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한 만화책 <내가 살던 용산>
    2010년 01월 27일 08:3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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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장례를 치룬 날 나는 다시 엉망으로 취해 망가졌다. 열사 추도시를 쓰고 나면 꼭 한번씩 의식을 잃을 정도가 된다. 사람들은 쉽게 추도시를 말하지만 무슨 접신이라도 된 양, 떠나기 싫은 어떤 영혼이 내게 마지막 패악이거나 앙탈이라도 부리는 양 난 한번씩 푸닥거리를 해야 했다. 모두 충분히 만신의 지경이 될 수 없는 부족한 놈이 버거운 영혼들의 이야기를 떠안았기 때문이었다. 돌아가신 분들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였다.

   
  ▲ 책 표지

그리곤 근 몇일동안 두터운 잠바를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그래 그랬다고 솔직히 얘기하자. 부족한 시집 출판기념식 때 부러 찾아와주신 백기완 선생께서, 시인은 싸우던가, 그것을 못하겠으면 괴로워 술이라도 처먹다 죽던가 둘 중의 하나밖에 없어, 라고 호령을 하셨는데 그렇다면 나는 다행이라고 할까. 깨어 있는 의식이 싫고 두려워 멍하니 몇 시간이고 앉아 있다가 술을 찾곤 했다.

보일러를 켜둔 방안에 있는데도, 솜이불을 덮고 자는데도 온 몸이 떨려 왔다. 자다보면 온 몸이 흥건히 젖고 베개 앞뒤와 누운 자리가 모두 흠씬 젖어 있었다. 그래도 나는 끝내 잠바를 벗지 못했다. 안타까운지 아내는 잠바를 벗고 자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지만 나는 무슨 동면에라도 드는 겨울 곰처럼 잠바를 벗고 눕지 못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했지만 돌이켜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다시 열흘 정도가 지나 늦은 밤 나도 모르게 용산으로 갔다. 그곳밖에 갈 곳이 없기도 했다. 1월 20일, 용산1주기 추도의 밤. 1년이라니. 1년이 벌써 지나갔다니. 1년전 그날 새벽까지 인터넷으로 용산 상황을 보면서도 갈 수가 없었다. 자주 만나던 전철연 인태순 동지와 총무님 얼굴이 떠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새벽 다섯 삼십 분. 원고를 송고하곤 이제라도 나가봐야 하지 않을까 했다. 저 정도면 무조건 진압한다는 이야기이고, 아침 출근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아마도 작전을 마무리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난 일어서지 못했다. 너무도 피곤하다는 핑계였다. 맞고 끌려가는 게 어디 한두번인가 하는 체념의 마음이기도 했다. 근 20여년 보아 온 것은 때가 되면 늘 맞고 끌려가는 노동자, 빈민들의 모습이었다. 무슨 큰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여섯 명이 불태워져 죽었다고 했다. 마침 콜트콜텍 기타만드는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문화예술인들 회의가 있던 날이었지만 나는 어느새 용산으로 달리고 있었다. 달리면서 광우병 대책위와 기륭전자 때부터 함께 해왔던 촛불시민들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무조건 7시에 청계광장에서 모이자고. 그렇게 정신없이 하루가 갔다. 무수히 달려오던 사람들. 금세 대책위가 꾸려지고, 첫날을 준비했다. 오후 6시 철도노조 사무실에서 회의가 끝나고 7시 첫 규탄 집회를 준비하며, 프로그램이 없다고 시를 한편만 낭송하자고 했다.

그러마고 했다. 내가 무슨 말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앉아 1시간 만에 <너희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라는 첫 번째 추도시를 썼고, 악을 지르며 낭송을 했다. 사람들은 경찰벽을 못 뚫을 거라 했지만, 어느새 우리는 전경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밤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급히 쫒아갔지만 이미 선두는 시청 광장 앞에서 명동성당 쪽으로 회군한 후였다.

