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체제와 북한이 같을까?
    2010년 01월 16일 09: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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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정희 시대의 무게, 진보의 공백에 대한 응답

올 해 경인(庚寅)년은 일제 강점 100년, 6.25 전쟁 60년, 4. 19 혁명 50년, 5월 항쟁 30년 등이 겹친 해다. 족히 역사의 해로 부를 만하다. 근현대사의 많은 성찰이 이어질 것이고 보수, 진보간 열띤 역사 논쟁도 예상된다.

지금 할 일이 산적해 있는 데 한가하게 웬 역사 타령이냐고 눈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겠으나 경우에 따라 돌아가는 길이 더 나은 길일 수도 있다. 더불어 사는 공동의 나라(republic) 건설을 위한 우리들의 노력은 역사의 비판적 성찰로부터 힘을 얻는다. 역사는 단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진행중인 현재, 심지어 ‘지나간 미래’다.

   
  ▲표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 한국 근현대사의 새로운 해석은 우리 사회의 가장 뜨거운 화두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 근현대사를 일방적인 ‘성공‘사의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시각은 이전부터도 있어 왔다.

그러나 현 정부에 들어와 ’근대화’와 ’선진화’ 개념을 두 핵심 기둥으로 하는 한국근현대사 ‘성공사관’은 거의 ‘국정사관’ 수준이라 할 정도로 승격되고 체계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 정부는 2008년 8월 15일을 이전과 같이 광복절 행사가 아니라 파격적으로 ‘건국절’ 행사로 치렀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역사교과서 수정을 위한 새 집필 지침을 수립했고,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 포럼에서는 ‘대안 교과서’를 내 놓았다.

이로써 한국근현대사관의 대항적 두 유형은 ‘성공사관’ 대 ‘자학사관’으로 프레임되게 됐다. 현 정부는 과거사의 진실 규명과 화해를 위해 모처럼 진행되고 있던 ‘과거사 청산‘ 작업에 대해서도 찬물을 끼얹었다.

성공사관 vs 자학사관

그런데 한국근현대사에서 특별히 박정희 시대의 무게는 막중하다. 이 시대야말로 생생한 현재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이명박, 박근혜의 뒤켠에서 어른거리는 박정희의 얼굴을 보고 있다. 오늘날 많은 국민 대중들은 이명박, 박근혜를 지지하면서 그 뒤에 서 있는 박정희를 지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박정희 시대가 없었더라면 근대화와 선진화, 더 구체적으로는 식민지 근대화- 건국-산업화-민주화-선진화로 이어지는,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까지도 가로채는 신보수의 기승전결식 성공사관, 진보 쪽을 ‘자학사관’으로 밀어부치는 무반성적 승리주의 사관을 꾸려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보수적 승리사관은 박정희 시대 기적적인 산업화 성취를 올려세움으로써 식민지 시대는 그 역사적 전제 조건을 조성한 시기로서 그리고 민주화 시대는 산업화의 경제적, 물질적 기반 위에 비로소 열릴 수 있었던 시기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승만 시대 또한 박정희 시대에 기댐으로써 재평가의 물꼬를 열 수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공사관 대 자학사관의 이분법적 프레임으로 무장한 보수 쪽의 체계적이고 능동적인 역사 공세에 비한다면 진보 쪽은 충분한 응답을 하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이제 전통 진보의 민족, 민중 사관으로는 역부족인 상황이 되었다.

물론 이를 쇄신하기 위한 여러 귀한 노력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큰 공백은 보수의 새 교과서에 맞먹는 진보의 통일된 ‘대안 교과서’를 내 놓지 못하고 있는 데서 드러난다. 여기서도 보수는 단결하는데 진보는 흩어져 있다.

