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와 연애하라!
        2010년 01월 25일 10:4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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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신당 성정치위원회가 특별한 온천을 준비했다. 올겨울 폭설과 한파로 꽁꽁 얼어붙은 10대, 20대의 몸과 마음을 찾아가는 이동식 스파(SPA-Sexuality Politics Academy)로 따뜻하게 풀어주겠다는 계획이다. 이번에 기획된 성정치 강좌는 총 여섯 차례에 걸쳐 진행되며, 강연 후기를 게재한다. <편집자 주>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오더니 오후 내내 그치질 않았다. 거기에 무턱대고 피어오르는 안개까지 겹치자 딱 ‘제법 운치 있지만 그다지 나가고 싶진 않은’ 날씨가 조성되었다. 이런 날, 집에서 빈둥거리면서 파전이나 부쳐 먹으면 좋으련만, 그래도 또 10대, 20대의 몸과 마음을 녹여줄 온천이라는데! 첫 강좌도 무척 재밌게 들은 터라 우산을 챙겨들고 한 번 더 온천 나들이에 나섰다.

    사람들이 약속도 잡지 않을 3시라는 애매한 시간과 운치 있는 날씨 탓일까, 첫 강좌만큼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어두운 조명과 적절한 온도, 소수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강좌는 시작되었다. 중간 중간에 사람들이 한 둘씩 더 오고 어느덧 사람들은 제법 늘어나 있었다.

    소수가 다수다, 나의 소수자 정체성

    최현숙 씨는 소수자가 다수라는 말에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소수자 정체성을 하나도 갖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 사람은 이성애자-남성-비장애인-백인-상류층-젊은 연령-뛰어난 외모 등의 특성을 갖춘 사람일 것이다. 월리보다 찾기 힘든 이 사람은 순수하게 수적인 의미로 봤을 때 분명 소수이다. 바꿔 말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든 적든 어느 정도의 소수자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소수자 정체성이 두 가지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말한다. 먼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소수자 정체성은 일종의 낙인으로서 부정의 대상, 극복의 대상이 되곤 한다. 소수가 다수라는 얼핏 역설적인 이 말은 소수자들에게 희망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그만큼 사람들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기제들이 다양하게 산재해 있다는 것 그리고 수적으로는 소수지만 권력적으로 다수인 사람들이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대학생들의 필수 교양이 되어가고 있는 스펙 쌓기는 자신의 소수자 정체성을 극복하기 위해 대학생들이 취하는 현실적인 전략인 셈이다.

    하지만 최현숙 씨는 소수자 정체성이 부정의 대상이나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저항의 지점, 변혁의 지점, 연대의 지점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나의 소수자 정체성은 살아가는 데 많은 불편함과 상처를 주지만 그만큼 나는 사회의 문제를 아프게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그만큼 타인의 불편함과 상처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자신의 소수자 정체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그것은 부정과 극복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저항과 연대의 기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소수자들이 모였다, 신명나는 선거판

    2008년 종로구에서 있었던 총선은 자신의 소수자 정체성을 저항과 연대의 지점으로 만든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다. 사회가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성소수자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보장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무관심과 스스로의 무관심 속에서 성소수자들은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최현숙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적도 아군도 분간할 수 없는’, ‘빈들에서 허공에 대고 외치는 느낌’의 상황이었다.

       
      ▲ 지난 18대 총선에 출마한 최현숙 후보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의 선거 출마는 그래서 더욱 의미를 가졌다. 자신의 소수자 정체성을 드러냄으로써 그녀는 다양한 소수자들이 연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많은 성소수자들이 모여 ‘성소수자정치세력화네트워크’를 조직하였고 평소 선거판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던 문화 운동 단체, 여성주의 운동 단체들도 함께 하였다.

    낙인을 드러내는 것에는 대가가 뒤따르는 법, 테러와 절망과 혈육들과의 단절이라는 예상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녀와 선본원들은 은폐된 차별과 억압을 커밍아웃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솔직하고 자유롭게 자신을 커밍아웃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스스로의 낙인을 드러내 보였다.

    또한 이 총선은 선거판에 성소수자가 최초로 당당하게 등장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선거판 자체를 새롭게 바꿔내는 선거운동이었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의미를 가졌다. 그녀와 선본원들은 중국의 티벳 강경진압 항의 집회, 장애인 노들야학 강의, 재능노조 투쟁 등 소수자들의, 소수자들을 위한 운동들을 벌여나갔고 선거의 내용과 방식에 여성주의적 고민이 담길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비당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선거자금 지원, 드랙(남성성, 여성성이 강조된 복장을 갖추고 하는 퍼포먼스) 등 기존 선거판에서는 보기 어려운 실천들도 잇따랐다. 참신하고 발랄한, 그러면서도 섬세한 고민이 담긴 선거운동은 경직된 선거판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였고 이 과정은 ‘커밍아웃 레즈비언의 정치도전기’라는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정치와 연애하라, 다양한 욕망들의 서사

    하지만 선거결과 지지율은 1.65%, 현실의 벽은 무섭도록 높고 공고했다(1.65%에도 기뻐하며 방방 뛰었다는 선본원들 덕택에 벽이 1.65cm는 내려갔겠지만 말이다). 소수자 정체성을 부정하고 극복하려고만 하는 사람들의 태도, 무관심, 정치에 대한 냉소는 과연 사라질 수 있을까?

       
      ▲ 지난 18대 총선에 출마한 최현숙 후보

    선거 이후 최현숙 씨는 종로구에서 노인 요양사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직접 집을 방문하여 노인을 보살피는 일을 50대 여성들인 동료 요양사들과 함께 하면서 그녀는 지역 속의 다양한 소수자들의 삶 속으로, 다양한 소수자들과의 연대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노인 요양사로 일하면서의 그 경험들을 토대로 그녀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소를 허물기 위한 정치를 다시 고민한다.

    정치란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을 상대에게 마구 쏟아내는 것이 아니다. 정치가 단 한 명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정치는 먼저 타인의 욕망을 민감하게 읽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상대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고민하고 그곳에서부터 작은 실천들을 도모해야 하는 것, 그것이 정치의 시작이다.

    물론 이런 일들이 쉽지 않고 사람들의 무관심도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현숙 씨는 마지막에 그냥 웃고 말았다. 어떻게든 나아지지 않겠냐고. 그래도 지금 많이 나아지지 않았냐고. 이런 것을 진인사 대천명이라 부르는 것일까.

    정치와 연애하라! 오늘은 정치와의 연애 그 첫걸음을 뗀 날이었다. 그 첫걸음은 타인의 욕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첫 강좌를 맡았던 엄기호 씨의 말대로, 연애에 있어 에피소드의 연쇄가 아니라 내러티브적 서사가 개인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면, 정치와의 연애에서 타인의 욕망은 하나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내러티브적 서사의 구성요소가 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타인의 욕망이 나의 욕망과 만나고 그/녀들의 욕망들로 이어질 때, 그렇게 욕망들의 서사를 만들어나갈 때, 우리의 정치와의 연애가 너와 나의 그리고 사회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 커밍아웃 레즈비언 국회의원의 꿈과 욕망이, 나와 당신과 그/녀들의 꿈과 욕망으로 이어질 날을 살짝 기대해 보면서, 나는 두 번째 온천 나들이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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