이 정도면 됐다는 사람들, 어떻게 이렇게 갈 수가 있냐는 사람들로 나뉘어 험악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미안하지만 이 정도면 됐다는 사람들은 주로 흔히 말하는 운동권들이었고, 이렇게 갈 수 없다는 사람들은 평범한 촛불시민들이었다. 광화문 촛불 때도 그랬고, 용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늘 대중은 개념없고 대책없이 과격하기만 한 사람들로 가르쳐 주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나는 차마 그들을 버려두고 갈 수가 없어 마지막까지 함께 했다가 순천향병원으로 넘어 갔다. 그런 일은 미안하지만 내가 아는 한, 광화문 촛불항쟁 때도, 기륭비정규직 투쟁에서도, 용산 투쟁에서도 내내 숱하게 있어 왔다. 이명박은 그런 우리의 불철저와 적당함이 만들어가고 있는 어떤 허상인지도 모른다.

   
  ▲ 그림=김홍모

그런데 벌써 1년이 지났다고 한다. 이제 우리도 떠나야 할 때라고 한다. 생각하니 그렇게 싸우고도 반성해야 할 일로만 1년을 보낸 셈이었다. 가끔은 내 자신이 불쌍할 때도 있다. 넌 왜 그렇게 너의 삶을 힘든 쪽으로만 몰아가는 거니. 왜 그러지 않아도 될 곳에 너의 모든 것을 거는 거니. 왜 그렇게 스스로를 학대하고, 망가지며 괴로워하는 거니.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조금씩은 견디며 살아가는 이곳에서 왜 넌 자꾸 못견뎌하는 거니. 자고 일어나 보니 새벽 4시 레아 2층 난로 곁에서 혼자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돌아와 가방을 보니 한 친구가 챙겨 준 만화책 한 권과 그림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사실 보기 힘들었다. 이제 다시 떠나야 할 때. 나는 정말이지 남들처럼 이젠 그만 용산을 잊고, 나도 조금은 행복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며칠, 다시 동굴 속에 든 것처럼 웅크려 있다가 어느 순간 <내가 살던 용산> 만화책과 그림책 <파란집>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겨보았다. 만드는 과정에 추천사를 쓸 사람 한 분을 소개해 주고, 고맙게 서평을 하나 써달라는 부탁을 거절하고 난 후였다. 내가 뭐라고 하는 마음이었다.

몇 페이지 보니 대략의 기획 방향을 알 것 같았다. 평전 쓰듯 돌아가신 한 분 한 분들의 삶을 기록하는 형식이구나. 그래서 여섯 명의 만화가들이었구나. 작년 4월 경부터 작업을 한 것으로 아는데 그럼 근 9개월 동안 이렇게 남모르게 또 용산과 함께 해 온 사람들이 있구나. 우선 싸움에 바빠 아무도 기록하지 못했던 철거민 열사들의 구체적인 삶들을 찾아 나선 이들이 있었구나. 그럼 내가 현장에 있으면서도 못내 얘기 듣길 꺼려했던 열사들의 생애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겠구나 싶어 꼼꼼이 보기 시작했다.

끝장까지를 그렇게 단숨에 보았다. 근 9개월 동안 모두가 거리에서 분통을 터트릴 때 자신만의 골방에서 숱한 번민을 겪으며 한 획 한 획을 사랑으로, 분노로, 꿈으로 그려 왔을 여섯 만화가 분들께 미안하기까지 했다. 난 3류 시인이지만 모두 1류 만화가들이었다.

참 아름다운 만화책이었다. 참 눈물겨운 만화책이었다. 정말이지 반성과 분노가 다시 치솟는 만화책이었다. 이런 사람들의 죽음을 이렇게까지 밖에 싸워내지 못했구나 생각하니 유가족들에게 미안한 책이었다. 좀 더 빨리 나왔더라면 우리 시대 양심 있는 모든 자들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무기로, 자성의 계기로, 내일에 대한 꿈의 거울로 삼았을 책이었다.

