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주의, 그 반동성을 말한다
        2010년 01월 24일 10: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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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사진=레디앙)

    제 글에 대해서 가끔가다 "한국 민족주의를 비판한다"는 딱지를 붙이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저로서는 그게 좀 억울합니다.

    사실 좌우 전후의 맥락을 떼놓고 ‘민족주의를 비판한다’는 것이 다소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근대사를 약간이라도 공부해본 사람이면 다 압니다.

    민족주의 비판의 부질없음

    민족주의(nationalism)란 ‘근대’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근대 세계의 주된 이데올로기죠. 근대성의 이념적 좌표에서는 ‘민족주의’와 거의 비중이 비슷한 개념들은 ‘규율’이나 ‘위생’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면 ‘규율’을 추상적으로 비판하는 건 의미가 있을까요?

    노동자에게 무조건 무급 잔업을 시키는 직장의 규율주의적 분위기, 학생들을 모아놓고 ‘훈화’로 괴롭히는 교장 선생님을 당연히 비판할 수도 있고 해야 하지만, 제가 맨날 타는 지하철이 규율을 지키지 않고 너무 늦게 와버리면 영하 10도의 혹한 속에서 그걸 기다려야 하는 저부터 항의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특히 억압성이 짙은 자본 중심의 규율주의는 비판 대상이 돼도, 우리가 아예 대도시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규율, 시간표라는 근대적 의미축을 비판해봐야 별로 얻어지는 바 없습니다.

    ‘위생’도 마찬가지죠. 툭하면 ‘유행병’이라 하여 백신을 맞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될 수도 있지만, 저도 제 자식에게 식사 전에 손을 씻는 버릇을 들이느라 땀을 많이 뺐어요. ‘위생주의’는 나빠도 각종 화학성분의 물질들을 접해야 하는 대도시에서는 기초 위생은 그냥 불가피한 ‘자구책’에 속합니다.

    ‘한국인’이라는 유일한 이유로 김연아가 일본 계통의 경쟁자를 눌러 이겨야 한다고 응원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생산적 기능이 없는, 즉, 역기능만 발휘하는 ‘민족주의’의 한 교과서적 사례입니다. 도대체 이 젊고 기술이 대단한 ‘규수’들이 서로 나라 이름을 내세워 ‘경쟁’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저로서 이해가 안가기 때문이죠.

    뭐, 그냥 본인도 즐기면서 남들을 예쁜 빙판 위의 춤으로 즐겁게 해주면 그만이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런 식의 ‘민족주의’는 백해무익이라 해도 근대 국민국가가 만들어낸 민족의 객관적 실체를 당연히 무시 못하죠.

    ‘난쏘공’과 뉴타운

    어릴 때부터 표준화된 국어를 ‘모국어’로 익힌 근대인은 사투리들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 민초 문화도 외국 문화도 어디까지 ‘타자’로 취급할 수 밖에 없는 한편, ‘우리'(국민 국가의 표준적 언어, 이념 등을 담은) 신문, 영화, 소설 등을 섭취하면서 자랍니다.

    즉, (대한민국 테두리 안에서 국가화된) 민족(국민)의 일원으로 자라게 되는데, 이는 무시 못할 객관적 사실이죠. 좌파의 입장에서는, 이 사실을 긍정시만 못합니다.

    표준화된 국어부터 참 무서운 무기입니다. 예컨대 <한겨레>마저도 요즘 탈북자들을 다시 한 번 ‘귀순자’라고 일률적으로 표기하는데, 이는 국제법상 엄연히 독립적 국민국가인 북한을 남한에 대한 ‘반란 집단’으로 다루는 무의식을 만들어내는, 아주 나쁜 어법입니다.