민족민중사관으로는 역부족

진보가 여러 갈래라는 것이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진보 ‘연합정치’ 요구가 높은 것처럼, 진보 ‘연합 대안 교과서’에 대한 요구도 높다. ‘연합 대안 교과서’를 내지 못하고 있는 데는 여러 사정이 있겠으나 그간의 연구가 많은 부분 운동사 중심이라는 것, 비판과 저항에는 강한 반면 대안 구성에는 약하다는 것, 관성에 사로잡혀 시대 변화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등이 중요한 요인이 아닌가 싶다.

국민 대중은 단지 보수에 대한 비판 일변도를 넘어, 성공 대 자학의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 열린 진보의 새로운 근현대사론을 요구하고 있다. 그간 우리가 무엇을 성취했고 무엇을 잃었는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어떤 새 길을 열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금 새로운 성찰을 기대하고 있다. 사정은 박정희 시대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조희연 교수가 새해 벽두에 내놓은 역작 『동원된 근대화-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의 정치사회적 이중성』(후마니타스)를 만나게 됐다.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 반가운 마음이다.

이 책은 박정희 시대에 대한 진보의 재해석에 기여함은 물론, 진보의 한국근현대사관의 새로운 재구성을 위해서도, 나아가 저자가 ‘우리 안의 보편성’이라고 부른 한국적 특수성 속에 존재하는 일반성을 발견하는 작업에서도 새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개인적으로는 주로 조 교수가 보내오는 책을 받아보기만 하고 평자가 보내는 책은 별로 없고 해서 미안했는데, 이번에도 또 그런 마음이 되면서 열린 진보의 길, 진보 학술의 개방적 확장의 길을 향해 지칠 줄 모르는 이 길동무로부터 큰 자극을 받는다.

2. 『동원된 근대화』의 핵심 논지 : 개발동원체제와 그 이중성

이번에 나온 『동원된 근대화』는 저자가 앞서 낸 『박정희와 개발독재 시대』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이 두 책을 같이 읽으면, 저자가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박정희와 개발독재 시대』가 역사서술 방식의 대중서 성격을 갖고 있다면, 『동원된 근대화』는 사회과학적 분석에 주안점을 둔 전문 학술서에 해당한다. 그렇다 해도 『박정희와 개발독재 시대』 또한 단순한 대중서는 아니었다. 『동원된 근대화』에서 핵심 개념으로 잡은 ‘개발동원체제’라는 개념은 이미 그 책에서도 선보인 바 있다. 그러나 그 사회과학적인 규정과 분석은 미루어져 있었던 터였다.

이제 새 책에서 저자는 ‘개발동원체제’ 개념을 과감하게 박정희 체제론의 핵심 개념으로 끌어 올려 체계적으로 장착시키고 있다. 그리고 개발동원체제가 모순적인 이중성, 또는 복합성을 가지고 있다고 봄으로써 박정희 체제의 구조적, 역사적 성격과 함께 그 작동 방식, 정치사회적 동학을 진보적 시각에서 해명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개발동원체제는 개발이라는 목표를 향해 국가가 주도적으로 사회를 추동하고 동원하는 체제다. 그 때문에 이 체제는 국가주의적 체제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다. 저자는 개발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특별히 새롭다 할 의미 내용을 부여하고 있지는 않다. 성장, 발전, 근대화라는 말과 혼용되기도 한다.

반면 방점을 찍어 강조하는 것은 ‘동원’이라는 말이다. 책의 원제와 부제 모두에서 동원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을 정도로 중요성을 갖고 있다. 동원은 개발, 또는 근대화 목표를 압축적 또는 전투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국가가 주도적으로 사회를 조직화하는 전략적 행위다. 그리고 개발이 경제적 변화과정이라면, 동원은 경제체제의 정치사회적 작동 양식이다.

‘개발동원체제’의 의미

평자가 보기에, 저자의 개발동원체제 개념이 갖는 새로움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점으로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 개발동원체제 개념을 한국의 박정희 체제를 넘어서 후발 근대화 이행 체제로 일반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와 제3세계는 물론, 서구 후발 자본주의 근대화 체제도 이에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개발동원체제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에 걸치는 개념으로, 즉 체제 관통적인 개념으로 제시한다.

