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대한 감옥 '예루살렘'
        2010년 02월 01일 10:0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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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2월, 오랫동안 팔레스타인 문제를 한국 사회에 알리기 위해 글과 행동과 실천, 그리고 진심어린 우애를 바탕으로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라는 모임을 만들어 활동해 온 소설가 오수연과 함께 몇몇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을 다녀왔다.

    함께 한 이들은 오수연을 비롯해 소설가 김남일, 시인 김해자, 문화평론가 강영희, 영화감독 남선호, 평화활동가 염창근, 다큐멘터리 감독 성혜란,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회원 한아름, 그리고 영화칼럼니스트이자 <레디앙> 문화담당 객원기자인 이안. 모두 아홉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분쟁의 현장에 발을 디디고 이루어지는 삶과 문화를 보고 느꼈으며 그 경험을 <레디앙> 독자들과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나누고자 한다. 문인은 그곳의 문인들과 만나 억압이 있는 곳에서 언어와 문학이 가진 힘을 이야기했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그곳 영화 관계자로부터 영상을 통해 이을 수 있는 교류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모든 명분을 떠나 사람과 사람이 만났다. 서로 음식을 나누고, 정을 나누었다. 그런 만남과 대화가 특별하게 여겨지도록 만드는 것은 모든 만남과 대화를 가로막는 이스라엘의 철저한 ‘봉쇄’ 때문이다. 이 ‘봉쇄’는 어디서 비롯된 것이고, 어떻게 강화되고 있으며, 앞으로 무엇을 얻기 위해 지속되고 있는지 우리 모두 알아야한다.

    우리 일행의 경험이 ‘봉쇄’에 낸 틈이 지금은 비록 크지 않더라도 앞으로 거대한 균열을 일으키기를 바라며 방문단의 글들과 시편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점령의 역사를 모른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엇을 알아야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과거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의 모습만으로는 그 사람의 겉만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모습만으로도 족하다고 할 때가 있지만 그건 과거가 중요하지 않거나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거나 과거를 잊고자 할 때의 이야기다. 더욱이 큰 아픔의 기억을 간직한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반드시 그 과거를 나누지 않으면 그를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땅에 대한 이해 역시 마찬가지다. 땅은 긴 세월 기후와 날씨의 변화를 맞이하며 자신의 모습을 만들었고 흙과 돌로 풀꽃과 나무들을 키워냈다. 그리고 흙과 돌로 집을 짓고 밭을 가꾼 수많은 인간이 돌아가며 그 땅을 일구는 동안 그 인간들과 함께 숨 쉬면서 묵묵히 그리고 고고하게 그 자리에 있던 공간 자체가 땅이다.

    팔레스타인의 땅에는 올리브나무들이 서 있고 겨울에도 오렌지가 영글며 돌로 지은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 땅의 풍경은 오랜 세월을 걸쳐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활의 기억과 그들이 살아낸 고난과 희열의 기억과 분리할 수 없이 이어져 있다. 그 땅이 파괴된다는 것은 과거를 송두리째 사라지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폭격을 당한 사람들의 아픔은 폭격으로 파헤쳐진 대지와 터전과 풍경과 직접적으로 이어진 것이기에.

    그러나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에 대해 아무런 역사도 모른다 하더라도 그곳에서는 땅의 파괴를 직접적으로 목격하게 된다. 그 땅에 그어진 수많은 경계들과 곳곳에 배치된 군인들 자체가 폭력적 파괴의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까지 그대로 묘사했다. 접근 금지의 위압적 분위기를 뿜어내는 통제 시스템은 팔레스타인 공간 말살 작업이자 일종의 과거 지우기였다.

       
      ▲ 동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점령촌들. 아름다운 팔레스타인 언덕의 숲을 없애고 마루에 점령촌들을 지어 점거하고 있다.

    예루살렘, 밀려나는 팔레스타인 도시에서 살아내다

    팔레스타인 친구들은 우리가 예루살렘을 갈 것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부러움의 눈길을 보냈다. 그리곤 마치 옛 연인이라도 떠올리듯 그리움을 담아 예루살렘에 대해 이야기했다. 많은 친구들이 짧게는 몇 년씩, 길게는 십 몇 년씩 예루살렘에 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예루살렘이 고향인 사람도, 그곳에 가까운 친지가 있는 사람도 그곳을 떠나온 후로는 다시는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의 과거가 가장 집약된 공간이며 가장 섬세한 기억을 지닌 공간이기에 예루살렘 가는 길은 적잖이 설렘을 주었다. 그러나 라말라에서 겨우 20분 거리의 예루살렘을 가는 일은 먼 여정을 채비하는 일과 같은 무게로 다가왔다. 20분 거리를 단절시키는 칼란디아 검문소가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검문소를 통과하기 위해 40분가량의 시간을 더 들였다. 콘크리트와 철골 구조물로 된, 딱 보기에도 삭막하기 그지없는 검문소를 통과하려면 쇠파이프로 된 통제용 회전문을 일렬로 4번이나 지나야 했고, 그러는 동안 검색대에 짐을 통과시키거나 검색을 당하고,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군인에게 신분증을 전한 채 갖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도시 단위로 고립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있었다. 장벽이었다. 검문소 인근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장벽은 사실 라말라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도시들 하나하나를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치고 있었으며 도시에서 나오려면 오직 검문소를 통과해야만 가능하게 해 놓았다. 라말라에서 나와 동예루살렘을 가는 동안에도 장벽들은 눈앞에 병풍처럼 펼쳐졌다.

