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간지식층에서 비정규직으로
        2010년 02월 01일 09: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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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는 최근 노동계급의 시각에서 브라질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와 룰라 정부의 경험을 분석하고 평가한 책 『브라질에서 진보의 길을 묻는다』(후마니타스)를 펴냈다.

    저자는 룰라 정부의 경험이 보여준 것은, 노동계급이 노동계급 정당을 건설하여 정치세력화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노동계급의 이익 실현이 담보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또 노동계급 이익의 두 축을 구성하는, 물질적 이해관계 중심의 당면 계급 이익과 생산체제 변혁을 지향하는 근본 계급 이익이 서로 갈등하는 모순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양자를 동시에 실현하는 것은 어렵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따라서 노동계급의 정치 세력화가 당면 계급 이익을 중심으로 추진된다면, 집권하더라도 근본 계급 이익의 실천이 실종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집권 전략의 덫’이라고 말한다.

    그는 최근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룰라가 집권했다고 열광하고, 변혁적 정책 펴지 않는다고 냉소하고, 쉽게 잊는 냄비 같은 반응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브라질만큼 노동자 정치세력화 하기도 어려운 조건인데,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집권 이전에 뭘 준비해야 하는지 브라질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라며 이 책 출간의 의미를 설명했다.

    <레디앙>은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이 책의 머리말과 4부 ‘평가와 함의’ 부분을 몇 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3. 룰라 정부의 지지 기반과 권력 재창출

    룰라는 2002년 대선과 2006년 대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2002년 대선 승리는 까르도주 정부에 대한 평가였고, 2006년 대선 승리는 룰라 정부에 대한 평가였다고 할 수 있다.

    까르도주 정부 8년 임기는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에 힘입어 워싱턴 컨센서스에 입각한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집행된 시기였다. 까르도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인플레이션은 억제했지만 무역수지는 흑자에서 적자로 전환되어 벗어나지 못했고, 그 결과 외환 보유고는 급감한 반면, 외채는 급증했다.

    또한 국유 기업의 지속적인 매각에도 불구하고 공공 부채는 급증하여 GDP의 57%에 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거시 경제 지표들의 악화에 이어 결국 1998년에는 경제 위기를 맞게 되어 3%대에 머물던 GDP 성장률은 마이너스 성장률(-0.12%)로 돌아서며 총체적인 경제적 실패를 기록하게 되었다.

    사회적 측면에서도 국유 기업 사유화를 전후한 구조 조정과 제조업 위축으로 인해 실업률이 상승하여 경제 위기 직후인 1999년과 임기 마지막 해인 2002년 19% 수준에 달하게 되었다. 제조업의 위축과 서비스업의 확대라는 산업구조 재편과 맞물린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은 비정규직과 비공식 부문의 팽창을 가져왔고, 미흡한 사회정책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사회적 폐해를 상쇄하지 못하여 막대한 빈곤층의 존재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문제들을 전혀 해소하지 못함으로써 여타 신자유주의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실패로 귀결되었다.

       
      ▲ 룰라 브라질 대통령

    까르도주 임기 말 시민들은 브라질의 가장 중요한 문제점들을 실업, 빈곤, 치안 순서로 꼽았다. 시민들이 룰라를 선택한 것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까르도주 정부의 실패에 대한 응징이었으며, 까르도주와 같은 브라질사민당 후보인 세하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브라질사민당의 신자유주의 정책 패키지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원인 제공자에 불과하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민당에서 노동당으로, 경제투표에서 사회투표로

    한편, 시민들은 룰라에 대해 빈곤 해소 등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정책적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고, 2002년 대선 투표 행태는 경제 투표에서 사회 투표로 전환되었으며 기존의 정책 패러다임과 지배 질서에 대한 거부의 표현으로 룰라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시민들은 2002년에 이어 2006년에도 브라질사민당 후보를 거부하고 노동자당의 룰라를 선택했으며, 이는 룰라 정부 1기에 대한 시민들의 평가를 반영하는 것이다. 룰라 정부 첫 해인 2003년 -0.2%의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한 이래 연평균 4.5% 수준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며 성장률의 부침도 적어 경제적 안정과 성장을 동시에 구가해 왔다.

    적극적인 사회정책의 성과로 빈곤층도 대거 감축되었고 경제적 불평등도 크게 완화되었다. 시민들의 룰라 정부에 대한 평가는 임기 내내 50~70% 수준의 긍정적 평가를 유지했고, 결국 2006년 대선에서도 룰라를 선택하게 되었다.

