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살 없는 감옥에서 드리는 마지막 부탁
    2010년 01월 08일 10:18 오전

Print Friendly

이제 용산참사로 사망하신 철거민 다섯 분 열사들의 장례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제 용산참사 현장에서는 영하 14도의 강추위 속에서 284일째 마지막으로 여는 천주교 생명평화미사가 열렸습니다. 사실상의 장례미사여서인지 80여 분의 신부님들, 수녀님들, 5백 명에 달하는 신도와 시민들이 이 마지막 미사에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미사가 끝난 직후 고 이상림 씨의 아들 이충연 씨가 법원의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나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어머니와 그의 처는 끌어안고 울기에 바빴습니다. 같이 망루에 올랐다가 아버지는 죽고, 상주인 아들은 구속되어 이제야 아버님 영전에 향을 피우고 술잔을 올렸습니다. 너무도 기막힌 모습에 신부님도, 수녀님도, 철거민들도, 활동가들도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 지난 5일 용산 현장에서는 ‘용산 장례위원회’ 발족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손기영 기자)

이충연은 명동성당에도 들렀습니다. 조그마한 체구에 깡마른 몸으로 용산4구역 철대위 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망루 4층에서 가까스로 탈출하다가 허리뼈며 폐 등에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병원 입원 중에 구속되었고, 이제 1년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처음, 상주로서 사진으로만 남은 아버님 앞에 서서 향을 피우고 술잔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의 처는 아버님의 생사를 묻는 그에게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외면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TV 뉴스를 보고 결국 “그럴 수는 없다…”며 오열했다는 그 사람…….

1심 재판부는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화재가 발생했다며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를 죽인 아들’, 달리 말하면 패륜아인 셈입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의 동지들까지 연대하러 왔다가 사망하거나, 또는 구속되는 이 비극의 무게를 그 작은 체구로 온전히 짊어져야 했던 사람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허리 부상으로 짚고 다니던 목발을 내려놓고 두 발로 걸어서 왔다는 점일 것입니다. 우리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분노와 억울함을 누르고 나온 이충연, 그 비참을 이겨내기에는 너무도 작은 그의 몸은 몸 치수보다 큰 상복으로 인해 더욱 작아보였습니다.

남경남 전철련 의장과 전철련 식구들, 고 양회성 씨의 두 아들 등과 함께 짧은 해후를 가졌지만 그 시간 동안 내내 그의 아버님이나 어머님 얘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지금 가장 아픈 상처가 될 게 번할 거여서 서로 말을 피해가는 묵계가 자연스레 형성되었던 것이겠지요. 이런저런 말을 나누고, 술도 한잔 기울이다가 그들 부부를 보내고 나서야 우리는 찬바람 속에서 담배를 피우며 비로소 말했습니다.

“차라리 안 나오는 게 좋은 건지도 몰라.”
“장례 끝나고 어떻게 들어 가냐, 안 보낼 수도 없고, 들어가서는 어찌 살라고.”
그런 속에 하루 날짜가 바뀌었습니다.

너무도 가슴 아픈 장례식

어제부터 용산 철거민 유족들은 시신이 353일째 냉동고에 안치되어 있던 순천향병원 장례식장 4층에서 다시 분향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맞았습니다. 오늘 시신을 입관하고, 내일 오전 9시 발인식을 치르게 됩니다. 그리고 12시에는 서울역 광장에서 영결식을 갖고, 참사 현장인 남일당 앞까지 행진을 한 뒤 노제를 갖고 마석 모란공원에서 하관을 하게 됩니다.

장례를 하기까지 355일이 걸렸습니다. 유가족과 용산범대위는 장례를 지낼 수 있도록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할 것과 유가족들에 대한 생계대책 차원의 보상, 용산4구역 철거민들 생계대책을 위한 임시상가-임대상가의 보장을 요구했습니다. 처음에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없이는 장례를 지내지 않겠다는 ‘강경 방침’에서 한발 물러선 것이었습니다.

