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노동자, 토니 마조치와 김말룡
    2010년 02월 02일 08: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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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와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산업 재편 속에서 노동현장과 노동자가 희생되지 않고, 보다 노동친화적인 대안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개념인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의 초기 아이디어는 토니 마조치(Tony Mazzocchi)가 미국의 석유화학원자력노조(Oil, Chemical and Atomic Workers; OCAW)에서 활동하던 시절 제안에서 비롯되었다.

환경운동과 강력한 연대 구축

그는 향후 지속가능한 경제에서는 화학, 정유, 원자력 노동자들이 일할 여지가 없다고 염려했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안전한 일자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1980년대 후반 ‘노동자를 위한 슈퍼펀드(Superfund for Worker’s)’와 새로운 일자리를 위한 직무훈련을 제안하게 된다.

   
  ▲ 토니 마조치

마조치는 1926년 뉴욕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아버지 역시 섬유 노동자이자 조합원이었고, 두 누나와 친척들이 공산주의자였던 탓에 일찍이 급진적 정치에 친숙하게 되었다. 2차대전에 참전한 이후 브루클린에서 건설노동자, 철강노동자로 일했고 1950년에 헬레나 루벤슈타인 화장품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 작업장 오염과 유독물질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다.

토니 마조치는 1953년에 26세의 나이로 미국 가스제련화학노동연맹 지부장으로 선출되었고, 여성을 위한 동일임금과 건강보험 적용을 위한 캠페인을 펼쳤다. 1962년 접하게 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노동자 건강과 작업장 환경을 위한 활동에 눈을 뜨게 만들었고, 이후 일련의 활동은 1970년 ‘직무안전보건법안(OSHA)’ 통과로 이어져 닉슨 대통령조차 마조치의 지도적 역할을 언급할 정도였다.

환경운동과 강력한 연대를 구축한 최초의 노조 지도자로서 마조치는 1960년대 중반부터 석면 방지 캠페인에 전념하면서 작업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에 대해 정부와 사회가 무관심함을 질타했고, 1970년 뉴욕의 첫 지구의 날 행진에 의장으로 지명되었다.

마조치는 1977년부터 91년까지 OCAW의 부의장과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아래로부터 조직되는 노동조합과 현장의 동력을 강조하며 노동조합을 일신했다.

미국 노동당 창당

1983년 마이크 니콜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던 <실크우드>에서 열연한 메릴 스트립의 실존 인물 캐런 실크우드에게도 마조치는 절친한 친구이자 조력자였다.

1974년 오클라호마 크레센트의 커맥기(Kerr-McGee) 플루토늄 원료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방사능 피폭 의혹이 불거지자 거기서 일하던 캐런과 동료들은 상급조직 간부 토니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과학적 조사 및 언론사와의 접촉을 진행하던 중 캐런은 의문스러운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

마조치 역시 생명의 위협 속에 캐런의 사인 규명과 커맥기 공장의 진실을 밝히려 노력했지만, 결국 커맥기 공장은 폐쇄되고 말았다.

토니 마조치가 노동운동이 시민권, 환경, 학생, 반핵, 반전운동과 동맹을 건설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기업 권력에 대항하면서, 사회 다른 집단들도 기업 권력으로부터 고통받고 있는 만큼 공동 전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환경운동에 접근하고 최초의 노동자 반전운동을 조직했으며, 그의 노동조합을 젊은 학생활동가들에게 열어젖혔다.

마조치의 마지막 노력은 미국 노동자들의 독립적 정치 조직인 노동당(Labor Party)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1996년 창당대회를 가진 노동당은, 그러나 마조치 개인의 비중이 너무 컸던 탓인지 그가 2002년 사망한 이후 별다른 진전이 없어 보인다.

단병호, 심상정 이전의 김말룡

   
  ▲ 김말룡 전 의원

한국에서 토니 마조치와 비견할 사람이 있다면 마조치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났던 김말룡 전 의원일 듯싶다. 1993년 국회 환노위 돈봉투 폭로사건으로만 기억되고 있지만, 김말룡은 한국 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평지돌출적 노동운동가였다.

해방 직후 1945년 조선기계제작소 노조 선전부장으로 시작하여 대한노총 조직부장, 경북연합회 위원장으로 일하며 이승만 대통령과 대적했고, 1959년에 대한노총의 부패상에 항거하여 전국노총을 만들고 뒤이어 1960년에 한국노련을 결성하여 초대의장을 맡았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한국노련을 강제로 해산하고 한국노총을 만들었지만 1974년 노동운동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김말룡의 노조 민주화투쟁은 계속되었다.

1978년 천주교 노동사목위원회를 설립하고, 노동문제상담소를 열어 힘없는 노동자의 벗으로 일하던 김말룡은 1992년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는데, 여기서 그의 짧은 의정활동은 빛을 발한다. 철도와 지하철 파업 지원, 한국통신 조합원 농성, 병역특례 해고자 조수원씨 분신사건에 이르기까지 김말룡은 노동자의 입과 손발이 되어 뛰어다녔다.

한국에는 단병호, 심상정 의원 이전에 노동자 의원 김말룡이 존재했던 것이다. 1996년 봄 인천계양갑구에 출마했다가 재선에 실패한 뒤 같은 해 10월 불의의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지만, 사망 전날까지도 민주노총에서 노동법 개정 문제와 관련한 회의를 갖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홀로, 아무도 하지 않던 일들을 하다

김말룡은 노동자 의원으로서, 특히 노동인권과 산업재해 예방, 환경보전을 법제도 도입과 현장의 투쟁으로 실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원진레이온 진상조사 활동을 벌이며 작업환경 측정과 노동자 건강검진 시에 노조 대표나 노동자대표가 참여하도록 제도화할 것을 촉구했고, 산업재해보험법 개정을 추진했다.

강원도 탄광 지역문제, 전국해고자대책위원회(전해투) 활동, 철도 및 지하철 대책위원회 활동 등 가장 어려운 노동현장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복수노조 설립, 공무원과 교원노조 보장, 제3자 개입금지 삭제, 노조 운영의 민주화 규정 등 노동조합법 개정 투쟁에 앞장선 것도 김말룡이었다.

쓰레기 매립시설, 정수장 수질 관리, 골프장 건설 억제, 농촌회생에 이르기까지 김말룡은 홀로, 아무도 하지 않은, 많은 일들을 했다. 1992년부터 서울 명동의 카톨릭회관 앞 큰길 가에 보이던 조그만 외국인노동자상담소 간판 역시 한국에서 거의 최초로 이주노동자운동을 시작한 그의 흔적이었다.

김말룡은 애초 태생이 비주류 운동가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그는 주류 노조운동이 힘을 기울이지 않았던 운동들을 꿋꿋이 개척했다. 게다가 김말룡이 의정활동을 했던 시기에는 오히려 한국의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교감이 컸다.

그런 그의 활동이 기록조차 충분히 남아있지 않고, 운동으로 계승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김말룡이 보다 커다란 노동조합운동과 함께, 보다 강력한 진보정당과 함께 활동할 기회를 가졌더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본다.

토니 마조치와 김말룡, 나는 그들을 ‘선진노동자’라고 부르고 싶다. 기후 에너지 위기와 금융위기, 극단적 양극화와 불안의 21세기 초엽 한국은 더 많은 선진노동자들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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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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