    2002년과 2006년 대선에서 룰라는 60~61%의 득표율을 유지하여 득표율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투표 행태와 지지 기반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표 10-4> 참조).

       
      

    2002년 대선에서 룰라 지지율에 있어 계급 범주들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는 있었지만 계급 위치와 투표 행위 사이의 상응성은 부족했다. 계급 위치가 투표 후보의 이념적 성향과 불일치하는 경향성을 보였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전문직 프티부르주아로서 이들의 계급적 위치는 특전적 계급 블록에 속하지만 진보적 후보인 룰라를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로 선택했다. 반면 비등록 임금노동자와 비취업자 같은 비특전적 계급 블록 범주들은 상대적으로 평균 이하 수준의 낮은 룰라 지지율을 보인 것이다.

    반면, 2006년 대선에서는 계급 위치와 계급 입장 사이의 명확한 상응성이 표현되었다. 전문직 프티부르주아 같은 특전적 범주의 룰라 지지율은 크게 하락하여 룰라 지지율이 절반에 못 미친 반면, 비등록 임금노동자와 비취업자의 룰라 지지율이 상승하여 평균 수준 혹은 그 이상의 높은 룰라 지지율을 보여 주었다.

    결국 2006년 대선에서는 비특전적 계급 범주들을 중심으로 친룰라 블록이 형성되었고 특전적 계급 범주들을 중심으로 반룰라 블록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계급 범주별 계급 위치와 계급 입장 사이의 상응성이 크게 강화되며 2006년 대선에서 진정한 의미의 계급 투표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으며, 룰라 정부의 계급적 성격을 간접적으로 확인해 주었다.

    계급의식은 어떻게 형성되나?

    까르도주 정부 시기 특전적 계급 범주들과 비특전적 계급 범주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심화되었으나 이데올로기적 양극화는 진전되지 않았던 데 반해, 룰라 정부 들어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완화되었으나 이데올로기적 양극화는 크게 진전되었다. 신자유주의 정권하에서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진전되었으나 이데올로기적 양극화는 억제된 반면, 좌파 정권하에서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제어되었으나 이데올로기적 양극화가 크게 진전된 것이다.

    이런 역설적 현상은 계급 형성 혹은 주체의 형성 시각에서 설명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사회의 폐해로 인해 비특전적 계급 범주들의 불만이 증폭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계급의식이 발달하며 계급 형성이 진전되는 것은 아니다. 계급의식이 발달되기 위해서는 긍정적 의미의 물질적 기초가 전제되어야 하고, 계급 형성이 진전되기 위해서는 구심점이 필요한데, 이런 여건이 좌파 정권인 룰라 정부에 의해 제공되었던 것이다.

    룰라 정부는 빈곤 퇴치 프로그램, 가족 지원금 제도 및 적극적 최저임금 인상 정책 등을 통해 비특전적 계급 범주 구성원들에게 실질적인 물질적 혜택을 제공했으며, 그러한 국가권력은 지켜야 할 대상이 되어 비특전적 계급 범주 구성원들 스스로 국가권력과의 동일시가 이루어지며 노동자당과 룰라 정부를 구심점으로 계급 형성을 진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4. 룰라 정부와 사회주의 변혁성 실천의 부재

    룰라 정부는 시민들의 긍정적 평가와 높은 지지율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지만, CUT와 노동자당 내 좌파들의 실망과 불만도 그만큼 높았고 상당 부분이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시민들의 긍정적 평가와 비특전적 계급 범주들의 높은 지지율은 룰라 정부가 정치적 안정 속에서 빈곤과 불평등 같은 사회적 문제들을 해소한 데 대한 긍정적 평가에서 비롯되는 반면, 좌파들의 불만은 룰라 정부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사유재산제의 틀에 갇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변혁적 실천을 펼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이는 룰라 정부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노동자당은 노동계급의 계급 이익에 기초해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실천을 중시해 왔으며, 그렇기 때문에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룰라에 대해 조지 소로스와 같은 해외 투기 자본가들까지 이념 공세를 퍼부었던 것이다.