지난 8월 서울시와의 협상이 결렬된 것은 임대상가에 대한 논의조차 하지 않겠다는 서울시의 완강함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12월말 우리는 협상 테이블에서 위의 요구를 제시했고, 상당한 부분이 수용되어 12월 30일 극적으로 타결되었습니다.

언론들은 일제히 “용산참사 타결”이라는 제목을 달아 이 극적인 협상 타결을 보도했지만, 정확하게는 장례 문제에 대한 협상 타결이라고 해야겠지요. 1년이나 끌어온 장례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협상을 수용했지만, 유가족이나 용산범대위의 궁극적인 목적인 진상규명-책임자 처벌과 살인적인 재개발 정책의 전환은 요원한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어느 보수언론에서는 이런 협상 타결을 대표적인 ‘떼법의 사례’로 보도했고, 누리꾼들 중에는 이 협상을 두고 ‘시신을 볼모로 돈을 타냈다’는 주장도 해댔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유가족들의 아픈 가슴을 후벼 파는 잔인한 언어들을 구사하는 그들이 밉기까지 합니다. 정운찬 총리의 사과문은 분명 함량 미달이지만, 맥락으로 보면 지금까지 정부의 책임을 완강하게 부정하고 ‘사인 간의 문제’라고 고집 부리던 상황에서 총리가 책임을 인정했다는 사실로 보아 분명 진전된 변화입니다.

2008년 이후 이명박 정부의 강공 드라이브 앞에서 정부의 책임을 인정받기는 쉽지 않았다는 맥락에서 상당한 진전입니다. 그리고 재개발 정책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그 개선을 약속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그 외에도 구체적으로 밝히기에는 문제가 많지만 임시상가-임대상가에 대한 일정한 수준의 합의도 들어 있습니다. 한편 보상액수에 대한 보도도 많이 나왔는데, 감히 인명과 돈을 비교한다는 것이 가능할런지요. 백보 양보해서 그 액수를 따지더라도, 가장을 잃은 유가족의 생계대책과 관련된 문제이며 철거민들을 죽인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돈이라는 점에서는 솔직히 그 액수가 많은 것은 아닐 겁니다.

미흡한 결과를 두고 유가족들은 ‘반쪽의 합의’라고 평가했습니다. 맞습니다. 용산참사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산 중에 우리는 장례를 지내기 위한 첫 번째 작은 산을 넘었을 뿐입니다. 유가족들이 사계절 동안 상복을 입고 지내는 일은 끝내야 하는 상황을 맞아 부족하기 이를 데 없지만 장례를 지내야 할 때입니다. 이제 고인들을 평안히 쉴 수 있도록 보내 드리고 남은 과제들일랑 산 자들이 자신의 몫으로 짊어지고 나가야 합니다.

용산참사는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허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습니다. 국가폭력은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고, 소수부자들의 이익을 위해 진행되는 재개발을 포함한 개발에 우리가 저항해야만 한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에는 공분하고 애도하지만, 살인적인 재개발 사업에는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는 이중적인 태도를 갖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마음 놓고 용산참사로 돌아가신 분들을 애도할 수 없도록 해왔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진상규명-책임자 처벌과 더불어 잘못된 개발정책에 저항하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공동체를 건설할 과제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용산참사는 용산만의 문제가 아니고, 철거민들만의 문제가 아닌 보편적인 과제로 등장했던 것이고, 그런 문제를 외면할 수 없는 종교인들과 문화예술인들, 시민들을 모아냈던 것이라 봅니다.

그들은 얼마나 추웠을까?

