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노총을 사랑하는 동지들께
    By 나난
        2010년 01월 12일 12: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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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로 민주노총은 창립 15년차를 맞이합니다. 돌이켜보면 1980년대 이래, 특히 ’87년 6월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 이래 노동운동의 부침은 끊임이 없었고, ’97년 IMF이후부터는 부침이 거듭됐다기보다 1990년대 중반부터 나타난 침체와 위기의 징후들이 현실로 구체화됐으며, 2009년에 들어와 위기 상황은 극에 달했습니다.

    노동운동이 안고 있는 위기 실태를 구체적으로 나열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는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단 한걸음일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는 일념으로 운동에 복무하고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말문을 열고자 합니다.

    세상의 모든 영역은 사실상 정치 카테고리에 갇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동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자본의 지배력이 제아무리 무소불위의 전횡을 휘두를지라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설사 노동운동이 기존 제도의 틀을 깨고 잘못된 사회를 갈아엎어 새롭게 재편할 만한 힘이 있다 해도 정치적 범주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며, 자본이 모든 반자본 저항세력을 제압하여 폭압적 노예제도가 성립된다 해도 그 세상 역시 정치에 의해 운용될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노동운동은 지금 기존 제도의 틀을 깨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는커녕 근근이 누려오던 권리마저 야금야금 박탈당하는 과정에 위태롭게 놓여 있습니다. 거꾸로 가는 사회의 주요한 저항 진지가 토벌될 위기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각설하고, 여러 가지 점에서 5년 단임제인 대통령의 임기 3년차이면서 지자체와 교육감 선거가 동시에 치러지는 2010년은 정세 변화에 커다란 분수령이 될 것입니다. 아니 한나라당의 압승 또는 신승과 민주당의 참패 또는 미미한 약진(현상유지), 그리고 진보정당들의 참담한 퇴보를 확인하는 6월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사이 노동운동이 개악된 노동법에 맞서 한번 쯤 용쓰는 상황을 기대해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진보정당 세력의 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 운동을 소홀히 한다면 결국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우매한 국민들의 높은 지지 속에 ‘권력 누수 현상은 없다’고 장담하는 이명박의 독주만 계속되고 말 것입니다.

    진보진영에게 2012년의 유리한 정치 지형은 결코 절로 오지 않습니다. 진보진영 모두가 아집과 기득권을 버리고 2010년을 아주 잘 보내야만 겨우 가능성을 내다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진보진영은 ‘우리에게 2010년 7월 이후는 없다’는 각오로 노동운동을 중심에 놓고 여러 변수까지 다 감안한 하나의 ‘2010 선거 전략(연대나 선거연합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것임)’에 힘을 집중하는 것이 최우선일 것입니다. 그래야만 민주대연합 같은 반한나라당 정치전선도 전략적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현존하는 진보정당들은, 그 당원들 중 상당수는, 그리고 특히 민주노총 조합원이면서 진보정당 당원인 동지들 중 상당수는 진보정당운동에서 노동운동을 그저 대상 또는 표밭으로나 생각할 뿐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 어떤 인사들은 노동운동, 특히 민주노총을 멀리해야만 득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민주노총이 진보세력 속에서도 고립되어 있다는 뜻도 됩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언제부턴가(아마도 노동운동의 침체․위기의 징후가 나타나면서부터) 민주노총의 선거는 가급적 사전에 충분한 조율을 거쳐 통합․단일후보를 놓고 찬반을 묻는 선거로 치러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었습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산별운동의 발전을 위해서! 그러나 지난 세월 그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는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정파운동에 좌지우지되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고, 현실의 벽을 넘어서기는커녕 저조차 현실에 물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이상적 경선이 되어 조직력을 정비하고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보다 그 후과가 더 크게 나타나는 현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 생각은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아마도 저뿐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비록 보궐선거였지만, 작년 4월 우리는 단독후보조였습니다. 통합후보라는 평가도 있으나, 결코 명실공히 모두가 인정하는 통합단일후보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정파들은 공조직의 발전과 방침에 힘쓰고 복무하는데 별로 책임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과 무관한 집행부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더더욱 이번 선거만큼은, 한번만이라도 이 엄혹한 정세를 모두가 십분 공감하여 다 같이 함께 책임지고 협력하는 집행부 선출을 진심으로 소망했고 그리되도록 알게 모르게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통합․단일후보 노력에 실패한 장본인이 갑자기 등록 마감 직전에 위원장후보로 등록하다니 대중들에게 어떻게 해명해야 합니까? 이유야 어찌됐든, 지지도야 어찌됐든 3파전이라는 조건 속에 한 조의 후보라는 것은 결코 ‘진정한 통합’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진정성을 설파한다 해도 3파전이라는 경선구도는 저와 함께하는 후보조에 기어이 색칠을 당하는 선거가 될 것이며, 결국 패권다툼처럼 될 것입니다. 이 구도에서 승리한들 지금 집행부보다 응집력을 보일 수 있을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대중 앞에 명쾌하게 해명할 합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저 이렇게 궁색한 변명밖에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첫째, 줏대 없고 모질지 못해서 마지막 10분을 버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출마 선언을 두 번 세 번씩 했으면서 대중과의 약속을 순간 저버렸습니다.

