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소득은 21세기 보통선거권
        2010년 01월 22일 11: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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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의 기본소득 운동가와 연구자들의 집단인 기본소득네트워크를 중심으로 결성된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 조직위원회(위원장 강남훈 기본소득네트워크 대표)는 오는 27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서강대학교에서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경향신문, 라디오21, 레디앙, 레프트21, 매일노동뉴스, 민중의소리, 오마이뉴스, 참세상, 프레시안, 프로메테우스, 한겨레신문사 등이 후원하는 이번 대회에는 기본소득네트워크를 비롯해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전국교수노조, 민주노총, 사회당 등 국내 20여 개 단체 및 정당이 참가한다.

    아래 장석준의 글은 이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인 것으로, 진보신당의 공식 당론이 아니라 필자 개인 입장이며, 진보신당 안에서는 기본소득제에 대한 토론이 계속 진행 중이다. – 편집자 주

    1장. 21세기 대안사회의 가치 – 민주주의의 예외 지대들을 무너뜨리기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를 시작으로, 지난 30여 년간 전 지구를 호령하던 초국적 금융 주도 자본주의가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다. 한 세대 넘게 인류의 유일한 교과서 역할을 하던 신자유주의 교리들이 이제는 모두 의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과는 다른 대안을 제출하지 못한다면, 지구 자본주의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게 될 것이다.

    도대체 그런 대안이 존재할까? 답은 부정적이다.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작동하기 힘들지만, 케인스주의로 돌아가는 것도 답이 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 반혁명의 원동력인 지구화․금융화된 거대 자본의 힘은 지난 30여 년 동안 더욱더 강대해졌다. 과거 일국 케인스주의의 낡은 레코드판을 다시 트는 것만으로는 이들의 고삐 풀린 힘을 제어할 수 없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런데 제3의 선택지는, 적어도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지구 자본주의는 분명 막다른 골목에 서 있다.

    선택이 강요될 것

    이런 상황이 일, 이 년 안에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재난영화 식의 급박한 대붕괴도 비현실적이다. 좀처럼 출구를 찾지 못하면서 곤란과 긴장이 점점 가중되는 상황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 같다. 마치 20세기 초에 영국 주도 자본주의 질서의 붕괴 이후 전 세계가 한 세대에 걸쳐 혼란과 재편의 혹독한 시대를 겪었던 것처럼, 우리 앞에 놓인 미래 역시 기나긴 혼돈(chaos)의 시대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다가 산업 자본주의의 장기 지속이 초래한 생태 위기(화석 에너지 고갈, 식량 생산 위기, 기후 변화 등)를 더하면, 혼돈의 크기는 더욱 가늠하기 힘들다.

    이런 때일수록 현존 자본주의 자체를 넘어선 근본 대안을 다시 따져보아야 한다. 기나긴 혼돈의 시대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실현]냐 야만이냐’는 선택을 현안으로 만들 것이다. 현 체제를 뛰어넘는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든가, 아니면 지금보다도 못한 퇴보와 절멸로 향하든가.

    20세기의 경험이 말해주듯, 전자를 실현하려는 힘이 강력하지 못하다면, 역사는 반드시 후자의 방향으로 흐르고 말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 실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현 체제를 뛰어넘는 이상과 이에 바탕을 둔 거대한 운동들이 성장해야만 한다.

    그럼 우리가 지향해야 할 근본 이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민주주의의 확대와 심화다. 사회 경제 영역으로까지 민주주의를 확장하여 이에 따라 현존 자본주의의 근본 구조를 바꿔나가는 것이다.

    전지구적 민주주의혁명의 재개

    이것을 좀 더 도식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1인 1표’다. 이제 전 세계적으로, 좁은 의미의 정치 영역에서 1인 1표제를 실시하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다. 하지만 또한 어느 나라에서나 이 좁은 영역 바깥에서는 1인 1표 원리가 현실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생산 단위를 지배하는 것은 1인 1표가 아니라 1주 1표다. 시민권이 아니라 소유권이 지배하며, 더 많은 소유가 더 많은 지배로 귀결된다. 즉, 사람이 아니라 자본이 주인이다.

    경제 전체에서는 이것이 1원 1표 원리로 나타난다. 이 경우에도 결정권은 시민권이 아니라 소유권과 연동된다.

    바로 이 1주 1표와 1원 1표 원리를 극단화해서 결국은 1인 1표의 제한된 실현조차도 축소하고 무력화시키려는 것이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 반혁명’의 핵심 목표 중 하나였다. 오늘날 이 반혁명의 헤게모니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우리가 고민하고 실현해야 할 것은 정반대 목표다.