    마치 거대한 감옥이 연상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옥이 오직 면회실을 통해서만 외부와의 만남을 허용하듯 장벽 속에서 외부로 나오려면 반드시 검문소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검문소가 문을 닫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멈춰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좁다란 샛길과 골목길을 돌고 돌아 몇 배의 시간을 더 들여야 했다.

    어렵사리 도착한 예루살렘은 역사 속의 도시를 증명하듯 장관이었지만 감옥이긴 마찬가지였다. 뉴시티는 완전히 유대인의 도시였고, 올드시티와 동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점령촌들로 가득했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지역으로 유대화했고 그 유대인을 지키기 위해 군인들이 간수처럼 사방팔방 상주하는 장소였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팔레스타인 땅이었기에 이 도시를 장악하는 과정은 팔레스타인을 밀어내기 위한 조직적 작업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국가 창설을 선언하자 나끄바 즉 대재앙이 일어났고, 이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의 78%를 점령했으며 예루살렘의 코앞까지 진격해 들어가 예루살렘 서쪽(서예루살렘)을 장악했다. 이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전체 마을의 50%가 넘는 531개의 마을과 도시가 파괴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난민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그들의 땅과 재산을 강탈했다.

    1967년 6월 전쟁에서는 예루살렘을 포함해 나머지 22% 땅마저 점령해 팔레스타인 전체를 점거했다. 곧바로 이스라엘 의회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도 선언했으며 예루살렘 장악 계획이 본격화되었다. 계획의 핵심은 예루살렘 지역에서 이스라엘 점령촌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예루살렘 시 경계를 크게 만들었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축소시켜 나갔다.

    올드시티에서만 6천 명을 추방하고 토지를 몰수해 유대인 지구를 만들었으며 자기들 민족의 상징인 ‘통곡의 벽’ 앞에 광장을 만들기 위해 135채의 팔레스타인 주택을 쓸어버렸다. 그런 다음 아랍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예루살렘 내부와 주변에 이스라엘 점령촌을 집중적으로 세웠다. 점령촌은 동예루살렘을 포위하면서 동시에 내부에서 균열을 가하는 전위대가 되었다.

    예루살렘 내외부에서 점령촌을 건설함으로써 예루살렘을 지리적으로 확장시킨 작업은, ‘예루살렘의 유대화’와 ‘인구 비율상의 우위’라는 목표 아래 자행된 집단적 폭거라고밖에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향후 국제적ㆍ정치적 문제들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계산된 정책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팔레스타인 마을이 파괴되거나 봉쇄되었고 아랍 사람들은 터전을 잃어야 했다.

       
      ▲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 유대민족의 상징인 이 벽 앞에 광장을 만들기 위해 이스라엘은 135채의 팔레스타인 주택을 쓸어버렸다.

    그렇게 예루살렘은 유대화되어 있었다. 올드시티 주변에는 솟아오른 이스라엘의 현대식 빌딩들이 예루살렘을 잠식하고 있었다. 올드시티 내에도 동예루살렘에서도 이스라엘 군인들은 총을 들고 포인트를 점하고 있었고 이스라엘 점령촌 건설은 거침없이 현재진행형이었다. 거리에는 유대인들이 통제받는 팔레스타인들 사이로 보란 듯이 떠들며 돌아다녔다.

    이제 예루살렘은 서안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가봤던 기억 속의 예루살렘이 아닐지도 모른다. 들어선 이스라엘 건축물들로 터전은 파헤쳐지고 옛 풍경은 사라져 더 이상 예전의 도시가 아닐 것이다.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제한된 아랍 지역에서 관광객을 상대하며 상품을 파는 꼴로 전락해 버린 듯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식민지 시민이라는 굴욕을 받더라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으려는 것만 같았다. 비록 관광객에게 상품을 파는 행위로 먹고 살지만 수많은 외국인을 향해서 팔레스타인이 담겨진 의상과 물건들을 내밀고 있었다. 점령 속에서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일, 땅도 집도 모조리 빼앗기는 현실에서 어쩌면 그것보다 팔레스타인의 영혼을 지키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존재하는 것 자체 안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몸짓은 감추어진 채 드러나고 있었다.

       
      ▲ 비록 관광객에게 상품을 팔며 살아가지만 점령 속에서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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