    둘째, 완전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산별대표자 논의에서라도 통합․단일보로 정리되지 못한 상황에 대한 어줍지 않은 책임감과 의무감,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현재 진행형인 몇 가지 사업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상반기 투쟁 조직, 진보정당세력 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 등.

    이 변명은 투명한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이 변명 속에 위원장 후보로서 저의 심각한 문제가 응축되어 있다고 판단합니다. 흔쾌하게 정리되지 않은 산별대표자들의 마지막 회의 끝에 몇몇 산별대표자들의 간곡한 권유와 상황논리에 의해 대중과의 약속을 한 순간에 저버렸다는 사실, 모순으로 점철된 어줍잖은 책임감과 의무감……쉽게 눈에 띄지 않을 수는 있으나 언젠가는 저의 그런 성격적 한계와 판단력이 조직에 커다란 누를 끼칠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언론을 통해 강력한 어조로 통합․단일후보를 요청한 바도 있었고, 그 자리에서도 불출마를 재삼 강조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일찌감치 예견되었던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모두에게 현 위원장의 권위와 지도력이 얼마나 우습게 취급됐는지 그 현실도 깨달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용산 장례식이 진행된 9일(토), 저는 그 중요한 장례식에도 불참하고 하루 종일 그리고 이 순간까지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저의 출마는 결코 논리적이거나 순리일 수 없습니다. 또한 비대위원장을 포함해서 지난 10개월 동안 민주노총을 끌어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떤 후보보다도 차기에 대한 준비가 안 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저의 역할은 여기까지이고 후보를 사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저는 이 일을 계기로 민주노총 위원장으로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기회마저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불과 20일도 채 안남은 임기이지만 현직 위원장직도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노총을 사랑하는 모든 동지들, 풍파를 일으켜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 * *

    누구보다도 신승철 총장에게 큰 누를 끼치게 됐습니다. 동반이기 때문에 바로 유탄을 맞는 것이야 아마도 얼마든지 감내해낼 것입니다. 다만, 저에 대한 신총장의 믿음과 기대를 너무나 충격적으로 무너뜨리는 것 같아 그 괴로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마지막까지 결단을 주저하면서 갈등한 가장 주된 이유는 신승철 총장이었습니다.

    신 총장, 정말 죽을 죄를 짓게 됐습니다. 더불어 지난 8~10개월 동안 참으로 잘 보필해 준 정의헌 수석을 비롯한 임원들 정말 미안합니다. 특히 정의헌 수석부위원장님 규정에 따르는 일이겠지만, 우리 집행부의 마무리를 잘 이끌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통합집행부를 세우고자 노력했던 많은 산별대표자들께 면목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무총국 동지들, 출마 소식을 듣고 격려와 용기를 불어넣어 준 수많은 동지들 고맙고 또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동지들, 모두가 저의 잘못입니다. 그럴거면 왜 대책을 마련할 시간을 주지 않았냐는 비난에도 할 말이 없습니다. 시간에 쫓기긴 저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보다 오랜 운동생명을 제 스스로 이렇게 죽일 수밖에 없는 참담함도 이해해 주십시오. 참으로 순수하게 노동운동에 헌신하다 멋진 은퇴를 하는 게 꿈이었는데……

    어쨌든 정파를 넘어 통합․단일후보를 조화시키기 어려운 현실의 벽을 다시 한번 비참하게 확인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미약했으나 저 또한 그 동안 정파적 사고와 시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처지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어떠한 조직적 조건이나 이유도 개인의 삶을 침해할 수는 없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낸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지는 더 고민하고 번뇌할 것입니다. 정확히 21년을 노동운동에 복무했다는 자존심을 팽개치지 않는 범주에서 개인의 삶을 다시 설계할 것입니다.

    저는 이제야 비로소 정파로부터 자유로워질 것 같습니다. 반면 오래도록 괴로울 것입니다. 그리고 기약 없이 외롭지 않겠습니까?

    2010년 1월 11일
    임 성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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