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와 세 개의 사회주의
        2010년 01월 17일 10:2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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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사회민주주의연대, 좋은정책포럼, 혁신네트워크가 ‘노동운동, 활로는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오는 19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주최하는 토론회에서 발표될 필자의 발제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노동운동의 위기적 상황을 가져온 요인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가 차세대 노동운동의 깃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러 가지 쟁점을 내포하고 있는 이 글이 노동운동의 전망을 찾는 다양한 노력이 진행되는 현 시기에 의미 있는 논쟁을 촉발시키기를 기대하며,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몇 차례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3. 사회민주주의(SD)는 ‘이념이 아닌’ 이념이다

    ‘사회민주주의’를 대단히 어렵고 복잡한 이론의 문제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들은 복잡한 역사의 우여곡절을 들어서 이야기를 빙빙 돌린다. 때로는 사회경제체제의 하나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것이 자본주의냐 아니냐는 평가, 본질 규정을 두고 설왕설래 한다.

    그러나 그 모두에 앞서서 사회민주주의는 원래 노동운동의 이념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오랜 시간 대중과 함께 해온, 대중운동의 이데올로기다.

    그것은 엘리트주의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것은 어렵고 복잡한 이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오랜 세월 경험의 누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이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는 지식인과 노동자 대중이 함께 만들어온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인과 노동자 대중이 함께 만든 이데올로기

    어떤 노동운동가가 말한 대로 “이념이 아닌 이념, 대중이 하자고 하는 대로 하는 것, 그것이 사회민주주의다.” 엘리트가 인민을 억압하거나 속이거나 선동하는 데 사용하는 그런 이념이 아니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정치가, 이론가들인 잉바르 카를손과 안네마리에 린드그렌이 쓰고 윤도현 교수가 번역한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각각 저마다 개성적인 답변을 가지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당은 모든 당원이 무조건 추종해야만 하는 경직된 교리체계를 가진 정당이 아니며, 과거에도 결코 그런 적이 없었다.”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일목요연한 교리가 없는 것은 좋게 말하면 미래와 새로운 상황을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이지만, 바로 그 점이 지식인들에게 인기가 없고 종종 경멸의 대상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의 치명적 약점이지만, 뒤집으면 사회민주주의의 최대의 강점이며 질긴 생명력의 원천이며, 사회민주주의가 노동자의 이념이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경신 교수는 ‘사회민주주의는 탈이념화된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구의 표현’이라고 표현한다. 그에 따르면 이념은 공포에서 나온다. 미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료보험개혁에 대한 논란을 예로 들고 있다. “민영을 없애겠다는 것도 아니고 민영의 혜택을 못 받는 사람들을 공영으로 구제하겠다는 상식적 제안에 대한 미국 사회 일각의 반응은 틀림없이 이념적이다.”(<헤럴드 경제> 2009년 9월 29일자)

    그는 “정부 환율정책을 비판하는 네티즌을 100일 이상 감옥에 가두는 것은 공포의 발로이며, 용산에서의 죽음을 추모하려는 아줌마 1명을 300여명의 전경이 둘러싸는 것도 공포의 발로”라고 하면서, “이 공포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촉발되는 이념에서 벗어나 우리는 자유와 평등에 실사구시적으로 몰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용적 몰입,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의 추구는 사회민주주의적 제도들을 검토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 “이념적 두려움과는 달리, 사회복지가 튼튼한 사민주의 국가들은 경제발전에 있어서 미국식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성장 속도가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다.” 뜻밖에도 ‘보수적인’ 경제 신문의 지면에서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하여 한 마디 들을 수 있다.

    세 새대 좌파 이데올로기

    그러면 왜 우리나라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아직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하나는, 우리나라에는 동양의 합리주의라고 할 수 있는 성리학으로부터 유래한 철학적 전통이 있어 경험론과 실용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민주주의가 지식인 사회에 뿌리내리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실학자들의 사상혁명은 자본주의 이전, 민주주의 이전이라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미완에 그쳤던 것이다.

    사회민주주의가 쉽게 뿌리내릴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로서, 우리나라 진보진영의 철학적, 이데올로기적 혼란이라는 조건이 있다. 우리나라 자본주의는 너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사회변화 역시 너무나 빨랐다. 이런 압축 성장으로 인하여 20세기에 선진국 국민들 세 세대가 경험했던 사회변화를 우리는 한 세대가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 진보에는 세 세대 좌파 이데올로기가 혼재되어 있다.

    먼저 1920년대의 코민테른 시절의 좌파, 즉 맑스-레닌주의가 있고, 다음으로 1950년대의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의 좌파, 즉 사회민주주의가 있고, 다음으로 1980년대 녹색당 시절의 신좌파가 있다. 지금 우리나라 진보진영에는, 심지어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도 이 3대가 대가족(大家族)을 이루고 혼거하고 있다.

    정서적 미련으로 남아 있는 맑스-레닌주의만이 문제는 아니다. 혼란은 오히려 신좌파로부터 오기도 한다. 신좌파의 각종 이데올로기들을 이종태는 ‘지식인에 의한, 지식인을 위한’ 사유방식이라고 비판하였다. 바로 그런 점에서 신좌파는 구좌파와 같다고도 했다.