    즉, 신자유주의 반혁명의 태동 이전에도 역시 1인 1표 원리의 예외 지대로 남아 있던 1주 1표 및 1원 1표의 지배 영역으로까지 1인 1표제의 지배권(圈)을 확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자본주의 현실 앞에서 오랫동안 지연되고 소강 상태에 빠져 있던 ‘전 지구적 민주주의 혁명’을 새롭게 재개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럼 과연 어떠한 구체적인 방식으로 민주주의의 승리의 행진을 다시 시작하고 이를 지속시킬 것인가? 현실 사회주의의 결산이 극히 부정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1주 1표의 현실을 공략할 새로운 방식들(관료적 국영기업이나 명령 경제가 아닌)을 고민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이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다. 이 글의 주 관심은 1원 1표의 현실에 도전할 전략들에 있다. 즉, 21세기에 보편 복지(universal welfare)를 실현할 전략들 말이다.

    2장. 21세기 보편 복지를 위해 20세기로부터 계승해야 할 것과 새로 보완해야 할 것

    1원 1표의 현실을 교정하는 데는 크게 세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모두 기존 복지국가에서 일정하게 실현되었던 것들이다(Purdy, 1994).

    그 첫째는 사회 서비스(social services)다. 보건의료와 교육 같은 필수 서비스 영역을 탈상품화하는 것. 다르게 말하면 이들 영역을 1원 1표의 지배권(圈), 즉 시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1인 1표의 원리에 따라, 즉 시민권에 따라 누구나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반면 그 자원은 누진 과세로 확보한다. 결국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부의 재분배가 이뤄진다.

    둘째는 사회적 규제(social regulation)다. 대표적인 것이 최저임금제나 단체협상이다. 법으로 최저임금을 정하거나 노사협상으로 임금 수준을 결정하게 해서 일정 수준의 임금 소득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경제활동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임금 소득자들에게 시장에서 행사할 투표권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분배한다는 이야기다. 투표권이 시민권과 직접 연동되지 않는다는 점 자체는 변화하지 않지만, 투표권의 불평등한 분배 자체는 부분적으로 시정된다.

    셋째는 사회 소득(social transfers, 직역하면 사회적 소득 이전)이다. 위의 방식이 노자 관계의 규제를 통해서 투표권을 특정하게 분배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아예 노자 관계 바깥의 조치들을 통해 투표권을 분배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시적으로 혹은 연령에 따라 노자관계에 참여할 수 없게 된 이들을 위한 사회보험(고용보험, 공적 연금 등) 급여(contributory social insurance)나, 노자관계에서 배제된 이들을 위한 사회부조 수당(means-tested social assistance) 등이 그것이다. 또한 노자관계 참여 여부와는 상관없이 상당히 보편적인 기준에 따라 지급되는 아동수당과 같은 제도(demogrants)도 있다.

    후퇴한 사회복지, 제한된 사회복지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에는 위의 세 방식 모두 해체의 위협을 받았다. 서유럽 국가들의 경우에는 부분적인 축소에도 불구하고 그 골격이 유지되었지만, 미국과 그 밖의 모든 나라들에서는 골격 자체의 해체가 뒤따랐다.

    기존의 성취가 와해되었다는 사실 외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복지제도의 성취가 지리적으로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유럽 국가들은 그나마 신자유주의 반혁명이 시작되기 전에 복지국가를 건설했지만, 다른 나라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들은 이 상태에서 지구화․금융화의 30여 년을 맞이했다.

    이 기간 동안에는 기존 복지국가조차 위협받는 상황인지라 그 지리적 확산은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선진국 중에서도 일본과 같은 나라는 (서유럽 수준의)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우리는 보편 복지를 향한 위의 세 가지 전략들을 다시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 특히 사회 서비스 전략은 적극적으로 (재)추진해야 한다.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NHS)나 스웨덴의 강력한 공공부문,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는 프랑스나 독일의 공교육 체계는 여전히 훌륭한 모범 사례다. 이러한 성취들은 다른 많은 나라들에게는 미래의 절실한 도전 과제들로 남아 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세기식 방법으로는 어렵다

    하지만 사회 소득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20세기 복지국가에서 추진해온 방식 그대로는 재추진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제와 단체협상, 사회보험과 사회부조를 배합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시장에서 투표권을 민주적으로 분배할 수 없게 됐다. 아주 근본적인 문제가 전면에 등장했다.

