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파리를 낭만의 도시라 했나"
        2010년 01월 25일 10:21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프랑스식 윤리경영. 선진 노사관계를 구현하겠다더니, 한국의 노동법을 준수하고 한국의 문화를 존중하는 차원이라며 퀵서비스로 날려 보낸 해고통지서라니. 작년 10월부터 이어온 발레오공조 천안공장의 청산에 맞선 투쟁은 이제 파리 한 가운데에서 큰 함성으로 울려 퍼지고 있다.

    19일 정원영 민주노총 충남본부장을 선두로 이택호, 김태년, 김현종, 이대우 발레오공조 노조원과 심의혁, 정혜원 금속노조원들로 구성된 7명의 원정투쟁단이 2차 파리 투쟁의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미 1차 원정의 경험이 있는 투쟁단은 여전히 강한 결의와 용기가 얼굴에 서렸다.

       
      ▲ 출근 투쟁 중인 발레오 원정단

    주변에서 한 공장에서 20년이나 일했으면 감지덕지하라고, 노조 때문에 회사 경영이 어려워진 거라고 말할 때,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는 이들은 1차 원정에서 이미 다 봐버렸다.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발레오 공장은 20년 내내 흑자를 냈었고, 그건 너희들의 선진경영 마케팅 덕분이 아니라 짧게는 10년, 그리고 20년씩이나 청춘을 오롯이 바쳐 일한 자신들의 덕분이라는 걸.

    게다가 프랑스는 회사청산 절차에 노동자들의 의견이 반드시 반영되어야 하며, 사측은 모든 사회적 책무를 이행하여 노동자들의 이후 삶에 대한 준비를 같이하며 법적 절차를 밟아야함을. 그래서 1차 투쟁 때 프랑스 최대노총 CGT와 발레오 노조 공동투쟁 결의문을 채택하며 이 모든 해결의 책임은 발레오 본사가 져야함을 분명히 한 바 있다. 

    19일 어둠이 내린 파리에 도착한 원정단은 지친 여독을 풀기는커녕, 짐도 풀지 못한 채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파리에 있는 여러 활동가들과 함께 그간의 일정 보고와 이후 투쟁 계획서를 점검하고 토론하였다.

       
      ▲ 본사 앞 출근 투쟁

    원정단의 매일 아침은 발레오 본사 앞에서 출근투쟁으로 시작한다. 동이 트기도 전에 본사 앞에는 사방팔방 모든 골목에 사측 경비대가 무전기를 들고 진을 치고 있었다. 사측은 직원들을 굳게 닫힌 정문 대신 옆의 좁은 현관문으로 출근시켰다.

    어둠을 뚫고 노란 조끼를 입은 투쟁단이 새벽 가로등 불빛을 뚫고 힘차게 달려왔을 때, 당황하고 정신없는 건 경비대였고, 원정단은 일사분란하게 플래카드를 내걸고 벽보를 붙이고 출정식을 진행했다. 유인물을 나눠주고 이미 얼굴이 익은 이들과는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밤새 연습한 불어로 구호를 외쳤으며 길을 가던 이들도 낯선 동양인들이 외치는 불어 구호에 귀를 기울였다.

    비가 와도 출근투쟁은 쉼이 없다. 비를 맞으며 노래하고 구호 외치고, 한 사진작가는 정말 인상적인 모습이라며 연신 사진을 찍어 간다. 아예 자리를 깔고 길게 투쟁하는 날에는 반자본주의신당(NPA) ‘동지’들이 격려 방문을 하기도 하였다.

       
      ▲ 세제테와 회의 중

    21일은 출근투쟁 이후 CGT 금속노조의 자동차 분과 및 전문가 간담회가 이어졌다. CGT 국제책임자인 크리스챵 필리쇼스키 및 미셀 듀크레 자동차분과 위원장, 프랑스 발레오 노조간부인 파스칼 기네, 르노공장 노조간부들과 함께한 회의에서 발레오 그룹의 구조조정은 그룹의 발전을 위한 전문 분야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비 절감을 위한 구조조정이며, 현재 경제위기와는 관련 없는 내용임을 확인하였다.

    회의에 참석한 발레오 소속 회계사 쟈크 앙드레(가명)는 세계 경제위기를 빌미로 비정규직을 우선 구조 조정하여 그룹에서 비정규직 비율이 15%에서 6%대로 낮춘 다음, 정규직을 추가로 구조조정하고 이를 다시 비정규직으로 채워 15%대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아직 회사에서 책정한 구조조정비를 다 쓰지도 못했는데 이미 구조조정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이런 정책은 해고가 어렵고 강력한 노조투쟁이 예상되는 프랑스, 스페인, 이태리 등 유럽국가를 피해 한국 등 아시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정보를 전해주었다.

    회의에 참석한 각 노조 대표와 전문가들은 이러한 발레오 그룹의 구조조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연대투쟁이 중요하며, 연대체계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에 결의를 모았다. 그래서 다가오는 27일에는 프랑스 발레오노조, 자동차노조와 금속노조가 발레오 원정투쟁단과 함께 집회를 강행하기로 하였다.

       
      ▲ 사진=박지연

    한편 21일 오후에는 공무원노조 파업 시위가 리퍼블릭광장에서 시작되었고 원정단은 풍물패를 조직하여 선전을 시작하였다.

