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려 갔던 것이다. 임기가 끝났으니 사직한 것이다.

    – 선거 결과가 달랐어도 사직했을까?

    = 마찬가지다. 이번 선거에 임성규 위원장이 후보 등록했을 때도 그만 둔다고 이야기했다. 민주노총에 복귀하며 잠시 멈췄던 문화운동, 평화운동, 당운동으로 돌아와야 했다.

    – 임성규 집행부가 혁신을 주창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단기의 보궐 집행부가 별다른 성과를 못낸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공약이 실현되지 못했다. 실패의 원인은 무엇인가?

    = 임성규 위원장이 내건 핵심은 사회연대전략이었고, 나는 그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노동운동의 프레임이 민주노조운동에서 연대노조운동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은 뭔가 가진 집단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고, 비정규직 입장에서 보자면 실제 ‘가진 집단’이 맞다. 자신의 임금과 고용을 위해서는 열심히 투쟁하지만, 그 외의 문제에는 제대로 투쟁하지 않았고, 비리와 추문이 연이어 터지면서 민주노조는 고립된 섬이 됐다.

    사회연대는 단순간에 해결될 건 아니고, 5년이나 10년은 걸릴 중장기전략이다. 10개월짜리 집행부가 해결하기는 불가능한 과제라는 말이다. 그러나 실패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처음에는 사회연대운동을 적극적으로 사고했지만, 중간에 흐지부지됐고, 현 김영훈 집행부로 연결되지도 못했다.

    임성규 집행부, 현안에 쫓겨

       
      

    주 원인은 현안에 쫓긴 데 있다. 언론악법, 비정규악법, 최저임금투쟁, 쌍용차 파업 등에 민주노총 중앙 역량이 모두 집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회연대팀이나 부서를 별도로 만들었어야 했다.

    물론 이런 사실이 변명이 될 수는 없다. 관성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당면 투쟁을 쫓아다니는 관성을. 그리고 사회연대운동에 대한 활동가들의 인식이 체득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87년 이후의 관성, 즉 기업별 투쟁과 그것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이 여전히 활동가들을 지배하고 있다.

    – 이번 민주노총 선거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여러 정파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통합후보 사퇴까지 가게 된 것인가?

    = 전후 과정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산별 대표자들이다. 작년 말 여의도 농성할 때부터 일부 산별 지도부들 사이에서 통합지도부를 구성하고 임성규-신승철 집행부를 한 번 더 하게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임성규 위원장은 그런 제의를 거절했었다.

    이후 통합후보를 만들자는 문제의식이 더 확산됐고, 누구로 할지만이 문제로 남았다. 일부에서는 양경규, 최상재 등을 추천했는데, 양경규 후보안은 동의치 않는 사람들이 있었고, 최상재 후보안은 언론노조 안에서 더 일해야 한다는 내부의 반발이 있었다.

    후보 등록 마지막 날 오전에 산별 대표자들이 신승철 사무총장에게 당신네를 후보로 하겠다고 통고하면서 임성규 위원장의 설득을 부탁했다. 마감 30분 전에 신 총장이 임 위원장을 만나 설득했고, 10분 전에 동의를 받아 등록한 것이다. 후보 등록 후 사퇴까지의 과정은 <레디앙>에 실린 임성규 위원장의 글에 잘 나와 있다.

    그 와중에 ‘전국회의’와 ‘혁신연대’ 일부는 별도의 독자후보를 모색했다. 이흥석, 조준호 등을 타진했지만, 다 안 됐고, 결국 조직 내 산별대표자들의 반발을 누르고 김영훈 후보조를 등록한 것이다. ‘노동전선’은 아예 처음부터 허영구 후보를 등록했고.

    – 국민파에 속한 산별 대표자들의 의사를 정파 조직에서 억눌렀다는 말이냐?

    산별대표자들과 국민파의 이견

    = 억눌렀다기보다는 의견 차이라 볼 수 있다. 국민파 내부의 다른 부분들이 임성규 집행부를 통합으로 인정치 못하겠다는 것이다.

    성폭행 사건이 터지고, 민주노총 안에서 소통과 통합이 필요하다는 문제제기가 일어났을 때는, 술집에서 민주노총 뉴스 나오면 취객들이 침 뱉으며 채널 돌리라고 아우성 치는 상황이었다. 그 이후 조금씩 나아졌는데, 그런 힘은 모두 통합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노조가 하는 일 중 노선에 관련 안 된 것은 없기 때문에 이견 충돌이 언제나 벌어진다. 그럼에도 지난 1년 동안에는 대의원대회 폭력사태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작년 말 여의도 농성 마무리 발언을 하며 산별 대표자들이 눈물을 글썽이더라.

    그 전에는 투쟁 후에 정파들끼리 모여 술 먹으러 갔었는데, 이번 임기 중에는 안 그랬다. 중앙위와 중집 회의에서도 정파끼리 편 갈라 싸우는 일이 없었고. 산별 대표자들이 투쟁 후에 눈물 흘리며 소감 말한 것은 민주노총이 생긴 후 처음 있는 일이다.