소련의 스탈린 체제, 북한의 초기 건설체제, 나아가 오늘날 개혁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조차 개발동원체제에 포함된다. 그리하여 박정희 체제는 이렇게 다양한 개발동원체제 중 하나의 특수한 케이스로서 후후발, 권위주의적 반공 개발동원체제로 파악된다.

둘째, 저자는 개발동원체제의 국가중심성을 말하면서도 그간의 국가중심론을 넘어서고자 한다. 저자가 보기에 대표적 국가중심론이라 할 수 있는 개발국가론은 국가 자체의 주도적 개입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개발의 정치사회적 과정 또는 양식인 동원의 지점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그래서 ‘체제’(regime) 수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체제’라는 개념이 국가와 사회간의 특수한 관계가 작동하는 개발의 사회적 과정의 특성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국가 자체에 내재된 자율성과 개입 능력보다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계급적, 사회적 조건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하여 구체적으로 박정희 체제에서 그 특수한 조건들을 분석하고 있다.

박정희 체제의 모순적 이중성

다음으로 『동원된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명제는 개발동원체제, 그리하여 권위주의적 반공 개발동원체제로서 한국의 박정희 체제가 모순적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사회적 이중성’의 테제는 책의 부제로 되어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이 관점은 저자가 그람시, 제솝, 톰슨, 풀란차스 등으로 이어지는 이론적 자원에서 길러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이중성론에 섬으로써 저자는 박정희 체제의 구조뿐만 아니라 역동적인 역사적 동학도 보여 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모순적 이중성이란, 박정희 체제가 한편으로 경제적 근대화라는 역사적 과제에 부응하는 성격과 또 다른 한편으로 억압적이고 강압적인 성격, 그리하여 위기적 성격을 같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중성 또는 복합성은 또 달리 헤게모니적 성격과 ‘헤게모니 균열‘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저자의 모순적 이중성론은 혹시 이런 측면도, 저런 측면도 있다는 식의 병렬적 절충론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대한 대답을 제공하고 있다. 대답은 두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먼저 이론적 수준인데 저자는 그람시 헤게모니론이 강압과 동의를 상호 배제적으로 보는 한계를 갖고 있다고 비판하고 동의와 강압의 통합적 이중성론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지배의 양측면으로서 강압과 동의가 어떤 방식으로 상호 침투하고 통합되는지에 대해 말한다.

또 구체 분석 수준에서는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의 전시기에 걸쳐 동의와 강압, 또는 헤게모니적 측면과 그 균열의 측면이 어떤 역사적, 계급적 사회적 조건 위에서 출현할 수 있었고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지, 그 결합이 왜,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그리고 이 이중적 체제가 마침내 어떻게 아래로부터 ‘민중의 주체화’와 정치적 저항에 의해 파국에 이르게 되는지에 대해 그 모순적 동학을 밝힌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차적으로 주목해 두어야 할 것은 저자의 모순적 이중성론이 박정희 권위주의체제에 대한 일방적인 보수적 정당화론, 나아가 립셋, 헌팅턴 등이 대표하는 주류적 근대화론, 즉 권위주의적 산업화 연후에 정치적 민주화라는 단선적, 단계적인 진화론과 대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위인 박정희’론은 물론, 국가중심론을 벗어나 지배의 전략 대 저항의 전략, 지배의 동학 대 저항의 동학이 연출하는, 모순에 찬 발전 체제로서 박정희 체제를 파헤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에게 있어 박정희 반공 권위주의적 개발동원체제는 하나의 역사적 헤게모니 체제임을 인정하면서도, 무엇보다 뛰어나게 ‘헤게모니 균열’의 사례가 된다. 저자가 임지현의 대중독재론, 이영훈의 신보수적 근대화론과 논쟁하면서 보여주고자 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3. 토론: 개발동원체제 개념의 불안정

조희연의 『동원된 근대화』는 몇 가지 토론 지점들을 열어 놓고 있다. 토론점들은 꽤 많지만, 여기서는 아무래도 이 책의 육중한 무게를 떠받치는 핵심 기둥 역할을 하고 있는 개발동원체제라는 개념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토론해 보고자 한다.

