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레이시아 사회주의당을 아십니까"
        2010년 01월 08일 09: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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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호주 ‘사회주의 동맹’ 제 7차 전국회의(2010년 1월 2~5일, 시드니)에 초청받은 말레이시아 사회 운동가 시바란자니 마니캄(27)의 강연과 기자와 인터뷰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 시바란자니 마니캄 (사진=김병기)

    나는 어릴 때 부터 쿠알라룸프 외곽 지역에서 살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늘 가까이 있었다. 그들을 돕는 ‘사회봉사’ 활동에 참여했다. 말레이시아 국립대학 입학 후 다양한 학생복지 운동에 동참했다. 특히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학비 무료’ 투쟁에 집중했다. 사회 의식을 갖게 되었고 사회 운동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빈곤’이 교육/봉사/복지 운동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인식이 깊게 박혔다. 사회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투쟁에 공감했다. 그리고 대학에서 활동했던 ‘학생복지 서비스’가 ‘말레이시아 사회주의당’(PSM)의 학생 조직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망설임 없이 2004년에 PSM 당원이 되었다.

    말레이시아 사회주의 운동

    중국 공산당에 고무된 말레이시아 공산당(PKM)은 1930년 4월에 창설되었다. 대중들의 폭넓은 지지 속에 ‘반일제 해방 투쟁’(1941~45년)을 주도했다. 영국 정부는 일본 패망 뒤 PKM의 합법화를 힘있게 약속하며 해방 투쟁을 적극 지지했다.

    제 2차 세계 대전 후 다시 말레이시아를 점령한 영국은 ‘PKM의 합법화 약속’ 을 손바닥 뒤집듯 가볍게 묵살했다. 3년 평화 시기 동안 PKM과 영 제국주의의 갈등은 점점 깊어졌다. 1948년 PKM 지도자 친 펭(Chin Peng)은 영국이 ‘말레이 비상사태’라고 부르는 ‘반영 민족해방전쟁’을 선포했다. 12년 뒤 1960년 PKM의 ‘말레이 민족해방군대’는 밀림 속으로 패주하듯 흩어졌다.

    1960년 노동당과 민중당의 합당으로 ‘사회주의자 전선’이 창당되었고 1974년에는 ‘말레이시아 민중사회주의당(PSRM)’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990년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해체되자 황급히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지워버리고 ‘말레이시아 민중당(PRM)’으로 개명했다.

    1930년 PKM 창당 이후 줄기차게 지속되었던 사회주의 정당 활동이 60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1998년 말레이시아 사회주의당(PSM) 창립으로 그 역사는 다시 이어지고 있다.

    말레이시아 사회주의당 (PSM)

    1990년 PSRM의 변절로 기층 민중들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 자신들을 조직해야만 했다. 대농장 노동자, 도시 빈민, 공장 노동자, 농민들 사이에 민중 동맹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했다.

       
      ▲ 말레이시아 사회주의당 로고

    1994년 수도 쿠알라룸프에서 성공적인 대규모 시위로 자신감이 붙자 1995년부터 그들의 계급적 이익을 실현하는 정당 건설 논의에 탄력이 붙으며 폭넓게 진행되었다. 사회주의 정당 건설로 의견이 모아졌다. 2년 넘는 준비 기간을 거쳐 1998년 메이데이 5월 1일 PSM이 창당되었다.

    말레이시아 헌법이 정당 설립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음에도 정부와 집권 여당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며 PSM의 정당 등록을 허가하지 않았다.10년간의 끈질긴 투쟁을 통해 2008년 6월 마침내 합법적인 정당으로 등록되었다.

    PSM 당원들은 먼저 13분과로 되어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완전히 이수해야만 한다. 한달에 1분과씩 진행되므로 13개월이 걸린다. 교육 내용은 맑스/레닌과 사회주의 사상가들, 국내/해외 혁명사, 여성해방, 소수 민족 인권등으로 짜여져 있다. 교육 기간동안 다양한 대중 활동과 조직 사업에도 참여한다.

    억압받는 민중 네트워크

    모든 정치적 활동을 지도하는 중앙당이 있다. 지역에는 지구당 또는 대중 단체가 있다. 즉 PSM의 대중 단체가 있는 지역에는 지구당을 건설하지 않는다. 대중 단체 회원 모두가 PSM 당원이므로 지구당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대중 활동 방식은 말레이시아인들에게 ‘사회주의’ 단어는 여전히 일정 정도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민중들을 조직하는 ‘지역 발전센터’, ‘파도’, ‘노동자의 목소리’는 PSM의 근간이 되는 대중 단체들이다. 2002년 이후 수백 개의 ‘억압받는 민중 네트워크’(JERIT)들이 그 대중 단체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전국 조직망을 갖춘 JERIT는 PSM 기층 대중 조직의 건실한 기반이자 PSM이 조직하는 대중 투쟁의 물리력을 담보하고 있다. JERIT의 회원중에는 PSM 당원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PSM 지지/후원자들이다.

    PSM은 의회주의 정당은 아니지만 선거에는 참여한다. 당의 정책을 선전하고 대중을 조직하고 지배 계급의 정책을 공격하기 위해 선거를 활용한다. PSM 창립은 1998년이지만 정당 등록은 10년 뒤인 2008년에 허가되었기 때문에 1999년, 2004년 선거에서 PSM 후보들은 다른 당의 이름으로 출마해야만 했다. 제대로 선거 운동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PSM 지지율의 꾸준한 증가로 마침내 2008년 연방 국회와 지방 의회 선거에서 각각 한 명씩 당선되었다. 패락과 셀란고 선거구의 PSM 후보 당선은 20년 넘게 다져왔던 지역민중 조직 역량의 쾌거였다. 2008년 당선 이후 당원과 지지자들의 증가가 두드러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반대 와 보안법 폐지 투쟁

    최근 몇년 동안 반신자유주의 투쟁에 집중하고 있다. FTA 반대 투쟁으로 말레이시아-호주 FTA 협정이 부결되었다. 공기업의 민영화 반대 투쟁 특히 서민들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는 병원의 민영화 반대 투쟁에 힘을 쏟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 위기로 더욱 열악해지는 도시 빈민 주거권 투쟁, 노동자들의 최저 임금 투쟁, 농민들의 경작권 투쟁들도 이겨내야만 한다.

    가장 대중들의 관심과 지지가 높은 투쟁은 국가보안법(ISA) 폐지 투쟁이다. 영장없이 의심되는 사람을 60일 동안 구금할 수 있고 어떤 연락과 접견도 허락되지 않는다. 심문 중에 구타와 고문 등이 행해진다. 60일 구금 이후에는 대부분 ‘특별 수용소’로 이송된다. 최소한 2년 동안 수형 생활을 해야만 한다.

    지난해 8월 5만 명의 시민들이 쿠알라룸프에서 대규모 시위를 한 이후 ‘특별 수용소’ 양심수들 거의 대부분이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런 유화 제스처와 상관없이 보안법 완전 폐지 투쟁은 더욱 강력하게 정부와 여당을 밀어 붙이고 있다.

    상영된 PSM 슬라이드 한장이 눈길을 끌었다. 민주노총 노동자 총 파업을 지지하는 플레카드와 피겟을 들고 시위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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