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L과 PD를 넘어서서
        2010년 01월 14일 10: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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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사회민주주의연대, 좋은정책포럼, 혁신네트워크가 ‘노동운동, 활로는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오는 19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주최하는 토론회에서 발표될 필자의 발제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노동운동의 위기적 상황을 가져온 요인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가 차세대 노동운동의 깃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러 가지 쟁점을 내포하고 있는 이 글이 노동운동의 전망을 찾는 다양한 노력이 진행되는 현 시기에 의미 있는 논쟁을 촉발시키기를 기대하며,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몇 차례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1. 민주노조운동의 종말과 차세대 노동운동

    지난해 여름 노동운동가 권용목이 돌연사했다. 그는 1987년 노동운동의 상징적 리더였다. 그런데 그는 하필이면 1987년에 시작된 ‘민주노조운동’을 비판하는 책을 쓰다가 과로사하였다. 얼마나 이해하기 힘든 일인가? 그의 죽음을 1987년 체제와 87년 노동운동, 민주노조운동의 슬픈 종말을 상징하는 한 사건으로 보는 건 엉뚱한가?

    권용목의 화살과 잘못된 과녁

    그가 쓴 책, 『민주노총 충격보고서』 에는 민주노총이 ‘선진화의 발목을 잡는 주범이자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괴물’로 규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는 민주노총 초대 사무총장이었다. 그런 그가 뉴라이트 신노동연합의 상임대표로서 민주노총 공격에 앞장섰다는 것부터 충격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민주노총을 향해 그가 날린 화살은 남의 과녁을 향하여 날아갔다.

    그가 민주노총을 공격한 것은 주로 도덕성의 측면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도덕 문제가 아니다. 노동운동가들이 성인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밝힌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이야기다.

    중요한 문제는 민주노총이든 누구든 과연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계급 전체를 위한, 즉 미조직 노동자를 포함하여 모든 노동자를 위하고 그래서 자연히 국민을 위하게 되는 노동운동, 즉 대의(大義)에서 벗어나지 않는 노동운동을 하였는가라는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위축과 무력화는 인간사회 어디나 있는 부패 따위가 아니라 사회적 고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노조운동은 지금 철저히 고립되고 있다. 그에 따라 도덕적,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민주노조운동, 그 조직적 실체인 민주노총은 진보진영으로부터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다. 민주노총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진보진영의 살 길이 열릴 거라는 충고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이른바 노동조합원들의 실리추구는 더욱 노골화되고 민주노총으로부터 산하 노동조합들의 탈퇴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공무원 노동조합의 가입으로 일시 만회하기는 했지만 민주노총의 세력이 급감할 위기 앞에 놓여 있다. 공무원 노동조합의 가입 역시 항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임성규의 경고와 이재영의 비판

    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은 2009년 9월 16일,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주노총 간부들, 정당운동가들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민주노총이 하루아침에 망할까?’라고 생각한다. 오판이다. 일본의 총평이란 조직이 하루아침에 망하지 않았나. 지금의 위기를 치유하고 극복하지 못하면 민주노총은 하루아침에 망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은 2010년이 될 것이다.”

    다시 부연하기를 “사업장 지도부 몇 사람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현장 조합원들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때문에 복수노조와 전임자 임금지급 등 하반기 몇 가지 위기와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민주노총은 쉽게 무너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민주노조운동이 안주하고 있었던 물질적 기초가 밑바닥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너무 오랫동안 기업임금에 매몰된 노동운동을 계속한 데에 있다. 2006년 10월 2일, 이재영은 <레디앙>에 쓴 글에서 민주노조운동이 ‘자기 월급만 올리는 노동운동’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민주노조운동이 한국 노동자계급 내에서 임금격차가 벌어지고 불평등이 심화되는 데 일조하였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민주노조들의 “요구안에 들어있는 사회적 의제나 비정규직 의제 같은 것이 교섭과 쟁의 과정에서 상습적으로 행방불명되고, 결국 조합원의 임금만 살아남는 뿌리 깊은 관행이” 문제다. 그러니까 “민주노조운동의 단체 협상에서 취약 노동계층의 근로조건이 자기 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교환수단으로 쓰여진 셈”이라는 것이다.