    – 중앙파의 유력 주자였던 양경규가 통합후보를 위해 불출마했고, 통합후보라던 임성규 위원장은 국민파 내분 때문에 중도 사퇴했고, 결국 국민파의 젊은 활동가인 김영훈 후보가 당선됐다. 통합에 대한 국민파의 결과적 배신 아니냐?

    = 통합 노력에 찬물이 끼얹어져 상당히 아쉽지만, 배신이란 표현은 과한 것 같다. 지금 민주노총 앞에 놓인 과제는 어느 한 세력이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김영훈 집행부가 임성규 집행부의 통합 흐름을 계속 이어가겠다고 하니, 그러길 바란다. 선거 과정에서의 아쉬움과 섭섭함을 선거 후까지 가지고 갈 필요는 없다.

    – 노조를 취재하는 기자들이나 애정을 가진 학자들마저도 이번 선거를 보고 난 후 ‘이제 민주노총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뭐라 변명하겠는가?

    = 통합하자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상처받았을 것이고, 그 상처가 쉽게 치유되지도 않을 것이다. 많은 실망감을 준 게 사실이니, 당분간은 힘 모아지기 어렵겠지만, 힘이 모이는 계기가 생기리라 생각한다. 이런 과정이 민주노총의 재생을 위한 위기이자 기회일 수 있다.

    역시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연대다. 짧은 시간 안에 충족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안팎에서 애정 어린 비판을 해달라.

    중앙파는 해소, 징계성 탈퇴했다

    – 노조만 바뀐다고 되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노동운동, 노동정치에서 갈수록 진보정당의 몫이 커지고 있다.

    = 요즘 여러 사람들과 모여, 진보신당의 노동 사업 또는 노동정치를 이런 식으로 놔둬서는 안 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진보신당은 우선 활력이 없다. 당원 숫자가 많고 적고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활력이 죽어 있다. 분당과 촛불시위 때는 활력이 있었는데, 이걸 당이 묶어세우고 이어가지 못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진보정당은 노동 중심 정당인데, 2년 만에야 노동위원회를 구성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여력이 닿는 한, 당에 활력을 일으키는 역할, 노동정치 판을 부여잡고 일하려고 한다.

    – 노조와 당 안에서 중앙파는 해소됐다고 봐야 하나?

    = 지형상 중앙파는 더 이상 없다고 봐야 한다. ‘전진’에서 노동 단위가 거의 탈퇴했고, 탈퇴한 세력마저도 금속노조의 ‘현장노동자회’와 사무직 산별들로 이원화되며 흩어졌다. 이번 민주노총 선거에서도 제각각 판단했다. 나 역시 임성규 집행부 합류에 대한 이견으로 ‘전진’에서 징계성 탈퇴했다.

       
      

    – 노조와 당 안에서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정파였던 중앙파가 해소된 이유는 무엇인가?

    = 하나는 정치방침 때문이다. 분당 과정에서 갈등이 컸다. 두 번째는 민주노총 내부 선거를 둘러싼 내부 이견이 오래 전부터 누적돼온 탓이다.

    – 기회가 된다면 노조운동으로 다시 복귀할 것인가?

    = 다시는 노조운동으로 복귀하는 일이 없을 것 같다. 만 22년 동안 노조운동 현장에서 일했는데, 이제 내 운동의 중간 정리를 하려 한다. 당운동, 문화운동, 평화운동에서 역할을 하고 싶다. 당 정치운동 차원에서 노동정치 활동을 통해 노조에 간접 기여하겠다.

    문화다양성포럼 사무처장으로 일한다

    – 한석호가 문화운동을 한다니 조금 어색하다. 언제부터 간여한 것인가?

    = 2006년 한미FTA 반대운동을 할 때, 영화인대책위에서 도와 달라길래 대외협력 집행위원을 맡아 1년 정도 일했었다. 그러다 ‘문화다양성포럼’ 사무처장으로 상근하던 상태에서 민주노총으로 잠시 갔던 것이다. 이제 다시 문화다양성포럼 사무처장으로 복귀해 일하고 있다.

    2007년부터 ‘평화헌법시민연대 한국9조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일본 평화운동과의 교류 연대 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문화다양성포럼은 첫째, 문화예술과 시민사회의 소통, 둘째, 유네스코 문화다양성협약의 국내 비준과 실천, 셋째,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문화 활동, 넷째,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운동하는 단체다.

    – 그곳에서 오래 일할 것 같은가?

    = 특별한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 한,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한 오래 일하게 될 것 같다. ‘한석호 저게, 무슨 문화고, 무슨 평화운동이야?’라는 말을 많이 듣겠지. 한석호에게 어울리는 일은 당이나 노조에서 조직 짜는 일이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평화운동 문화운동을 해보니 내게 잘 맞더라.

    사막에 혼자 떨어져도 운동의 씨앗을 뿌리라는 게 내 신조다. 개척해야 한다. 한국 진보운동은 폭이 좁다. 학생운동, 노조운동, 농민운동, 통일운동밖에 없다. 진보적 관점을 갖고 평화운동과 다양성 운동을 개척하고 싶다.

    필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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