    대중의 생활을 사유의 중심에 놓는다는, 즉 ‘철학이 대중에 복무한다’는 정신이라는 의미에서 민주주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좌파는 노동운동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다.

    대중을 경멸하는 신좌파

    신좌파는 흔히 ‘자본주의 외부’를 꿈꾼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강요한 가치관을 내면화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고 길들여진 대중을 경멸한다. 그러나 당대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대중의 경험을 경멸하거나 대중의 욕망을 “‘거짓 욕망’으로 몰아붙이고 머릿속에서 창출해낸 ‘진정한 욕망’과 ‘바람직한 대중’의 이미지는 문자 그대로 ‘공상’일 뿐이다.”(이종태,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진보운동 담론 비판’, 주대환 외, 『한국사회와 좌파의 재정립』, 107쪽)

    바로 이런 ‘지식인에 의한, 지식인을 위한’ 각종 이론과 사상들로부터 노동운동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저 일체의 ‘이념’을 거부하면 되는가? 아니다. 더 풍부하고 든든한 이념으로 무장해야 한다. 즉 사회민주주의라는 세계 노동운동이 수백 년의 시행착오와 경험의 축적으로, 지성(知性)의 성숙으로 마련한 이데올로기로 무장해야 한다. 백신 예방주사를 맞아야 항체와 면역력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흔히 사람들은 “나는 특정한 이념으로 노동운동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실제 생활과 실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념’에 질려버린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사회민주주의도 이념의 하나로 간주하여 거부한다. 그런데 바로 ‘특정한 이념이 없는’ 그 사람이 곧 사회민주주의자다. 홍길동이 ‘나는 홍길동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꼴이다.

    흔히 말하는 ‘이념’이 일원론적인 사회발전 논리, 종말론적 역사철학을 가진 신념체계를 가리킨다면, 사회민주주의는 이념이 아니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는 ‘이념이 아닌’ 이념이며 ‘이념 이후의’ 이념이다. 그러나 바로 그래서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며, 그렇게 도그마에 얽매이지 않은 덕에 많은 성과를 내었다. 사회민주주의는 논리나 웅변이 아닌 결과로서 대중의 신뢰를 얻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엘리트의 이념이 아니라 대중의 이념인 만큼 철저히 민주주의, 상향식 의사결정 과정에 기초하고 있다. 그 점이 매우 중요하다. 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이름 아래 일당독재, 나아가 일인독재를 하였다.

    민주주의 그릇에 담긴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는 독재를 거부하고 개인의 인권 보장, 사상의 자유, 다당제, 삼권분립, 독립 언론의 존재 등을 지지하였다. 2,500년 전부터 내려오는 철인정치와 민주주의의 길 중에서 민주주의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커다란 그릇에 사회주의를 담았기 때문에, 다른 식으로 말하면 민주주의라는 정치철학을 기본으로 사회주의라는 경제철학을 결합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유연하며 탄력적이다. 그리고 새로운 요소들, 예를 들면 생태주의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반면에 어떤 고귀한 가치 추구도 민주주의를 통하지 않으면 사회민주주의로부터는 이탈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라는 정치철학이 더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민주노조운동에서 민주주의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정갑득 금속노조 위원장은 “과거처럼 상층 단위에서 내리는 운동은 통하지 않는다는 게 증명됐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기자는 상명하달식 노동운동의 한계를 지적했다고 해석했다. (<한겨레>, 2009년 9월 29일자) 산별노조도 독일식 산별노조 모델을 위로부터 이식하려 했다고 보면서 이런 방식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본다.

    서울 창동고등학교 교사 이기정이 『학교개조론』이라는 책에서 “7차 교육과정 반대 투쟁, 중등교사 자격증 소지자의 초등학교 교사 임용 반대 투쟁, NEIS 반대 투쟁, 교원평가제 반대 투쟁 등 합법화 이후 대부분의 투쟁에서 나는 돈키호테를 떠올렸다.”고 썼다고 한다.(<한겨레> 2009년 3월 30일자, 강준만, <전교조를 위하여>)

    학부모이기도 한 국민을 섬기고 그 뜻을 받들고 대화를 나누려는 민주주의 정신이 전교조에 결핍되어 있었으며, 대신에 ‘나만 옳다’는 독선이 흘러넘쳤다는 이야기다.

    사민주의, 민주노조 운동 혁신에 도움

    그렇다면 바로 이러한 민주노조운동의 반성과 혁신에도 사회민주주의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민주노조운동의 이데올로기를 이룬 NL과 PD의 한계가 바로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의 결핍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대체할 수 있는 철학과 이데올로기, 즉 사회민주주의(SD)가 좋은 약이 될 수 있다.

    더 근원적으로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시대에 어울리는 인간관에 근거하고 있다. ‘앞서서 가는 사람’(임을 위한 행진곡), 열사, 운동가(혁명가), 요컨대 자기희생적인 사람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NL, PD와 달리 사회민주주의는 현실적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군자와 소인을 나누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군자가 되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사회민주주의는 누군가, 예를 들면 혁명가나 전위 정당이 진리를 가지고 있고 이를 대중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진리관을 부정한다. 절대적 진리를 인식하는 것은 종교가 할 일이지, 노동운동과 정치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리는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경험적으로 입증된 보다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이 곧 선(善)이라는 ‘위대한’ 실용주의 철학에 근거한 이데올로기가 사회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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