    공무원노조 파업은 사르코지 정부가 줄기차게 강행하는 공공기업의 민영화와 경영합리화를 빌미로 무차별적 인원감축에 항의하기 위한 투쟁이다. 2007년 이후 10만 명이 감축된 공무원은 2010년에는 3만4천 명이 추가로 해고가 예상되고 특히 병원의 민영화(레디앙 기사 5월 14일)와 교원 감축은 흰가운을 입은 의료진들과 학생들 교사들이 만여명의 대열을 만들며 가두 행진을 하였다.

    발레오 풍물패 어울림 출신의 원정단은 색동이 그려진 검은 풍물옷을 입고 꽹가리를 울리고 북을 치고 장구를 두드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고 신나든지 모든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 바라보았고 온갖 카메라 세례와 언론들이 관심을 집중시켰다.  

       
      ▲ 벤사이드 추모식에서 유인물 나눠주고 있다 (사진=박지연)

    반자본주의신당 대변인 올리비에 브장스노의 손을 잡고 온 그의 어린 아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자리를 뜨지 못했다. 풍물패에 몰려온 이들에게 유인물을 나누고 몸벽보를 들고 선전을 담당한 이들은 늘 국제연대의 실천적 행동의 모범을 보여주는 반자본주의 신당 당원들이 도맡았다.

    풍물패는 손이 부르터지도록 쉬지 않고 소리를 울렸다. 하루에 두세 시간밖에 자지 못하는 강행군에 눈 밑의 다크서클이 보는 이들의 맘을 짠하게 만드는데도, 매서운 날씨에 땀을 흘려가며 북을 들고 이리저리 시위대를 헤집으며 풍물을 울렸고, 어떤 이들은 추임새로 어떤 이들은 춤으로 화답하였고 한 젊은 여성은 풍물 리듬에 ‘털기춤’을 추는 신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 벤사이드 추모식 (사진=박지연)

    1월 23일에는 지난 해 2월 17일 <레디앙>과 반자본주의신당에 관한 인터뷰를 통해 그의 정치철학을 이야기 한적 있는 다니엘 벤사이드 추모식이 있었고, 원정 투쟁단은 그간의 연대에 답하기 위하여 조문단으로 참석하였다.

    10대 때부터 혁명운동에 가담하며 혁명적공산주의연맹(LCR) 시절부터 알랑 크리빈과 함께 당의 이론가로서 오늘의 NPA를 탄생시킨 벤사이드는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 왔던 병마로부터 1월 12일 우리들 곁을 떠났다.

    교조적 마르크스주의를 경계하며 평생을 정치와 철학이론에 전념하며 LCR의 정치국 위원으로 파리8대학 철학교수이기도 한 다니엘 벤사이드는 한국에서도 『저항, 일반 두더지에 대한 시론』 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작년 <레디앙>과 인터뷰 당시 올리비에 브장스노와 공저로 쓴 『정당을 만들자』 라는 신간을 헌사받은 것이 마지막 책일줄 알았는데, 위독하게 병마와 싸우는 1년 동안에도 쟈크 랑시에, 알랑 바디유, 슬라예보 지젝과 함께 <민주주의>에 관한 책을 내고, 최후 유작으로는 『마르크스, 사용설명서』를 남기는 등 막시스트 철학가로서, 혁명적 이론가로서의 자신의 책무를 끝까지 완수하였다.

    추모식에는 올리비에 브장스노, 알랑 바디유, 알랑 크리빈을 비롯해서 세계 각국의 활동가들이 그를 기념하기 위해 참석했으며, 칠레 영화감독 카르멘 카스틸로는 칠레 혁명운동에 그가 얼마나 공헌했는지를, 4차 인터내셔널의 프랑스와 사바도는 그가 베트남 반전 운동과 체 게베라와 함께 한 혁명운동에 국제주의자로서의 도움을 열거하였다.

       
      ▲ 지지 시위 중인 NPA 당원들

    발레오 원정단 또한 추모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헌사하고 다니엘 벤사이드의 뜻을 기렸다. 2천여 명이 모여 추모식을 거행하는 메종 드 라뮤츄엘 앞에는 극우파 청년들이 대열을 형성하여 진을 쳤고, 이에 맞서 NPA 청년들도 경찰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맞서는 풍경이 연출됐다.

    매일 허리띠 구멍을 줄여도 바지가 자꾸 흘러 내려 걷기가 불편한 정원영 본부장, 5kg나 빠져 몸이 가볍다는 쓴 농담의 이택호 발레오 지회장. 발레오 본사 옆에 있는 개선문은 구경도 못해봤고, 에펠탑 같은 건 사진도 못 찍어봤다. 한국에 두고 온 동지를 생각하며 시간을 쪼개고 쪼개며 투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NPA의 아시아 담당 나탈리가 왜 한국에서 쌀이며 라면을 사가지고 왔느냐고, 여기 중국가게에서 살수 있다는 질문에, 장보러 갈 시간조차 없다는 이들의 대답에 모두들 숙연해진다.

    내일은 발레오 공장에, 그 다음날은 르망 공장도 방문할 예정이다. 콘티넨탈에서 파업 중인 노조도 공장을 방문해 달라하지만 일정이 허락하지 못할 지경이다. 누가 파리를 낭만의 도시라 했는가. 그저 원정투쟁단에게 파리는 투쟁의 도시고 함성의 중심일 뿐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