지난 1년 가까운 세월, 우리는 절망하기도 했지만 희망을 보기도 했습니다. 용산범대위는 조직적 역량은 많이 부족했지만, 진보운동이 바닥을 치는 상황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전쟁같은 현장을 지키면서, 추모제도 삼보일배도 일인시위조차도 불법화하고 탄압하는 정권에 맞선 힘겨운 투쟁을 지속해왔습니다. 신부님들조차도 폭행당하는 폭력상황이 이어졌지만, 우리는 이겨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연대가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성금과 물품을 보내주고, 현장을 찾아주고, 미사와 추모제에 참석해주었던 사람들이 긴 시간 동안 너무도 감동적인 아름다운 연대를 만들어냈습니다. 정부의 공안탄압으로 위축된 조직운동, 그리고 촛불마저도 희미한 불꽃을 이어가는 어려운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던 용산의 힘은 이름 없는 이들에게서 나왔습니다.

신부님들을 비롯한 종교인들은 사람 생명이 죽어간 현장에서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성찰의 장으로 바꾸었고, 문화예술인들은 참혹한 죽음의 현장을 저항의 문화예술공간으로 바꾸어냈습니다.

이런 힘들이 흩어지도록 놔둘 게 아니라 이후에도 같이 힘을 모을 수 있도록 만들어내야 합니다. 장례를 지내는 것으로 용산참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을 우리는 이번 장례에서 같이 확인하고, 결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끝을 보겠다는 의지를 갖고 국가폭력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면서 진상규명-책임자 처벌을 이뤄내야 합니다.

재개발 문제에 대한 연구와 정책과 담론의 개발을 통해 제도와 법을 바꾸어내는 일도 우리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발이 묶인 저를 대신해서

오늘 아침에 문규현 신부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제 마지막 미사에 참석했다가 명동성당에 있는 우리 수배자들을 보지 못하고 내려왔다고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신부님에게 미안해야 하는 것은 우리인데 도리어 이런 전화를 받아야 하다니……. 서로 건강을 묻다가 서로 할 말이 없다는 얘기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유구무언. 무참하게 죽어서 냉동고에 355일이나 갇혀 있던 그들을 우리는 이제야 보내야 합니다.

“날씨가 참 차갑네. 냉동고에 1년이나 있던 그 사람들은 얼마나 추웠을까?”

신부님은 죽은 자들의 영혼을 생각하고 계신 듯합니다. 그 가여운 영혼과 이별하는 게 장례식입니다. 국민들의 정성과 힘을 모아 지내는 장례식을 엄수하고, 양지바른 곳에 묻어드린 뒤에 저는 경찰에 자진 출두하겠다고 누차 얘기했습니다. 1년이나 기다려온 장례식인데, 그분들, 너무 뜨겁게 아프게 죽어갔다가 너무 추운 냉동고에 갇혔던 이들인데, 그분들이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길에 함께 할 수는 없을까요?
1년 동안 상복을 입고 현장과 거리와 영안실을 울며불며 전전했던 유가족들, 장례 모든 과정 중에 너무도 많이 울어야 할 그 사람들, 장례가 끝나면 집 구석구석에서 고인들의 체취를 느끼고, 일상에서 그분들의 추억으로 괴로워해야 할 그 사람들, 1년을 같이 부대끼며 정들었던 유가족들을 마지막 위로하는 일이 우리 수배자들의 책무일 텐데……. 마지막 그 길에 저는 발이 묶여 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답답합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더라도 많은 분들이 참석하셔서 용산 철거민 다섯 분의 열사들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주시기 바랍니다. 영결식에 참가해서 행진하고, 남일당 현장에서 노제를 하고, 시간이 되시면 마석 모란공원 하관식에도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용산참사의 해결을 위한 우리의 결의를 다시 확인해 봅시다. 이 시대의 허위를 깨는 비수가 되었던 그분들, 우리의 양심을 두드리는 북이 되었던 그분들 앞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염원을 확인합시다. 이충연씨가 아버지 장례를 지내고 무사히 감옥에 들어가 우리를 의지하고 이겨낼 수 있도록 믿음을 줍시다. 범국민장이 엄수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석을 부탁드립니다. 저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