    그들의 이념 공세에 따라 브라질 주식시장과 환율이 급락을 반복했던 것은 사회주의 정부의 출범 가능성에 대한 공포심이 널리 확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2003년 1월 뽀르뚜알레그레에서 개최된 세계사회포럼에 전 세계 좌파들이 대거 결집했던 것도 그러한 우파 기득권 세력들의 공포심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듯했다.

    실천 의지가 부족할까?

    국내외 자본계급을 포함한 지배 블록의 공포심과 전 세계 좌파들의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왜 룰라 정부는 사회주의 변혁적 실천을 추진하지 않았을까? 룰라와 권력 핵심의 실천 의지가 부족해서인가, 아니면 외적 여건과 실천 역량의 제약 때문인가? 후자는 룰라 정부와 권력 핵심의 설명이고, 전자는 좌파들의 비판이다.

    룰라 정부를 둘러싼 외적‧구조적 여건이 변혁적 실천을 어렵게 했다는 주장은 경험적 근거에 기초한 것이다. 1998년 말 외채 위기 속에서 까르도주 정부가 IMF와 체결한 협약에 대해 2002년 말 룰라를 포함한 유력 대선 후보들은 모두 협약에 준수할 것을 서명했고, 룰라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기존에 작성된 체크리스트에 따라 정기적인 평가가 실시되었다.

    브라질 경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물가와 화폐가치를 안정화할 것, 공공 부채 감축을 위해 공공 부문의 기초 재정 흑자를 GDP 대비 일정 비율 이상으로 유지할 것 등이 체크리스트의 핵심을 이루었다. 실제 룰라 정부는 체크리스트와 정확히 일치하는 통화주의 정책을 집행했다.

       
      ▲ 룰라 대통령

    그러나 IMF와의 협약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통화주의 정책을 피하기 어려운 구조적 여건 또한 존재했다. 룰라가 취임할 당시 외채 규모는 외환 보유고의 다섯 배를 넘어섰고 연간 수출 총액의 세 배가 넘었다.

    비슷한 시기 외환 위기를 겪었던 한국의 경우, 당시 외채는 외환 보유고의 97% 수준에 불과했고 연간 수출 총액의 77%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견주어 보면 브라질의 외채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IMF의 지급 보증 없이는 국가 파산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IMF와의 협약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룰라 정부는 통화주의 정책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외채 비율, 한국의 다섯 배

    협약을 준수하겠다는 내용으로 IMF와 서약을 체결했고, 막대한 외채 규모로 인해 IMF 지급보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룰라 정부는 외채 지불 중단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또한, 정부의 공공 부채 역시 GDP의 57% 수준으로서, 재정 적자가 누적되면서 공공 부채의 규모가 눈덩이처럼 부풀고 있었다. 엄청난 규모의 재정 적자와 공공 부채 속에서 룰라 정부가 은행 및 기간산업을 국유화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룰라 정부는 외채 지불 중단도 기간산업 국유화도 실시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대선 승리를 위한 선거 연합 전략과 그에 따른 연립정부 구성으로 인해 변혁적 정책들을 입안하기 어렵게 하는 내부 검열의 암묵적 체계가 구축되어 있었다. 내부 검열을 통과한다고 하더라도 의회 내 의석 과반수 미달의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룰라 정부 출범 당시 노동자당은 상원 내 제3당, 하원 내 제1당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고, 제1당을 차지하고 있던 하원 내에서조차 노동자당의 의석 점유율은 18%에 불과했다. 룰라 정부와 노동자당은 의회 내 과반수 확보를 위해 군소 좌파 정당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규모의 우파 정당들을 포괄하는 정당들과 연대하게 되었다. 변혁적 법안은 연대 정당들의 동의조차 확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룰라 정부는 IMF 협약을 준수할 의무, 막대한 외채 및 공공 부채 규모, 연립정부 및 과반수 의석 확보 문제 등 노동자당과 룰라 정부를 둘러싼 구조적 조건들의 제약으로 인해, 정부의 의지 여부에 관계없이 변혁 정책을 실천할 역량을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룰라 정부와 노동자당 핵심의 변명에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반면, 좌파들은 룰라 정부와 노동자당의 핵심이 변혁 정책을 실천할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문제의 핵심으로 꼽으며, 실천 의지만 있다면 구조적 조건들의 제약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노동자당이 룰라 정부 출범 이전에 이미 변혁성을 상실했고, 노동자당의 온건화는 창당 이래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그 결정적 분기점은 1994년 대선 패배 이후라고 지적한다.