과연 개발동원체제라는 말이 이 책에서 시도한대로 새로운 사회과학적 분석 개념으로서 구성, 정립될 수 있을까. 그러기를 바라지만, 평자가 보기에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 같다.

1) 그물을 너무 넓게 펼치면 고기가 빠져 나갈 구멍도 커지기 마련이다. 개발동원체제 개념도 그런 것 같다. 한국의 박정희 체제, 동아시아와 제3세계 국가들의 발전 체제, 독일 비스마르크 체제를 비롯한 서구 자본주의의 후발 발전 체제, 소련의 스탈린 체제, 북한 초기 사회주의 건설체제, 개혁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이 모두를 저자는 한 바구니에 담고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나의 개념 바구니에 너무 많은 것, 이질적인 것들을 담아서는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다. 바구니가 넘치게 된다. 개발을 위한 국가 주도의 사회 조직화라는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이들을 같은 개념으로 묶을 수 있겠는가. 같이 묶을 수도 있긴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같이 묶은 개발동원체제 개념이 얼마나 유의미한 함축을 가질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

박정희 체제와 북한 사회주의 체제를 같이 묶을 수 있을까?

2) 위의 지적과 관련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 개발동원체제 개념의 중요한 난점은 하나의 사회구성에서 공(公)과 사(私), 국가와 사회, 국가권력과 사회 지배세력, 계획과 시장, 공유와 사유의 쌍에서 각각이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 양자의 상호 관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것이 그 사회의 발전에 어떤 의미를 가지며 사회 발전 방식과 경로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하는 문제가 너무 간단하게 처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발동원체제 개념에서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은 개발보다는 동원이다. 개발은 다분히 중심 과제, 중심 가치로 전제되어 있다. 동원의 측면에 더 조명을 줌으로써 새로운 것도 얻었지만 잃은 것은 없는가.

동원이라는 말은 그 자체 매우 국가중심적인 함축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동원 주체는 국가이고, 사회는 동원 대상이다. 그 때문에 저자는 국가중심론을 비판하고 국가의 계급적 사회적 조건을 강조하고 있지만, 오히려 의외로 개발주의 체제 개념에서 개발동원체제 개념으로 나아감으로써 국가 중심주의를 훨씬 더 강화시킨 의미 변화를 일으킨 것은 아닌가.

사실 연구사상 개발국가론, 개발주의론에서도 동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미 개발주의체제가 민족주의적, 반공주의적 동원체제 성격을 중요한 특성으로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렇지만 결코 동원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동원과 같이 가는 협력이 중요하다. 개발주의론은 동원과 협력, 사기업에 대한 규율을 동반한 지원, 그리하여 국가와 사기업, 국가와 시장간 공사 협력의 시너지를 낳는 체제적 특성에 주목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협력’ 체제에 주목해야

반면에 개발동원체제론에서는 국가중심주의가 한층 더 강화됨으로써 사회의 지배세력의 존재, 그리고 이들과 국가와의 특수한 관계 방식의 문제가 부차화되는 의미 변화 효과를 낳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저자는 국가의 계급적 사회적 조건에 대해서, 그리고 개발동원체제의 구조와 동학에서 자본가 계급, 지배 블록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론틀의 수준에서 개발동원체제론은 개발주의체제론에 비해 국가 주도에 의한 사회동원을 체제의 핵심 골격으로 잡았다고 하겠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의외로 국가중심체제에 내장된 국가물신숭배의 위험, 그 정치적 반동성의 위험, 국가민족주의의 이중성의 위험에 대한 지적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동원된 근대화』에는 정치적 ‘반동성’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반동성’이라는 말보다 ‘작위성’이라는 개념적으로 애매한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3) 개발동원체제에서 공과 사의 위상 및 복합적 상호 관계에 시선을 두게 되면, 대중들이 단지 ’동원‘만 되는 것이 아니라 ’호응’하는 문제, 왜 어떤 방식으로 호응하는지 하는 문제가 퍽 중요해진다. 이 주제는 물론 대중독재 논쟁의 주제이기도 했고 저자 또한 그람시적인 ‘강압과 동의’의 문제틀 위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이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는 예를 들어 한국 박정희 개발주의의 경우, 국가주도 냉전반공주의, 국가민족주의의 대중 동원력뿐만 아니라 그 동원이 먹힐 수 있는 가족주의 기반의 문제가 별로 거론되고 있지 않다.

