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룰라는 배반자인가?
        2010년 02월 04일 10:2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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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는 최근 노동계급의 시각에서 브라질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와 룰라 정부의 경험을 분석하고 평가한 책 『브라질에서 진보의 길을 묻는다』(후마니타스)를 펴냈다.

    저자는 룰라 정부의 경험이 보여준 것은, 노동계급이 노동계급 정당을 건설하여 정치세력화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노동계급의 이익 실현이 담보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또 노동계급 이익의 두 축을 구성하는, 물질적 이해관계 중심의 당면 계급 이익과 생산체제 변혁을 지향하는 근본 계급 이익이 서로 갈등하는 모순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양자를 동시에 실현하는 것은 어렵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따라서 노동계급의 정치 세력화가 당면 계급 이익을 중심으로 추진된다면, 집권하더라도 근본 계급 이익의 실천이 실종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집권 전략의 덫’이라고 말한다.

    그는 최근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룰라가 집권했다고 열광하고, 변혁적 정책 펴지 않는다고 냉소하고, 쉽게 잊는 냄비 같은 반응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브라질만큼 노동자 정치세력화 하기도 어려운 조건인데,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집권 이전에 뭘 준비해야 하는지 브라질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라며 이 책 출간의 의미를 설명했다.

    <레디앙>은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이 책의 머리말과 4부 ‘평가와 함의’ 부분을 몇 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5. 룰라 정부와 노동계급: 계급 이익과 호응성

    룰라 정부는 사회주의적 변혁 정책들을 실천하지 않았다. 노동계급에 대한 배반인가? 노동계급에게 룰라 정부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노동계급의 시각에서 룰라 정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계급 이익의 내적 이질성을 고려하여 두 유형, 즉 당면 계급 이익과 근본 계급 이익으로 나누어 고찰해야 한다. 물론 룰라 정부가 출범할 당시에 기대를 모았던 것은 당면 계급 이익과 근본 계급 이익 모두가 실현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룰라 정부는 당면 계급 이익의 실현에는 상당한 성과를 보였으나, 근본 계급 이익의 실현에는 한계를 보여 주었다.

    룰라 정부가 은행 및 기간산업의 국유화를 실시하지 않음으로써 사적 소유권 체계에 기초한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넘어서는 근본 계급 이익의 실현은 거의 진전되지 않았다. 룰라 정부 2기의 경제정책은 1기에 비해 시장 질서에 대한 개입의 수준을 다소 높이기는 했지만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의 기초 위에서 추진되었다.
      

       
      

    2기 경제정책의 핵심을 이루는 PAC의 경우 항구‧공항‧철로 등 인프라를 강화하는 한편, 4개 정유 공장, 46개 바이오 디젤 공장, 77개 에탄올 공장을 신설하는 등 에너지산업에 대한 정부 투자를 대폭 증대하여 에너지산업에 대한 국가의 통제 수준을 높이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석유화학 부문과 수력 에너지 부문에 대한 정부 지분을 대폭 증대하고, 파산 위험에 직면한 3개 지역 은행을 인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요 은행들은 여전히 사적 자본의 수중에 놓여 있었고, 룰라 정부는 까르도주 정부가 추진하던 국유 기업 사유화 정책을 중단했을 뿐 까르도주 정부 시기 사유화된 기업들의 재국유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동계급의 근본 계급 이익은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

    임금 인상, 고용 창출 등에서는 성과

    한편 룰라 정부는 당면 계급 이익을 실현하는 데에는 상당한 성과를 보여 주었다.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함으로써 저임금층의 임금을 끌어올려 임금격차를 줄이는 한편, 전반적인 실질임금 수준의 상승을 가져왔고, 적극적인 시장 개입 정책을 통해 안정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괄목할 만한 신규 고용 창출을 이루었다.

    또 빈곤 퇴치 운동과 가족 지원금 제도 등 각종 이전소득 지원 제도들을 통해 저소득층에 대한 재정 지원을 확대하며 부의 재분배를 실시했고, 폭스바겐 등 사측의 구조 조정 기도에 맞서 노동자들이 파업 투쟁을 전개하는 사업장들에 대해 노사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 정부 대출금 조기 상환 위협을 가해 노동자들의 고용 안정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룰라 정부는 노동자들의 물적 조건 향상과 고용 안정 보장을 위해 노력했으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노동계급의 당면 계급 이익의 실현에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룰라 정부는 노동계급의 당면 계급 이익에 복무했다는 점에서 친노동계급적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으며, 룰라 정부의 노동계급적 성격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역학 관계에서도 노동계급에 대한 호응성으로 나타났다.

    까르도주 정부는 노사정 협의 기구들을 무력화하거나 폐기했으나, 룰라 정부는 경제‧사회정책 방향을 수립하는 경제사회발전위원회를 설치하여 노동계급 대표들을 참여토록 했고, 노사정 협의 기구인 노동법 포럼을 설립하여 노동법 개정을 위한 협의를 진행하도록 했으며, 산업부문별 노사정 협의체인 경쟁력 포럼을 구성하여 산업 발전을 위한 전략을 모색하도록 했다.

    이처럼 노사정 협의 기구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도록 압박하며 노동계급을 주요한 한 축으로 설정한 것은, 까르도주 정부하에서 자본계급이 시장 권력에 의거하여 일방적으로 지배하던 관행을 중단하고 노동계급의 사회적 발언력을 보장하기 위한 친노동계급적 개입이었다.

    뿐만 아니라 2002년 대선 운동 과정에서 룰라는 CUT 측이 제시한 ‘일곱 가지 목표’를 대선 공약으로 채택했으며, 룰라 정부 출범 후 CUT는 국책은행의 융자 대출을 노동기본권을 철저하게 존중하는 기업들로 제한하도록 요청하고, 각종 경제‧산업 정책들의 수립 과정에 개입하며 노동 측 입장을 반영토록 했다.