   
  ▲ 그림=김홍모

몇 년 전까지 순화동에서 조그만 동네 소고기 뷔페를 했다는 윤용헌 열사네 가족.
주말이면 한강에 나가 애들이랑 농구하고 축구하기를 즐겼다는 그. 설이면 춘천 고향에 가 아이들과 빙어낚시하는 걸 제일 좋아했다는 그. 사람들에게 술내기, 밥내기를 좋아해 실속 없었다는 그. 2층 방에서 자다 새벽 몰래 들어와 집기를 뜯어가던 용역깡패들에게 얻어맞던 그. 2007년 겨울 강제 철거를 당하고 북아현동 높은 달동네에 열 평 남짓한 집을 얻어 살았다는 그들. ‘가기 싫지만 가야 돼. 도와야지.’ 하며 ‘닷새 있으면 올 거야.’라고 말하고 사고 전날 나갔던 그. 망루에 불이 붙고, 같은 순화동 철거민 출신으로 지금도 병원에 있는 지석준 씨가 망루에서 뛰어내려 혼절했을 때 “승우(지석준 씨의 아들 이름)야! 이렇게 있으면 너 죽는다. 빨리 피하자.”고 불이 안 나는 쪽으로 지석준 씨를 옮겨주고 옥상에서 내려가는 문 쪽으로 달려갔다는 그. 그런데 웬 영문인지 망루 4층에서 아랫도리만 불탄 채 발견된 그. 열 두시간만에 강제부검 당한 그. 부검 후에도 장갑을 끼고 있던 그. 지문은 선명이 남아 있는데, 신원 확인을 위해 강제부검당했다는 그. “연대 온 동지들은 가시죠.” 했을 때 “우리도 갈까.”하는 표정이기도 하고, “우린 여기 남자.”라는 표정이기도 했다는 그의 눈빛.(김수박 「철거민」 중에서)

   
  ▲ 그림=김수박

그리곤, 한대성 열사네 가족.
강원도에서 수원 변두리 신동으로 이사 와 결혼 십 년만에 월세 단칸방에서 목련나무가 있는 조그만 전셋집으로 옮겨 다시 십여년을 한 동네에서만 살았다는 사람들. 20년 다니던 회사에서 정리해고 당하고, 사는 게 막막할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 온 재개발. 2007년 12월 군대가는 큰 아들을 배웅하며 문 밖에 서서 내내 울더라는 그. 아내인 신숙자 씨는 건물 청소용역 비정규직으로 일해야 했다고 한다. 그런 아내가 걱정할까봐 문자로만 ‘며칠 못 들어갈 거 같아. 정말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라고 남기고 떠난 그. 1월 20일, 일을 갔다 오니 동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고, 병원으로 가니 영정 사진을 달라하고, 새벽 경찰이 찾아와 DNA검사를 해가는 동안에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그의 죽음. 눈물도 나오지 않더라는 신숙자씨. 고향 화천으로 내려가 뭐든 심으면서 다시 살아보자고 했다는 그들.(유승하 「잃어버린 고향」 중에서)

   
  ▲ 그림=유승하

두 아들과 함께 용산 4가 뒷골목에서 ‘삼호복집’이라는 일식집을 하던 양회성 열사네.
배운 건 요리 기술뿐이라 평생 주방만 오갔던 인생. 한땐 독립한 가게가 잘 돼 조금은 여유로웠던 때도 있었지만, 그만 다시 IMF 외환위기 당시 가게문을 닫아야 했던 그들. 봉천동으로 가서 다시 가게를 열었다가 그나마 있는 돈마저 거개를 날리고, 용산 4가 뒷골목에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빚을 끌어와 열었다는 가게. 중학교 때부터 야구를 했지만 끝내 꿈을 접고 일식 주방장 기술을 배우게 된 둘째 아들 종민이, 큰 아들 종원이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정말이지 네 식구 모두가 결사의 마음으로 열었다는 마지막 가게. “내일 모레가 설인데, 누나 목소리도 듣고 싶”지만 “목소리 들으면 눈물날 것 같아 그냥 갈란다.”고 간 사람.(신성식 「던질 수 없는 공」 중에서)