역사적 뿌리가 매우 깊고 6.25전쟁 이후 새롭게 재구성된 가족주의와 생존을 위한 강렬한 소유집착주의, 그에 따른 국가동원에 대한 대중들의 호응 문제는 박정희 시대뿐만 아니라 민주화와 세계화시대 한국에서 공적 신뢰의 약함과 그에 따른 복지연대형성의 곤란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가족주의와 복지연대

동아시아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에서 개발주의시대 이후, 87년 민주화 이후 왜 시장주의 시대가 도래했고 진보가 ‘불신의 덫’에 빠지게 됐는가, 이는 다방면으로 심층 연구가 필요한 큰 주제인데, 나는 소유집착적, ‘사민’(私民)적, 경쟁적 가족주의에 오늘의 시장주의와 이어지는 중요한 하나의 연결 고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높은 교육열과 사교육 과열경쟁도 단지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며, 역사적 가족주의와 직결되어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비대한 사교육은 이전부터 부동산 투자와 함께 복지 안전망이 빈약한 상황 속에서 대중들이 자신과 가족의 생존, 안위 및 지위 상승을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미래 투자행위에 속한다.

4) 앞의 논의를 전제로 이제 저자의 개발동원체제론의 이론적 계보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개발동원체제론은 개발국가론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저자는 개발동원체제론이 개발국가론, 그리고 평자가 제안한 바 있는 개발자본주의론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설명은 너무 소략하고 간단히 처리되어 있다.

개발동원체제? 개발국가? 개발자본주의?

뿐만 아니라 정작 중요한 것은 내용적으로 그 연관성이 흐릿해 보인다는 것이다. 예컨대, 개발국가론의 주창자 존슨은 스탈린적 국가독점사회주의와 일본 및 동아시아 개발자본주의를 엄격히 구분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존슨의 개발국가론에 따르면, 전자는 ‘계획 이데올로기적’ 모델로서 실패한 반면, 후자는 ‘계획 합리적’ 모델, 국가와 시장간, 국가와 사기업간 ‘공사협력’ 모델로서 성공한 모델이다.

개발국가론, 개발주의론에서는 어떻게 그 체제가 공사협력의 시너지를 창출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기제, 제도형태를 갖고 있는지 하는 것이 핵심 관심사다. 반면에 조희연의 개발동원체제론에서는 존슨이 범주적으로 확연히 구분한 스탈린 모델과 동아시아 모델이 같은 개발동원체제 개념 안에 포함되어 있다. 또 그 체제의 작동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관계없이 모두 개발동원체제로 정의된다.

따라서 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개념의 실질적 내용 부분에서 개발동원체제론은 개발국가론 및 개발자본주의론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의 개발동원체제론의 이론적 계보가 좀 묘연해 진다.

에번스의 ‘연계된 자율성’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도 중요한 급소를 찌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자율성’과 함께 ‘연계성’이 개발국가론의 핵심이라는 대목은 덜 주목한 것 같다. 생각하기에 따라 저자의 개발동원체제론은 내용적으로, 개발국가론의 계승, 극복론이라기 보다는 전혀 뜻밖에 헌팅턴류의 강한 국가론의 계승, 극복론으로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흥미로운 논란 지점이 될지 모른다.