    창당 시점에서 노동자당의 주요 조직적 기반은 신노동조합운동의 노동조합들과 도시 주민운동 조직체들이었으며, 여기에 다양한 사회운동 세력들과 진보적 지식인 집단들이 결합하는 양상을 띠었다. 노동자당의 성격은 신노조합운동에 의해 규정되었으며, 그 정체성의 핵심은 사회주의의 실현이라는 이념적 목표를 지닌 노동계급 계급정당이었다.

    노동자당이 성장함에 따라 당의 성격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표 10-5> 참조). 특히 지자체에 진출하면서 정책을 관철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서 실용주의적 접근이 요구되었고, 공직자들의 비중과 당에 대한 기여도가 증가하면서 당에 대한 영향력도 강화되었으며, 그와 함께 실용주의는 당 내에서 점차 힘을 얻게 되었다.

    당원 중 노동계급 감소, 중간계급 증가

    한편, 각종 선거에 참가하면서 선거에서 승리하고 사회‧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이념정당‧계급정당에서 점차 대중정당으로 전환되었다. 당의 규모가 커지면서 당원 구성에 있어 노동계급의 비율이 감소하고 중간계급의 비율이 증가했으며, 당의 지지 기반이 커지면서 지지 기반도 당원 구성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의 비율 감소와 계급적 이질성의 증대 현상을 겪게 되었다.

    노동자당의 실용주의가 강화되고 노동계급의 계급성이 약화되는 추세를 더욱 돌이킬 수 없게 하면서 당의 성격 변화를 주도하게 된 계기는 대통령 선거였다. 1989년 대통령 선거 1차 투표에서 룰라는 2위로 득표해 결선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고, 결선투표에서 47%를 득표함으로써 비록 패배했지만 룰라의 향후 당선 가능성을 확인해 주었다.

    1994년 대선의 경우 까르도주가 인플레이션을 제압하며 막강한 대통령 후보가 되어 대선에서 승리했지만, 대선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룰라는 압도적 우위의 지지도 1위 후보였다.

       
      

    1994년 대선 패배 이후 룰라와 노동자당은 대선 승리를 선거 전략‧전술의 문제로 보게 되었다. 결국 노동자당이 지키고 축적해 온 모든 가치에 대해 대선 승리를 최우선적 과제로 설정하게 되면서 노동자당은 선거 정당으로 전환되었고 이념적‧계급적 정체성은 주변화되었다.

    이러한 실용주의 강화, 노동계급의 계급성 약화, 대중정당화, 선거 정당화의 결과는 노동자당의 온건화였다. 1994년 대선 시기까지 노동자당은 은행 및 광물자원의 국유화, 외채 지불 중지, 급진적 토지개혁을 강조하며 사회주의적 입장을 명확히 했으나, 1994년 대선에서 패배한 이후 노동자당식 사회주의를 민주적 혁명으로 재정의하면서 자본주의와 사유재산제에 대한 거부에서 민주주의의 급진화로 중심을 옮겨갔다.

    1998년 대선 공약에서는 사회주의와 이행의 프로그램들이 빠졌고, 2002년 6월 22일에는 국내외 자본과 보수 진영의 이념 공세에 직면하여 발표한 “브라질인들에게 보내는 서한”을 통해 브라질이 체결한 기존의 국제조약들과 협약들을 존중하며 물가 안정과 재정 흑자 등 경제 안정을 보장했다. 노동자당이 변혁성을 포기했다는 것이 공개서한을 통해 재확인되었을 뿐이며 사회주의 이행을 위한 변혁적 실천은 이제 공개적으로 포기된 것이었다.

    노동자당이 온건화되고 대통령 후보 룰라가 공개서한에서 국제 협약의 존중과 경제 안정을 약속했다고 해서 변혁적 실천 의지가 실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집권 시점까지 변혁적 프로그램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대안 계획 “Plan B”가 존재했다가 결국 파기되었다는 것은 변혁적 실천 의지가 총체적으로 부재했다고 보기보다는 변혁적 실천을 위한 적극적 의지가 결여되고 소극적 의지에 머물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평가로 판단된다.

    이런 소극적 의지에 더해 변혁적 실천을 어렵게 하는 외부의 구조적 여건이 상호작용하면서 룰라 정부는 사회주의 이행을 위한 변혁적 실천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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