    이런 실천들은 노동계급에 대한 룰라 정부의 호응성을 의심할 수 없도록 한다. 룰라 정부는 노동계급의 계급적 성격을 지닌 노동자 정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룰라 정부의 노동계급적 성격과 노동계급에 대한 호응성은 자본계급에 비해 노동계급에 대해 호응적이며, 자본계급 이해관계보다는 노동계급 이해관계에 복무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노동계급 계급 이익 복무는 당면 계급 이익에 한정되었을 뿐 근본 계급 이익의 실현은 기피되었다.

    따라서 노동계급 시각에서 룰라 정부를 평가함에 있어서도 상반된 평가가 가능하며,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상이한 이념적 입장들을 표현하며 룰라 정부 재임 기간 동안 줄곧 노동계급의 내적 갈등 요인으로 작동했다. 이는 2009년 8월 4~7일 상파울루에서 개최된 제10차 CUT 총회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표 10-6> 참조).

       
      

    CUT 내 이념적 흐름들은 노동자당 내에도 상응하는 이념적 흐름을 지니고 있으며, CUT의 집권파 역시 노동자당 내에서도 다수파를 구성하고 있고 신노조 운동에서부터 룰라 정부 탄생에 이르기까지 룰라와 함께해 온 핵심 세력들이다.

    CUT 집권파는 아치꿀라상오로 불리며 CUT 총회 대의원의 80%를 점하고 있고, 제2정파 CSD는 10% 정도를 점하고 있으며 AS와 이념적 성향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한편 노동자파(OT, O Trabalho), 좌파통합(AE, Articulação de Esquerda), 마르크스주의 좌파(EM, Esquerda Marxista) 등 좌파 소수파들은 나머지 10% 정도를 구성하며 주로 트로츠키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다수파는 사회주의적 수사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점차 사회주의 대신 노동자 중심주의를 표방하며 이념적 경직성 대신 노동자 이해관계 신장을 위한 실용주의 노선으로 옮겨갔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언급하지만 사회민주주의를 현 단계의 대안 사회 모델로 설정하고 신자유주의 세력을 핵심 적대 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다수파는 룰라 정부를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부정하지 않고 그 위에서 신자유주의에 맞서 노동자 이해관계를 실현하는 주체로 설정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편, 좌파 소수파는 명시적으로 사회주의를 대안 사회 모델로 삼고 이념적 원칙에 충실한 흐름들이다. 이들은 당면 계급 이익보다 근본 계급 이익을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며 사유재산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적대 세력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이들은 사유재산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질서 위에서 노동계급 당면 계급 이익을 실현하려는 룰라 정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CUT 탈퇴, 총연맹 분립

    이처럼 사회주의 이행을 위한 변혁적 실천을 핵심 과제로 설정하고 있는 좌파 흐름들의 시각에서 보면 룰라 정부의 변혁적 실천 결여는 대단히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룰라 정부 출범 이후 좌파 흐름들의 CUT 탈퇴는 계속되었으며 이들은 CUT로부터 이탈한 다음 각각 별도의 노동조합 총연맹체들을 결성했다.

    PSTU 측 급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CUT를 탈퇴하여 꼰루따(Con Luta)를 결성했고, PSol 측 온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노동자연대(Intersindical)를 결성했고, 공산당 계열 PCdoB 측은 노동자총연맹(CTB, Central dos Trabalhadores e Trabalhadoras do Brasil)을 결성했다.

    좌파 소수파들의 핵심적인 요구는 까르도주 시기 사유화된 국유 기업들의 재국유화다. 재국유화 등 변혁적 프로그램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룰라가 연립정부를 파기하고 대통령령으로 국유화 등 변혁적 정책들을 관철시키기 위해 의회주의를 버리고 CUT와 MST 등 대중운동 조직체들을 동원하여 의회를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 실패의 결과이므로 사회주의 이행을 위한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파와 좌파 소수파들의 대립‧갈등은 계급 간 갈등이 아니라 계급 내 계급 이익들 사이의 갈등인 것이다. 다수파는 노동계급의 당면 계급 이익을 대변하는 반면, 좌파 소수파들은 노동계급의 근본 계급 이익을 대변한다.

    이는 노동계급의 본질을 구성하는 두 가지 계급 이익이 충돌하는 것이고, 노동계급 관점에서 투사된 두 가지 전망이 충돌하는 것이며, 노동계급 구성원들이 지니는 두 개의 계급 정체성이 충돌하는 것이다. 당면 계급 이익과 근본 계급 이익 모두 노동계급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이런 갈등은 피할 수 없는 노동계급의 딜레마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딜레마가 CUT 내 이념적 흐름들 사이의 갈등으로 발현된 것이다.

    당면 계급 이익을 대변하는 다수파가 CUT와 노동자당을 주도해 옴으로써 노동계급 내 당면 계급 이익 중심성을 재생산하게 되었으며, 계급 형성 과정에 있는 브라질 노동계급의 존재 양식(mode of existence)에서 변혁적‧혁명적 계급 양식이 아닌 개혁적 계급 양식이 지배하게 되었다. 결국, 브라질 노동계급은 CUT의 주도하에 계급 형성에 있어 큰 진전을 이룩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혁명적‧사회주의적 계급 형성이 아니라 개혁적‧사민주의적 계급 형성이었던 것이다.

    룰라 정부는 당면 계급 이익에 복무하는 다양한 정책들의 실천을 통해 노동계급의 이념적 결집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노동계급의 계급 형성에 있어 조직적 형성보다 이데올로기적 형성에 더 큰 기여를 했으며,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의 존재 양식을 개혁적 양식의 정체성이 주도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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