5) 또 다른 이론적 계보 문제로서 개발동원체제론이 권위주의론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 『동원된 근대화』가 박정희 시대의 정치사회학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중요하다.

저자는 박정희 체제를 개발동원체제의 특수한 사례로서 권위주의적 반공 개발동원체제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권위주의 체제라는 것이 개발동원체제의 구조적 성격과 동학을 파악함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을 빠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찍이 권위주의론의 제창자 린츠가 말한 대로, 이 체제는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이분법으로 포착되지 않는 회색지대를 지칭하는데, 제한된, 정치적 다원주의의 존재는 그 필수적 특징이다. 정치적 다원주의의 존재 여부, 권위주의의 제도화 수준이 낮은지 높은지, 어떤 방식의 제도화인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국의 박정희 체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치적 다원주의 제도 그리하여 공적 경합 공간의 존재가 지배연합 대 저항연합의 각각의 능력과 어우러지면서, 그 체제에 고유한 내적 모순과 불안정을 투입하면서 역동적 동학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한국정치와 대만정치의 차이도 이 지점에서 비교가능하다.

어떤 헤게모니 균열인가가 중요

한국의 70년대 유신체제는 저자가 말하는 ‘민중의 주체화’뿐만 아니라, 60년대의 제한된 다원주의 공간마저 박 정권이 폐쇄하려고 함으로써 위기를 자초하고 자기 무덤을 판 측면이 있다. 이렇게 봐야 개발동원체제의 ‘헤게모니 균열’과 그 이후에 대해서도 민중의 주체화와 저항에 의한 붕괴라는 단순 도식을 넘어 다양하게 열린, 복합적 경로를 논의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평자는 그간의 헤게모니적 ‘대중독재’ 대 ‘헤게모니 균열’의 논쟁 구도 이상으로, ‘어떤 균열인가’를 더 깊이 논의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저자가 주장하는 개발동원체제의 모순적 이중성론과 뛰어난, 생동하는 동학론도 다원적 권위주의 체제와 그 다양한 제도화 방식 및 수준에 기반을 둠으로써 이론적, 경험적 분석의 빈틈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개발동원체제론은 전통적인 정치적 힘관계론과 이데올로기론을 벗어나지 못할 우려마져 없지 않다.

6) 위와 같이 말함으로써 나는 저자의 개발동원체제론에서 제도론의 빈곤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개발동원체제론이 선행한 개발국가론, 개발자본주의론 그리고 권위주의론과 이론적 관계 문제를 모호하게 처리하고, 그럼으로써 개발동원체제의 구조적 성격과 동학을 파악함에 있어 중요한 난점을 갖게 된 데는 『동원된 근대화』에서 사회세력간 타협의 소산이면서도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관계의 ‘제3항’으로서 제도의 이론, 제도의 정치사회학이 좀 취약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가 다름아닌 개발동원의 ‘체제’(regime)를 말하면서 그것에 고유한 정치사회적, 경제적 제도 형태들, 그 배치방식과 연관들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다면 이는 매우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개발주의 정치경제학이 그렇듯이, 개발동원체제의 정치사회학 또한 제도론적 전환을 통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제도론이 아니라 갈등과 쟁투의 계기를 삽입한 진보적, 역사적 제도론 말이다.

이상과 같이 평자로서 제 역할을 해야 하는 까닭에 별 수 없이 몇 마디 소견을 적어 보았다. 물론 평자가 잘못 보았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를 바란다. 그리고 설사 개발동원체제라는 개념이 저자가 의도하는 만큼 견고하지는 못하다 해도, 『동원된 근대화』가 보수의 박정희 시대론을 극복하고 진보의 박정희 시대론을 성찰적으로 확장하며 나아가 저자가 늘 강조하듯이 ‘우리 안의 보편성’을 발견하는 작업에서 수행한 기여는 여전히 실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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