    그런데 일면으로는 국문학을 섭취하는 과정에서 조세희 선생의 『난쏘공』을 한 번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뉴타운’ 같은 단어를 듣기만 하면 벌써 그 실체를 파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근대 민족/국민 문화가 형성되는 것은, 일면으로 좌파 사상의 대중적 착근의 길일 수도 있죠. 민족/국민 문화의 공간은 늘 이념적 투쟁의 공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근대 국민국가들의 세계에서 민족이란 비판만으로 상대할 수 없는 객관적 실체라면, ‘민족주의’의 정치적 함의는 국제 자본주의 체제의 당면 상황, 그 체제 속에서의 해당 국가의 위치와 역할, 그 체제 핵심부와 해당 국가의 관계 유형, 그리고 해당 국민국가의 지배형태 및 계급투쟁의 현 상황 등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즉, 민족의식/민족주의란 그 자체로서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고 각종 국내외적 투쟁 상황에서 그 관계적(상대적) 의미를 득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게 바로 사물의 변화무쌍함, 불변하는 현실이 존재하지 않다는 걸 직시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변증법적 접근입니다.

    민족주의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

    예를 들어서 100년 전에 세계체제 핵심부의 영미의 대리자로서의 일본에 의해서 잠식되어가는 세계체제 낙오자 조선에서는 신생 민족주의는 – 그 국가주의, 내재적 남성우월주의 등등 그 모든 불가피한 폐단에도 불구하고 – 당연히 일정한 진보성을 담지했죠.

    안중근의 머리 속에서 ‘황인종과 백인종의 영원한 싸움’ 등등 온갖 반동적 이데올로기들의 편린들이 다 뒤섞여 있었지만 이토를 쏜 권총은 객관적으로는 이토를 열렬히 응원했던 영미권의 ‘주류’도 쏘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조선에 대한 가해는 일본만의 가해가 아니고 세계 자본주의 체제 전체의 가해라는 걸 깨닫게 되는 가장 뛰어난 민족주의자들은 나중에 이동휘, 김철수, 김명식처럼 다 공산주의로 전환하죠.

    공산/사회주의가 보급된 1920년대 이후의 조선 민족주의는 대체로 보수화되고, 신채호처럼 가장 격렬하고 비타협적 사람들이 아나키즘으로 전환하고, 김원봉처럼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가는 아나키스트들이 또 공산주의에 근접하지만, 그래도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구상에는 진보적 함의는 좀 남긴 하죠.

    민세(안재홍)의 민족국가 구상(초계급적인 통합민족국가를 건설을 주장함-편집자) 같으면, 공산주의자들도 충분히 그 투쟁을 펼 수 있는, 그런 ‘새 나라’였다는 것이죠. 문제는, 민세나 만해 같은 ‘착한 민족주의자’들이 민족진영의 실세가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나라 없는 시절이라 해도 구체적인 시기, 민족주의의 분파마다 그 정치적 함의는 많이 달라집니다. 대체적 추세는 민족주의의 보수화, 그리고 온건 민족세력의 친일화임에도 말씀입니다.

    그러면, 지금 같으면 과연 어떨까요? 이 이야기를 나중에 몇 차례에 걸쳐서 자세히 쓰려고 하지만, 축약시켜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날에는 대한민국에서는 ‘민족주의’란 세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좌파적 민족주의자들의 위험성

    1.

    혈통적 민족주의 – 모든 혈통적 조선인(남북한인, 각종 교포 포함)에 대한 소속/충성 의식을 가지며 관련 사업을 추진하는 형태. 이와 같은 분들은 교포 관련 사업을 추진하는 단체에서 가끔 만나볼 수 있는데, 전체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소수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묵시적 국시’상 가난한 교포(재러, 재중 교포)들은 저임금 노동력과 해당 국가로의 자본 침윤의 도구 이상의 의미는 없으며, 부유한 교포(재미, 재일)의 ‘주류’ 사회에의 진출과 이에 따르는 ‘주류화’, 즉 탈민족화를 거의 비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분들도 소수자이긴 하지만, 대한민국에서의 외국인 노동자의 다수가 혈통적 조선인이 아닌 오늘날 현실에서 혈통적 조선인을 특권화시키려는 이런 분들은 과연 ‘진보’인가요? 저는 전혀 아니라고 봅니다.

