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티 지진 참사, 왜?
        2010년 02월 05일 10:1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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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도 7.3 강진으로 아이티가 깊은 비탄에 빠졌다. 사망자 15만, 부상자 20만, 총인구의 1/3에 달하는 300만 명이 집을 잃고 길거리에서 연명하고 있다. 식량, 식수, 전기, 의약품의 심각한 부족으로 운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은 ‘참혹함’ 그 자체다.

    알려진대로 아이티는 참 가난한 나라다. 중남미 대륙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다. 인구의 75%가 하루 2달러, 56%가 1달러로 살아간다. 어른 일당이 2달러 정도다. 실업율 70%, 빈곤율이 80%, 절대빈곤52%를 반영하듯 아이티인들 대다수는 엉성한 흙벽돌집에 칩거하는 빈민들이다.

    빈부격차도 참 심하다. 1%의 부유층이 아이티 부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문맹율이 50%에 달하고 대외 부채도 10억 달러가 넘는다. 이번 지진으로 IMF로부터 10억 달러를 더 빌리려고 한다.

       
      ▲ "아이티는 군사적 점령이 아닌 원조가 필요하다" (사진=김병기)

    부르주아 매스컴들은 이구동성으로 충격적인 사망자와 ( 1989년 7.0 샌프라시스코 지진 63명, 1995년 7.2 고베 지진 6,300명 사망) 복구에 최소 10년이 걸린다는 엄청난 붕괴를 아이티의 가난, 아이티 정부의 무능, 열악한 사회 제반 시설, 불량한 건축 탓으로 돌리기만 할 뿐 ‘왜’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다.

    아이티의 저항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 아이티 상황에 밝은 쿠바 카스트로는 “아이티는 식민주의,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생산물”임을 주장한다.

    아이티는 찬란한 ‘변혁의 역사’를 자랑한다. 최초로 ‘흑인노예해방 및 흑인 공화국’을 선포한 나라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40만 명의 흑인 노예들이 1791년 커피, 담배, 사탕수수 농장에서 봉기해 3만 명의 프랑스 백인 노예주들을 물리치고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미국 및 중남미 흑인노예해방운동의 불길을 당긴 인류 역사상 최초의 노예 해방이었다.

    노예 노동으로 막대한 부를 벌어들이는 식민지 국가들이 그 당시 유럽 설탕 소비의 40%, 커피 60%를 생산한 아이티 노예 해방을 가만둘 리 없다. 먼저 영국이 6만 명의 군대로 침략했지만 패퇴했다. 이어 프랑스 나폴레옹이 2만 명의 정예 부대로 공격을 강행했지만 패배했다. 두 번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이티 흑인들은 1804년 역사적인 독립을 선포했다.

    미국과 프랑스의 약탈

       
      ▲사진=김병기

    땅과 노예를 잃은 농장주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으름장을 놓는 프랑스와 한통속인 강대국들은 ‘아이티 독립 불인정’과 ‘통상금지정책’으로 압박했다.

    경제적, 외교적 궁지에 몰린 약소국 아이티는 1825년 터무니없는 배상금 요구를 받아 들였다. 무려 1억 5천만 프랑이다. (그 당시 프랑스의 일년 예산, 현재 2백억달러).

    미국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아이티의 경제를 질식시키는 외채의 시작이다. 아이티 예산의 상당 부분이 외채를 갚는 데 사용됐다. 마침내 1947년에 그 외채를 다 갚았다. 무려 120년이 넘게 걸렸다.

    ‘외채 상환’ 구실로 미국은 아이티를 침략해 점령했다 (1915~34년). ‘점령반대 투쟁’으로 수천 명의 아이티인들이 죽었다.

    점령 기간 동안 아이티 법들을 개정해 미국인들이 아이티땅을 구매할 수 있게 되자 미국인 소유의 대농장은 급속히 늘어났고 땅에서 쫓겨나 갈곳없는 아이티 농민들은 수도 ‘포트 아우 프린스’ 빈민 지역으로 몰려 들며 저임금 살인노동의 ‘산업 예비군’으로 전락했다.