    위기의 근원은 정치투쟁의 결핍

    오늘날 한국의 임금 노동자들은 같은 계급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임금 격차가 크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이르는데 민주노조운동이 저항하기보다 오히려 일조를 했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이다. 이로써 민주노조운동은 먼저 노동자계급 내에서 신뢰와 도덕적 영향력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얻은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귀족노조’다. 물론 당사자들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억울한 이름일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귀족노조’에 가입하지 못한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 사내외 하청 기업 노동자,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을 백안시하고, 심지어 적대시 한다. 거기다 몰락 위기에 몰린 자영업자들은 노동조합에다 나빠져 가는 경제 상황에 대한 모든 책임을 돌리고 쌍욕을 퍼부으며 화풀이를 한다. 그래서 민주노총이 한국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를 이렇게 본다면 얼핏 보기와는 달리 정치투쟁 과잉이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의 근원이 아니고 정치투쟁 결핍이 위기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허식적인 정치투쟁 과잉은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노동자계급 전체, 혹은 조직되지 않은 90%의 노동자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조직된 10%의 노동자보다 더 열악한 생활을 하는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한 투쟁은 부족했다.

    흔히 보수언론들은 민주노총이 시도 때도 없이 ‘정치투쟁’을 벌인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정치투쟁이 사회적 의제, 전국민적 요구 또는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해를 대변하는 투쟁이라면, 심지어 전계급적 이익이나 전국민적 이익을 위해 자기 눈앞의 이익을 희생하기도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이렇게 민주노조운동이 고립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사실을 말하면 정치투쟁이 제대로 이루어진 일이 없었다. 정치투쟁은 항상 자기 이익의 관철을 위한 방패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정치적 혹은 사회적 이슈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그것을 진지하게 추구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진정성 없이 그저 말로만 내세웠던 목표였다. 이재영은 “간혹 들고 나오는 사회개혁투쟁이나 정치총파업은 임금인상투쟁 매몰이라는 비난을 모면키 위한 양념이나 알리바이”였다고 위에 인용한 글에서 비판하고 있다.

    노동운동, 정직성의 추락

    그런 일이 오래 지속되니 노동운동의 정직성도 떨어져 왔다. 그동안 수시로 불거진 일부 노동운동가들의 도덕적 타락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정직하지 않은 노동운동’이었다. 도덕적 타락은 바로 운동적 타락으로부터 왔다.

    물론 1987년 직후 몇 년 동안은 ‘자기 월급만 올리는 노동운동’을 하여도 그 영향으로 다른 사업장의 월급도 올랐고 사업장의 분위기도 민주화되었으며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시절은 ‘자기 월급만 올리는 노동운동’만 해도 괜찮은 시절이었다.

    한 사업장에서의 투쟁은 다른 사업장에 영향을 미치고, 한 사업장에서의 노사관계의 변화 발전은 다른 사업장의 노사관계에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한동안 민주노조운동의 사회적 영향력이 매우 컸다. 아마 1997년까지도 그러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민주노조운동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87년의 활동가, 고참 노동조합 간부들이 여전히 깃발을 들고 집회에 참석한다. 민주노총의 집회에는 머리카락이 허연 장년들이, 늙은 노동자들이 주축을 이룬다. 대기업, 공기업에는 이들보다 늦게 직장에 들어온 사람들이 적기도 하거니와 노동조합 가입율도 낮고 가입하더라도 간부를 맡아서 책임을 지거나 앞장서지는 않는다.

    그래서 노동운동가들은 스스로 묻는다. “과연 우리들 1987년 노동운동 세대가 정년퇴직을 한 후에도 민주노조운동은 이어질 수 있을까?”

    차세대 노동운동 모색할 시점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차세대 노동운동’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지점에 왔다.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으로는 부족하고, 이제는 차세대 노동운동을 기획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1세대 노동운동,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2세대 노동운동, 즉 민주노조운동을 넘어서 제3세대 노동운동을 전망하고 그 가능성을 타진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의 20대, 30대가 주역이 되는 노동운동을 우리는 상상한다. 우리는 그것을 차세대 노동운동, 또는 3세대 노동운동이라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차세대 노동운동이 사회민주주의운동의 일부가 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가 차세대 노동운동을 주도하는 이념이 되리라고 본다. 그것은 민주노조운동의 이념이 NL과 PD였던 것과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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