    20세기의 방식은 대다수 시민이 소득의 대부분을 임금으로부터 얻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완전고용의 수준에까지 정규직 일자리를 공급하고 그래서 대부분의 가계가 가장(대개 남성)의 정규직 노동을 통해 괜찮은 수준의 임금 소득을 확보하는 사회를 전제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소득은 기본적으로 보완적이고 잔여적인 제도의 성격을 갖게 된다. 생애 전 기간에 소득의 대부분은 가장의 임금 소득에서 비롯되고, 사회보험 급여는 일시적 위기 시기나 은퇴 후 기간 동안 이것을 보조하는 역할만을 한다. 또한 사회부조 수당은 이런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예외적인 수단이 된다.

    이런 체계는 2차 대전 후 30여 년간의 서구 자본주의 황금기 동안에는 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황에 도달했고,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도 상승했다. 사회보험이나 사회부조는 소득보조제도로서 제 역할을 다했다. 물론 이 때에도 눈에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 모순은 이미 존재했다. 가장 임금이라는 전제 뒤에는 여성의 소외가 존재했고, 사회부조는 유색인 등 프롤레타리아 최하층을 관리하는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어쨌든 전반적으로는 잘 돌아가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1970년대 이래로 실업이 증가하고 비정규직 일자리가 늘어났다. 이것은 상당 부분 자본의 새로운 전략, 이른바 ‘노동의 유연화’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본의 전략적 선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이 존재한다. 사실 자본이 이러한 새로운 전략적 선택을 하게 된 상황 자체가 이 근본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맑스가 ‘사회적 총 필요 노동 시간의 감소’라고 말한 그 문제다.

    생산력의 전반적인 증가로 사회 전체에 필요한 노동 시간의 총량은 계속 줄어든다. 그런데 자본은 인건비 지출을 줄이는 방향에서 이에 대응한다. 즉, 인구 전체에 대해 노동 시간을 새롭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규직 일자리를 줄여서 실업을 늘리고 반실업 상태의 노동자들(비정규직)을 확대한다. 그래서 경제가 성장을 멈추거나 축소된 것은 아닌데도 일자리는 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드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현상이다. 물론 그렇다고 질 나쁜 일자리의 증가가 일종의 자연 현상이라는 것은 아니다. 노동 시간의 왜곡된 분배는 반드시 철폐해야 한다. 우선 질 나쁜 비정규직 일자리를 다시 정규직 일자리로 전환시켜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축소된 사회적 총 필요 노동 시간을 인구 전체에 새롭게 분배해야 한다. 즉, 개별 노동자의 노동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그렇게 해서 더 많은 일자리를 공급해야 한다.

    필요노동시간 감소와 기본소득

    하지만 그렇다고 사회적 총 필요 노동 시간이 줄어든다는 사실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과거 정규직 노동자가 수행하던 정도의 노동 시간과 연동된 임금 소득이 가계 소득의 대부분을 구성한다는 전제와, 이러한 현실 변화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이 간극으로부터 우리는 이제까지 소득과 임금 노동 사이에 존재하던 연계를 재고해봐야 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것이 바로 기본소득제(Basic Income scheme)가 21세기 보편 복지의 필수 구성 요소로 떠오르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21세기의 대안 사회에서는 각 개인의 생애 소득 중 상당 부분(기본 생계 유지와 연동된 실질적인 수준)을 임금 소득이 아니라 시민권 자체와 연결시켜야 한다. 물론 생애 소득 중 또 다른 많은 부분은 여전히 노동으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시민이 보편적으로 시민권 자체에서 비롯된 소득을 제공 받아야 한다. 즉, 지금도 정치 영역에서 시민권에 기반해 투표권을 보장 받는 것처럼, 대안 사회에서는 시민권 자체에 기반하여 시장에서 행사할 최소한의 투표권을 제공 받아야 한다. 많은 이들이 기본소득제 도입 운동을 새로운 보통선거권 쟁취 투쟁이라고 보는 것은, 그래서, 이유 있다(김교성, 2009).

    이것은 확실히 1원 1표의 현실에 도전했던 20세기 복지체계의 전략보다 훨씬 더 보편적이면서 효과적인 공격 전략이다. 소득 재분배 효과도 기존의 어느 복지체계보다 더 뛰어나다. 한국 사회에 기본소득제를 도입했을 때 빈곤 완화 효과와 소득 재분배 효과를 추계한 연구 결과들도 이 점을 실증한다(강남훈․곽노완, 2009; 김교성, 2009).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제는 단순히 여러 복지제도들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우월한지 논의하는 차원에서 검토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기본소득제는, 그보다는, 21세기 대안 사회 건설 프로그램의 필수 구성 부분으로 바라봐야 한다. 문제는 기본소득제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어떤 과도 전략들을 통해) 실현시킬 것인가이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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