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동맹이여, 그렇게 자신이 없는가?
        2010년 01월 12일 01: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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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나 했는데, ‘아직까진’ 역시나다. 1월 11일 북한의 평화협정 회담 제안에 대한 한미 양국의 반응을 말한다. 양국은 대북공조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북한이 먼저 6자회담에 복귀해 비핵화 진전을 이뤄야 평화협정 논의가 가능하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북한의 6자회담 복귀에 선물을 줄 수 없다며, 비핵화 조치 진전 이전까지 대북 제재를 유지할 방침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실상 북한에게 무릎 꿇고 나오라는 말이다.

       
      ▲ 조선중앙TV 화면 캡쳐

    한미 양국은 ‘선 비핵화, 후 평화협정’이 9.19 공동성명에도 맞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가? 9.19 공동성명 제5항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6자는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 원칙에 입각하여 단계적 방식으로 상기 합의의 이행을 위해 상호 조율된 조치를 취할 것을 합의했다.”

    여기서 ‘상기 합의’는 4가지로, 한반도 비핵화, 북미·북일관계 정상화, 대북 경제·에너지 지원, 한반도 평화포럼을 통한 영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이 바로 그것들이다. 9.19 공동성명에서는 이러한 합의를 동시에 논의·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 합의가 체결된 지, 50개월이 넘도록 평화협정 논의는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적어도 9.19 공동성명의 이행과 관련해서는 북한의 불만이 더 클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북한은 양보하는데

    기실 북한의 언행이 때로는 거칠고 도발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2009년 하반기부터 북한은 두 가지 중대한 양보를 했다. 하나는 ‘핵포기 불가’에서 “조선반도 비핵화는 고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대화와 협상을 통한 평화체제와 비핵화 달성 의지를 연이어 천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비록 조건을 달고 있지만 ‘영원히 끝났다’던 6자회담 복귀 의사 피력이다. 특히 11일 외무성 성명에서 평화협정 논의가 ‘6자회담 내에서도 가능하다’고 말한 것은 한미 양국에게 6자회담 복귀 명분을 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체의 비난을 삼가면서 평화협정 회담을 “정중하게” 제안한 것도 눈길을 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 양국은 기존 입장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여기에는 북한의 평화협정 회담 제의가 비핵화 초점을 흐리기 위한 ‘물타기’와 협상을 질질 끌어 핵 능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시간끌기’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의 제안을 수용하는 것은 그 의도에 말려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북핵 20년사’를 돌이켜보면, 북한의 핵 능력은 대화와 협상의 ‘부재’ 기간 동안 강화되어 왔다. 이는 한미 양국이 ‘선 비핵화, 후 평화협정’이라는 아전인수식의 경직된 태도를 고수해 대화가 재개되지 않으면 않을수록, 북한의 핵능력은 강화될 것임을 예고해준다. 누가 북한에게 핵개발의 시간을 주고 있는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타기와 시너지 효과

    ‘물타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핵문제가 분명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반도 문제는 북핵 발생 이전부터 존재해왔고, 여전히 북핵 이외에도 많은 숙제들이 있다. 북핵 해결의 원칙으로 포괄적 접근이 언급되면서 ‘북핵의 뿌리’, 즉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가 필요하다는 주문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다.

    오히려 북한의 평화협정 회담 제의는 ‘물타기’가 아니라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한미 양국이 평화협정 회담 제의를 수용하면, 북한에게 비핵화 조치를 더욱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는 카드를 쥐게 된다. 북한이 비핵화에 나서지 않으면 평화협정 논의도 중단할 수 있고, 비핵화에 응하면 평화협정에도 속도를 낼 수 있다. 이게 바로 9.19 공동성명에 깔린 협상의 법칙이기도 하다.

    평화협정 논의가 비핵화를 늦추는 것이 아니라 촉진할 수 있다는 주장은 결코 막연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비핵화 논의가 재개되면 핵심적인 의제는 북핵 검증과 핵무기 및 핵물질의 폐기, 그리고 우라늄 농축 문제 해결 등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들 의제들은 평화협정 논의에 진전이 없으면, 지루한 말싸움으로 끝나게 될 속성을 안고 있다.

    이러한 징후는 2008년 12월 6자회담에서 이미 나타난 바 있다. 한미일 3국은 시료채취와 미신고 시설 사찰을 포함한 강도 높은 검증의정서 채택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정전 상태’임을 들어 거부했고, 결국 6자회담은 좌초하고 말았다.

    이러한 전례에 비춰볼 때, 평화협정 논의 진전은 핵 협상의 난제 중의 난제로 일컬어지는 검증 문제에 중대한 돌파구를 열 수 있다. 이는 북한의 가장 강력한 ‘군사적 억제력’인 핵무기와 핵물질 폐기, 높은 수준의 신뢰와 고강도의 사찰이 필요한 우라늄 농축 문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한미동맹이여, 자신감을 가져라

    기실 한미 양국이 북한의 의도에 경계심을 나타내며 경직된 태도를 고수하는 것은 외교력의 결핍을 자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한미동맹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울 정도로 북한에 비해 압도적인 ‘하드파워’를 갖고 있다. 외교의 밑바탕이 된다는 막강한 하드파워를 가지고 북한을 으르고 달래면서도 20년 가까이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소프트파워’의 부재 때문이다.

    ‘소프트파워’는 매력의 발산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여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힘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와 상대방이 공유할 수 있는 공동의 목표는 무엇인지, 상대방에게만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변함으로써 상대방의 변화를 유도하고자 하는 준비는 갖추고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남-북-미-중은 물론이고 동북아와 세계의 공공재라고 할 수 있는 평화체제는 바로 이러한 소프트파워를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분야이다. 평화체제는 북한이 원하는 것이고, 모두가 달성해야 할 공동의 목표이며, 평화협정 회담 수용은 북한의 6자회담 복귀의 문을 열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걱정이 나올 수 있다. 북한이 평화협정만 얻고 비핵화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한마디로 기우이다. 비핵화와 평화협정은 두 개의 수레바퀴이다. 비핵화든, 평화협정이든 하나만 굴려서는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래도 못 믿겠다면? 북한의 핵포기는 일단 이뤄지면 돌이키기가 대단히 어렵다. 반면 평화협정은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언제든 ‘무효’를 선언할 수 있는 ‘종잇장’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유리한 게임이겠는가?

    * 정욱식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 최근에 쓴 책으로 『오바마의 미국과 한반도, 그리고 2012년 체제』가 있습니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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