   
  ▲ 그림=신성식

용산에서만, 지금의 레아호프 자리에서만 1983년에 이사 와 26년 동안 장사를 했던 고 이상림 열사네.
일흔 둘 나이에 이제 결혼한 지 3년여밖에 안된 둘째 아들 이ㅜ 씨와 함께 망루로 올랐던 그. 새벽 5시면 일어나 기도를 드리고 나서야 모든 일을 할 수 있던 그. 손자를 자전거에 태우고 다니길 좋아했다는 그. 2006년 10월, 강변역과 용산에서 노점을 하던 둘째 아들 내외와 함께 20여년 하던 갈비집을 들어내고 호프집을 만들던 그. 인테리어 비용 마련을 위해 집조차 빼서 레아호프 4층 옥탑방에 살던 그. 길가 화분에 생강도 키우던 그. 제일 오래 살았다고 철대위 위원장을 떠밀려 맡았던 그. 프랑 하나 걸려다가 용역깡패 다섯에게 두들겨 맞고도 오히려 폭행으로 수배 생활을 해야 했던 그. 둘째 아들이 다시 그 자리 물려받아 철대위 위원장을 맡아야 했던 기구한 삶들. 그는 죽고 아들은 아버지를 불태워 죽인 죄목으로 갇혀야 했던 비운의 가족들.(김성희 「레아호프, 그들이 만든 희망」 중에서)

   
  ▲ 그림=김성희

용인에서 13년 살던 집을 철거당하고, 옮겨간 성남에서 다시 철거를 당해 네 식구가 천막에서 살던 이성수 열사네 가족 이야기.
장례식장에서 학교를 다녀야 했던 그의 아들 상현이. 어느 날 겨울 친구 진성이네에서 자고 와라 해서 왜 그런가 하고 가봤더니 지붕도 없이 무너진 집에서 촛불을 켜고 앉아 있던 엄마 아빠. 천막에서 자고 다니며 고물트럭 노점을 하는 아빠를 도우려 미안한 마음에 피자 배달을 다니던 상현이. 또 그렇게 길거리에서 붕어빵 노점을 하던 엄마. 여름이면 음식이 썩어나가던 천막 안의 아이스박스, 장마 때면 책이 모두 젖어 있던 천막, 겨울이면 물이 없어 진성이네에서 씻고 다니던 나날. 얼음빙판에 넘어져 피자배달 오토바이를 모두 깨먹고 얼굴이 긁혀 왔던 상현이. 눈 내리는 고물트럭 노점에 앉아, “상현아 아버지는 평생을 정직하게 살려고 애썼다. 우리가 서로를 돕지 않으면 누가 우리를 도와주겠니.”라고 알 듯 모를 듯한 얘기를 남기고 용산으로 갔던 그. “우리가 바랬던 게 너무 큰 거였을까요. 우리는, 아빠와 엄마와 나는 바람을 막아주는 벽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었어요”라는 상현이.(앙꼬 「상현이의 편지」 중에서)

   
  ▲ 그림=앙꼬

아, 이런 이들이 2009년 한해를 떠들썩하게 했던 도심 테러리스트였다. 도심 부유 상인들로, 개발 이익을 노린 브로커들로 찍혔던 이들이었다. 사회 불안을 야기시키려고 의식적으로 모인 불온 단체의 회원들이었다. 아직도 감옥에 갇혀 있는 위험한 이들이었다.

옳지. 소설가인 김연수 씨가 추천사에서 적실히 밝혀 두고 있다.

“철거민들도 사람이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한 권의 책까지 만들었다. 다른 노력은 이루 말할 수도 없다. 사람이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야만 하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아니, 증명해도 믿지 않는 나라에 살고 있다. 하지만 믿는 믿지 않든, 사람은 사람이다. 그것만은 너무나 확실하다. 그리고 그들이 사람인 한, 당신들은 틀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틀렸다.”