    2.

    북한을 중심으로 하는 ‘자주주의적’ 내지 ‘통일지상주의적’ 민족주의 –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주사파’뿐만 아니고 ‘반미 자주통일’을 외치는 보다 광범위한 ‘좌파적 민족주의자’들도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세계체제의 핵심부를 상대로 하는 이 분들의 일부 요구사항 – 미군 철수나 북한에 대한 미-일-한의 공격적 태도의 철퇴 등 – 은 객관적 의미에서 일정한 진보성을 담지한다고도 볼 여지가 없지 않지만, 문제는 이 분들이 세계체제 속에서의 갈등의 축을 ‘계급’이 아닌 ‘국가/민족’으로 잡는 데에 있습니다.

    즉, 이 분들이 북한이라는 국가에 친근한 입장에 서며, 미국/일본이라는 국가들을 반대하지만, 이 입장 속에서는 북한의 민중도 미/일의 민중도 그 어떤 독립적 변수가 안 되죠.

    개별적 요구는 외형상 ‘진보적’일 수는 있지만, 이러한 입장의 골자는 어디까지나 자국 일본을 ‘무산계급성의 국가’로 보고 세계적 투쟁의 축을 ‘일본/일본을 맹주로 하는 아시아 대 백인들의 부유한 나라’로 설정한 기타 이키(北 一輝) 류의 전전의 일본 극우파와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즉, 이 그룹 자체는 ‘진보적’이긴커녕 어찌보면 일반적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보다 더 위험한, 파쇼적 성질의 사람들이라고 봐야겠습니다.

    3.

    남한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주의적’ 민족주의. 이는 극우/보수파는 물론이고, ‘시민’을 내세우는 노빠류의 자유주의자나 "대한민국을 인정하자"는 국산 사민주의자들의 공동분모입니다. 물론 미국의 군사적 보호령이자 준주변부의 비교적으로 작은 국가인 대한민국이 세계체제의 핵심부에 의해 ‘침탈’을 당하는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민족주의도 외피적 차원에서는 약간의 ‘진보성’을 띨 수 있긴 하죠.

    예컨대 지난 번에 미국산 쇠고기를 둘러싼 난리를 상기해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아랍에미레이트에 어쩌면 재앙이 될 원전이나 팔고, 인도 오리사주에서 토착민들을 추방시키는 제철소나 짓는 오늘날 대한민국은 종합적으로 봤을 때에 ‘피해자’라기보다는 ‘중간 사이즈의 가해자’에 더 가깝다는 데에 있죠.

    한국 자본이 미 제국의 보호막 하에서 전세계에서 노동력 착취, 자원 갈취, 시장 침투 등을 감행하는 오늘날 상황에서는 이 형태의 민족주의는 불가피하게 ‘제국주의적’ 특색을 띠게 돼 있습니다. 뭐, 유시민씨와 같은 대표적인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객의 이라크 파병 관련 입장의 변천사를 고찰해보시면 대체로 뭔 말인지 아실 거에요. 아주 재미있는 연구대상입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자의 임무

    위에서 고찰한 바대로, 실체로서의 ‘민족’은 상당한 양가성을 지닌다 해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3 가지 류의 민족주의 중에서는 – 비록 특정 요구가 정당할 수도 있지만 – ‘진보적’ 민족주의란 전무합니다.

    그러니까 민족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이상 민족주의가 어떤 형태로든 노동계급의 운동에 영향을 미칠 사실을 인정할 수는 있지만, 민족주의의 부정적 함의에 대해 대중적 관심을 촉구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사회주의자의 임무입니다.

    이는 추상적인 ‘민족주의 비판’과 다른 입장이고, 어디까지나 ‘지금, 여기에서의’ 민족주의의 의미를 중심에 두는 입장이죠. 민족주의는 꼭 ‘반역’만은 아니지만, 오늘 여기에서는 그렇게 볼 여지는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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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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