    냉전 기간 중 ‘쿠바 압박’이라는 명분으로 잔인한 독재정권 두발리에 부자를(1956~86, 파파 독/베이비 독이라고 불리운다) 적극 지지했다. 미국 입맛에 딱맞는 경제 정책과 무자비한 인권 탄압으로 미국 자본가들은 편안하게 떼돈을 벌었고, 아이티의 빈곤은 끝없이 깊어졌다. 외채는 폭발했고(7억5천만 달러), 수만 명의 반독재 투사들은 죽음을 맞이했다.

    외국 투자가들을 위한 베이비독의 살인적인 저임금으로(시간당 11센트) 살길이 막막해진 아이티 민중들은 1986년 불처럼 일어섰고 ‘베이비 독’은 아이티 외채보다 더 많은 9억 달러를 갖고 프랑스로 튀었다.

    아리스티드의 사회개혁정부

    1991년 반독재운동 지도자, 해방 신학을 실천하는 ‘빈민의 사제’ 아리스티드가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토지개혁, 최저임금 인상, 농민지원, 노동조합활동 보장, 교육/의료 정책, 환경보호 등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다.

    9개월 뒤 미 부시 정부가 배후 조종한 군사 쿠테타로 베네수엘라와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의 귀환 투쟁으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아이티 정치 상황이 계속 불안해지자, 1994년 미국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이행을 약속한 아리스티드를 대통령직에 복귀시켰다.

    2000년 선거에서 아리스티드는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재선되고 그의 ‘판미 라발라스’당도 국회 의석의 90%를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자신감이 붙은 아리스티드는 조심스럽게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이행하면서도 ‘친민중’적인 의료 및 교육 정책, 농촌 정책 등을 제한적으로 실시했고, 과거 프랑스에 지불한 배상금 200억 달러가 부당했다고 주장하면서 ‘반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강대국들의 내정간섭

    2004년 프랑스, 미국, 캐나다의 입김으로 발생한 군사 쿠테타로 아리스티드가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망명하자 ‘사회안정’ 명분으로 9,000명의 유엔군이 아이티를 점령했다. 1만여 명의 NGO 활동가들이 몰려들었다. 2006년 선거에서 전 아이스티드 정부 수상 프레발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이미 미국의 충견으로 변한 정객이었다.

       
      ▲사진=김병기

    2004년 이후 아이티는 ‘유엔군과 NGO의 식민지’로 여겨지고 있다. 프레발 정부는 이름뿐인 정부다. 부패한 아이티 정부를 믿지 못하자 수십억 달러 아이티 지원금은 NGO 통장에 입금되었다. 중요한 정책은 강대국들이 결정했고 NGO는 그 정책들을 집행했다.

    결과적으로 NGO는 아이티를 약탈하는 강대국들의 하수인 활동을 한 꼴이다. 민주 개혁적인 아리스티드 정부를 궁지로 몰기 위해 모든 지원금이 중단됐다는 사실은 강대국 지원금의 ‘정치적 입장’을 또렷하게 입증한다.

    아이티 정부가 무능한 이유

    강진으로 아이티 수도가 대규모로 붕괴되고 수십만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해도 프레발 정부가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2004년 유엔군 점령 이후 전혀 실권이 없는 강대국들의 허수아비 정권이고 아이티의 주체적인 국가 기능은 거의 마비된 상태다. 미국이 지진 바로 다음날 아이티 공항을 장악하고 15,000명의 군인을 급파해 아이티를 점령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아이티의 ‘자연적 재해’인 지진이 ‘사회적 재앙’으로 된 이유는 수백년간 지속되는 강대국들의 점령, 약탈, 착취, 내정 간섭 때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난 1월 28일 ‘남미사회포럼’이 주관한 시드니 타운홀 광장 집회에서 주장된 ‘아이티 부채 완전 탕감’, ‘아리스티드 즉각 복귀’, ‘미국 점령 반대’는 아이티 사회적 재앙의 건강한 극복을 위한 ‘필수 조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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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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