그리곤 1년, 혹자에 따라선 용산은 이제 끝났다고 하기도 하고, 이제 그만 아쉬워도 접어야 할 때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다시 묻는다. 무엇이 시작이었고, 무엇이 끝이였냐고, 우리는 도대체 용산을 제대로 알기나 한 것이었냐고. 당신은 무슨 목적과 생각으로 그 처참한 현장에 서 있었냐고.
유가족이 시신을 확인하고 싶다고 울부짖자, 지금 당신들 폭동하려는 거야라고 묻는 나라?
두 여성이 흉폭한 폭력기계들인 용역 셋을 때렸다고 오히려 고소당하는 나라?
가난한 이들의 생존권과 주거권을 짓밟고 수조원의 건설이익을 챙기는 자본은 합법인데, 거기에 저항하다 끌려가고, 죽은 자들은 불법이 되는 나라?
그 폭력과 착취의 철거가 어디 비단 전국 600군데 철거 현장에서만 일어날까?
노동 현장에서는 일어나지 않는가? 하루 아침에 일터에서 철거당하고, 정규직에서 쫒겨나고, 비정규직으로 일해야 하는 860만 비정규직들의 삶은 철거당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초등학교 도덕교과서만도 못한 세상을 언제까지 우리는 용인해야 하는가?

용산에서 쫓겨난 우리는 다시 마포 어디로, 왕십리 어디로, 작가회의 회원이기도 한 소설가 유채림이 혼자 남아 촛불 지키고 있다는 홍대 앞 어느 철거 현장으로 이 소중한 연대의 마음을 가지고 달려가면 되는가? 다시 또 어느 고립된 섬과 같은 민중 소외의 현장에서 측은지심으로 눈물짓고, 분노하면 되는가?

안타까운 말이지만 그래서 다시 신부님들 몇 분이 거룩해지고, 다시 또 몇 명의 박래군 형과 이종회 형과 남경남 의장이 시대의 고행자로 태어나고, 시인 몇이 무슨 보살처럼 불려지고, 미술인들 몇의 작품이 빛나면 되는가? 그럼 세상이 조금은 따뜻해지는가? 자 이런 복마전의 사회 속에서 당신은 어떤 죽음의 현장, 은폐의 현장을 이제 다시 선택해 갈 것인가? 용기가 있는가? 저들의 문어발 한 쪽이 아니라 먹물만 들어 있는 저 흉악한 대가리를 물어뜯으며 당신은 절규할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 소개하는 이 책은 2009년과 10년을 아울러 한국사회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책 중의 하나이면서 가장 무서운 책 중의 하나다. 무수한 질문들을 우리에게 던지는 수많은 상상력의 집산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때로 어떤 책은 그 안에 쓰여진 텍스트의 내용을 넘어 그 자체가 한 시대의 기념비가 되어 세월의 풍상에 깎이더라도 꼿꼿하게 그곳에 서 있는 책들이 있다.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어떤 상징, 푯대가 되기도 한다. 나는 감히 이 책들이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의 산 속 게릴라 시절, 모든 것을 내려놓고도 배낭 속에 간직한 책 한 권처럼. 스페인 공화파 시민들이 왕정파 파시스트들에게 쫓겨 피레네 산맥을 넘어 후퇴하면서도 배낭 속에 꼭 넣어 왔다는 저항의 책 한 권처럼, 어떤 책들은 그 안에 기록된 내용을 넘어 그 자체가 하나의 발언이 되고, 질문이 되고, 물러설 수 없는 하나의 집념이 되기도 한다. 이 희귀한 만화책 <내가 살던 용산>이 그럴 것이며, 그림책 <파란집>이 그럴 것이며, 곧 나오게 될 미술인들의 기록집 <끝나지 않는 미술전>이 그럴 것이며, 이미 나온 르뽀집 <여기 사람이 있다>와 <이번에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가, 조약골의 음반 <용산에 가면 시대가 보인다>가 그럴 것이다.

