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곡을 찌르는 모호함, 영화감독 박찬욱
    2010년 02월 05일 09: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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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주연배우보다 더 인기 있는 감독은 많지 않을 겁니다”

강연이 시작되기 전, 노회찬 이사장의 인사말에서처럼 ‘주류 영화판’에서 ‘비주류’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내뱉는 영화감독 박찬욱이 노원에 왔다. 18회를 맞이하는 마들연구소 명사초청특강의 주인공이다. 여느 때와 달리 참석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된 이날의 강연은 예정된 시간을 30분이 넘긴 시간에야 겨우 끝날 정도로 열띤 질문들이 이어졌다.

관객들의 궁금증은 다양했다. 감독이 된 계기부터, 그의 전작들에 대한 질문, 한국영화 전반에 대한 문제점, 그리고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수많은 질문들 중에서 가장 많이 궁금해 하는 점들을 몇 가지 골라서 질문을 던졌고, 조곤조곤 풀어내는 답변 속에서 그의 영화에 대한 철학과 세계관을 읽을 수 있었다.

   
  ▲ 마들연구소 명사특강 박찬욱 감독편 (사진=마들연구소)

“원래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제 동생이 저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동생은 현재 화가라네요.) 그래서 다른 길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미술사를 공부하는 학자나, 미술비평 같은 일을 하고 싶었지요. 그래서 대학을 진학할 때 철학과를 선택했습니다.”

그렇다면 영화감독의 길은? “영화에 대한 관심을 쭉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는 영화를 진지한 예술매체로 취급해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정보를 얻기도 힘들었죠. 그래서 대학 도서관에서 영화 관련된 책들을 빌려보기 시작했습니다.”

히치콕의 ‘현기증’ 감독의 길로 이끌어

그것을 시작으로, 대학 3학년 무렵 영화에 관심 있는 친구들과 함께 모여 단편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본격적인 영화인생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작품이 있지요. 바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이라는 작품을 보면서부터 입니다. 이 한편의 영화가 나를 매료시켰어요. 내 인생의 결정적인 한 편의 영화이지요.”

이어 관객들에게 자신을 영화의 길로 접어들게 만든 영화를 소개하면서 “불법 다운로드는 절대 안 됩니다”라는 말을 곁들이기도 했다.

<달은.. 해가 꾸는 꿈>(1992년), <삼인조>(1997년), <심판>(1999년), <공동경비구역 JSA>(2000년), <복수는 나의 것>(2002년), <여섯 개의 시선>(2003년), <올드보이>(2003년), <쓰리, 몬스터>(2004년), <친절한 금자씨>(2005년),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년), <박쥐>(2009년). 그의 작품 목록들이다.

자신이 감독한 작품들을 하나씩 하나씩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각 작품을 찍으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곁들이기도 했다.

“지금도 가장 고마운 분들이, 제가 <공동경비구역JSA>로 데뷔한 줄 아는 분들입니다.” 사실 그의 첫 작품은 가수 이승철씨가 주연을 한 <달은.. 해가 꾸는 꿈>이라고 한다. 이승철씨가 너무 바빠서 촬영 시작하기 전날 처음 만나서 인사를 나눴는데, 박찬욱 감독에게 처음 건넨 말이 “감독님 영화 줄거리가 어떻게 돼요?”라는 물음이었답니다. 청중들의 폭소가 터진 것은 당연.

모든 모순의 시작 ‘계급’

“JSA를 찍을 때는 거의 매일 술을 먹었지요. 하지만 술자리의 대화도 100% 영화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술을 마시다 보면 남한군은 일찍 자러 들어가고 보통 인민군들이 밤을 지새워 술을 마시곤 했습니다.”

“이 사회에는 수많은 모순들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계급모순에 대해서는 숨기려고 하고 쉬쉬하려고 합니다. 사실 모든 모순들의 시작이 바로 계급모순에서 비롯된 것인데 말이죠. 그래서 그런 내용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복수는 나의 것>이지요. 흥행에는 완전 실패했지요.” 그러나 흥행 실패와는 달리, 다수의 평론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작가로서의 그의 지위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집 가훈 ‘아니면 말고’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거짓말은 ‘하면 된다’라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노력을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미덕도 부로 결정되는 세상이에요. 하다가 안 되면, 때로는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 집 가훈은 ‘아니면 말고’입니다”
처음에는 웃음을 터뜨리던 관객들도 이내 그의 설명과 대답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살면서 때로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필요한 법이라고 이야기하는 박찬욱 감독.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끝으로 두 시간 동안 진행된 ‘모호한 대화’를 마쳤다.

이날의 강연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400여 주민들이 백병원 17층 대강당을 가득 채웠다. 준비한 자리가 모자라 일부 주민들은 복도에 앉거나 내내 서서 강연을 듣기도 했다. 18회를 맞이하는 마들연구소 월례특강이 주민들의 인식 속에 뿌리 박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월례특강이 장소조차 구하기 어려워 매번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정치’적인 행사라는 이유로 장소 대여를 꺼린다는 것이다. 지역주민들이 모여서, 좋은 강의를 듣는 것이 과연 ‘정치적’인 행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벌써 다음 달 강의 장소를 구할 걱정이 앞선다는 연구소 관계자의 말. 하지만, 잘 될 것이다. 때로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필요하다고 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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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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