참교육에 쓸 교재가 마땅치 않다고, 이 책을 보라.
정규직 노동자들이 연대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이 책을 읽고 토론해 보라. 먼저 누군가를 선도하겠다는 자신부터 제발 이 책을 보라. 정화의 눈물을 한소끔 정도 흘리고 나면 정신이 조금은 맑아지리라. 우리가 다가가야 할 꿈의 세계가 사실은 무척이나 단순한 꿈에 있음을 알게 되리라.

고맙고 정말 좋은 책 잘 보고도, 사실 글까지를 쓸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어느 시인이 당신 시집이 알라딘에서 팔리는 듯한데 무슨 이벤트까지 해주더라고 했다. 들어가 볼 일 없었던 알라딘에 가 보니 보리 출판사에서 <내가 살던 용산> 만화책과 그림책 <파란집>을 알리기 위해 용산 관련 한정판 엽서를 끼어주는 이벤트인 듯한데, 거기에 내 부끄러운 시집도 포함을 시켜놓았다. 잠시 황망했다. 내 책을 내준 출판사도 아니거니와, 다른 책들은 정말이지 용산을 위해 나온 연대의 책들인 반면 내 책은 그야말로 사사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맙고 영광이지만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운 일. 그런 마음들에 무어라도 보태야 한다는 어떤 빚짐과 책무를 느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책을 준비해 온 여섯 만화가분들과, 기획을 해 온 숨은 벗들, 그리고 용산 1주기인 1월 20일에 맞춰 이 책만을 위해 한겨레신문에 전면 광고를 내주며, 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용산을 기억하게끔 해준 고마운 보리출판사 분들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어줍짢은 글로라나마 세상에 알려라는, 그것이 앞으로도 내내 내가 써야 할 용산과 관련한 반성문이라는 생각이었다.

차지하고, 얕은 감식안이지만 이 책은 미학적으로도 히틀러와 나치의 광기를 다룬 아트 슈피겔만의 <쥐>나 팔레스타인 학살 현장과 보스니아 내전의 참혹함을 다룬 조사코의 <팔레스타인>, <안전지대 고라즈데>와 같은 세계적인 명작들에도 손색이 없다. 그것이 더 아프고 눈물난다. 그 끔찍했던 용산의 기억을,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의 꿈으로 다시 만나야 한다는 것이 가슴 아픈 책이다.

아우슈비치와 가자의 난민촌과 보스니아 전장의 무너져가는 공동체들과, 현재만 보더라도 세계적 공황 위기 속에서 일부 자본의 안락을 위해 고통을 전담하며 또 그렇게 수없이 ‘철거당해 가는’ 세계 민중들의 역사 속에서 용산의 참사가 세계적 보편성을 띠고 다시 만난다는 것도 슬픈 일이다. 하지만 다행이다. 30여년전 가난한 이들의 ‘철거’를 막기 위해 넘어선 안될 선으로 쳐진 문화적 전선이 조세희의 <난쏘공>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 정도였다면, 이제 우리는 만화와 그림과 시와 노래와 연극과, 미디어 등이 연대하여 총체적으로 학살의 징후에 대항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다시 이런 연대의 문화를 살려가는 것. 어떤 문화 상품보다 이들 책들이 고귀하게 만드는 것. 그것 또한 아직 끝나지 않은 용산을 향한 우리 모두의 투쟁이어야 할 것이다. <내가 살던 용산> 만화책과 그 자매 책들이 우리들의 소중한 서가에 더 많이, 곧게 꽂혀 있을 때, 그만큼 저 흉악한 독재자가 2009년 용산 학살의 책임을 지고 역사의 단두대에 서게 될 날은 그만큼 짧아질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제2의 용산, 제3의 학살을 막는 사회적 저항선이 될 것이다. 우리는 책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약속을 가슴 속에 새기는 것이다.

용산의 진실과 학살의 진상규명이 비로소 이루어지는 날, 그날이 오면 우리는 이 책들을 꺼내 그림 한 점, 글 한 줄씩을 어루만져보며 긴 소회에 잠겨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로서 이 만화책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된 2009년 용산참사 열사들에 대한 어떤 약속과 반성과 추모의 마음들을 고이 접어 저 하늘로 날려 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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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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