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2010년 01월 06일 10:13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죽음을 부르는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다. 불의가 검은 강물처럼 넘실거리고, 죄악의 독버섯은 활짝 꽃을 피웠다. 권력자들의 추악한 거짓과 노골적인 탐욕이 갈수록 당당하고 뻔뻔스러워지는데 허다한 생명들은 무참히 시들어간다.

    지난주 두 건의 재판 결과는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 발전에 백해무익한 정치집단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해 주었다. 국민의 보편적 권리를 위해 마련된 갖가지 권능을 특정 자본권력과 극소수를 위해서 그릇되게 남용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국민에게는 가혹한 철퇴를 휘두르고 있으니 도저히 정부라고 볼 수 없고 차라리 강도 집단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참사발생 이전부터 참사 287일째를 맞는 오늘까지 국가의 어떤 기관도 일터와 삶터를 빼앗긴 채 울부짖는 국민을 편들어 주지 않았다. 용산구, 서울시, 경찰청, 정부 여당 그리고 검찰과 법원이 하나로 똘똘 뭉쳐서 궁극적으로는 재개발건설사의 이익을 도모했다. 그런 점에서 판결의 의미는 실로 중차대하다. 앞으로 자본권력의 이해에 맞서는 자는 누구나 이와 같은 최후를 맞을 것이라고 국가기관이 공적으로 선고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선언문, 2009. 11. 02

    한나라당과 그 정권을 용서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이렇게 잘 정리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너무나 정확하고 절절하게 말하고 있네요. 그런데 여기서 빠뜨려서는 안될 게 있습니다.

    때려죽이는 것, 태워죽이는 것, 말려죽이는 것, 굶겨죽이는 것, 방치해서 죽이는 것, 이런 것들 사이에 본질적 차이는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잔혹하여 세인의 눈을 계속 붙들고 있는 용산학살 만행이나 쌍용차 폭압만행과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 없는 가혹하고 비극적인 상황이 자신의 존재조차 알리지 못한 가운데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극적인 사건, 사태, 현상, 그래서 주목받는 것들 뒤에 가려있는 이 일상적 비극과 참상들은 오히려 지속적이고 광범합니다. 개인적이거나 충격적이지 못해 주목받지 못하고 사회문제화되지 못할 뿐입니다.

    주목받지 못해 더 비참한

    대표적인 예로 비관자살자가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보다 많아진 현실을 들 수 있습니다. 작년 한 해 1만 2,858명이 삶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통계청 자료)고 합니다. 광주에서 죽어갔다고 말해지는 2,000여 명보다 6배도 더 되는 사람들이 삶을 비관하여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들 외에는 울어주는 사람도 없는 가운데…. 죽음에 관한한 일 년에 광주의 비극이 여섯 번도 더 일어나고 있는 셈이지만 이것은 사건조차 못되고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죽어가는 사람, 산재사고로 죽는 사람, 고칠 수 있는 병임에도 돈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까지 합하면 아마 연간 수만 명이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는다는 말입니다. 다른 모든 문제는 일단 제껴두고 이 문제만 봅시다. 죽음보다 더 중시해야 할 문제는 없으니까요.

    비관은 어디서 시작됩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헤어날 수 없는 곤경과 난관에 처했을 때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결코 나약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을 때, 아무리 뛰어다녀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을 때, 아무리 발버둥쳐도 해고의 칼바람을 비켜갈 수 없을 때, 풍년이 들어도 그것이 즐거움이기는커녕 골칫거리가 될 때, 사업이 되지 않아 길거리로 내몰릴 때 죽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아파트값 폭등으로 누구는 졸부가 되는 한편에서 내집 마련의 꿈을 다시 먼 미래의 일로 미루면서 변두리 셋방으로, 비닐하우스로, 쪽방으로 내몰려야 하는 사람들도 그럴 것입니다. 대기업, 재벌기업들은 돈벌이가 잘되어 돈이 쌓여가고 공기업은 신의 직장으로 부러움을 사는 한편에서 인생의 바닥을 향해 추락하는 사람들에게 자살은 달콤한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누가, 어떤 집단이 이런 현실을 초래했습니까? 적응력이 없어, 아니 경쟁력이 없어 도태되는 것이니 그것은 당사자의 문제라고요? 만일 대한민국이 개인의 삶의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보지 않는 사회보장제 국가였다면 비관자살이 이렇게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겠습니까?

    권력을 번갈아가며 장악한 경제성장 지상주의 세력은 성장의 과실을 공정하게 분배할 생각이 아예 없습니다. 그 결과 돈은 자본가들과 부동산 부자들에게 집중되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빈곤층으로 추락했습니다. 자산과 소득의 양극화, 대기업과 중소영세기업의 양극화, 서울과 지방의 양극화는 경제성장의 한 축을 담당한 사람들을 과실배분에서 끊임없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니네가 권력 잡으면, 살림살이 나아지느냐, 자식놈 등록금 못 구해서 은행에 데려가 입학도 하기 전에 새파란 청춘을 빚부터 지게 만드는, 그래서 자식놈 볼 면목 없어 술쳐먹고 애꿎은 여편네한테 주정이나 해대는 못난 애비들 없어지겠느냐?

    대학 가고 싶다던 여식아 여상에 보내 취직시키고, 첫 월급 받아 담뱃값 줄 때, 그 때 느끼던 그 기분을, 그런 슬픔을 없이 할 수 있겠느냐? 삼십년을 일을 해도 집 한 채 못 구하고, 늘은 것은 빚하고 술밖에 없는 이런 인생들 줄어들겠느냐?"

    권력이 된 자본, 자본의 도구가 된 권력

    노무현 전 대통령이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말했습니다. ‘권력은 점차 기업으로 옮겨간다’(2003-07-03. 제1회 대통령 과학장학생 장학증서 수여식에서)고. “따져보면 오늘날 강력한 힘을 가진 파워게임의 장은 시장이며, 시장에서 우위를 가진 사람이, 다른 제도들을 강요, 움직일 수 있다”면서 "기업의 선택권이 정부의 선택권을 제약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정부는 시장에서 경쟁하는 우리 기업들에 유리하도록, 한국의 시장이 이익을 보장해 주는 게임의 법칙을 만들어 줄 수 밖에 없다”면서 “권력은 점차 기업으로 옮겨간다. 단기적으론 기업이 제약받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정책에 의해 정부의 정책이 움직여 갈 수박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얼마 후 다시 말했습니다. ‘권력은 기업으로 넘어갔다.’고.

    ‘국가는 계급지배의 도구’라고 말한 맑스가 한국에 되살아 난 것 같습니다. 나는 국가의 실상을 노무현 전 대통령만큼 솔직하고 명료하게 토로한 한국의 정치인을 알지 못합니다. 국가를 실질적으로 통치한 경험을 가진 전직 대통령의 이 짧은 말이 한국이 해결해야 할 여러 과제에 대한 접근 방향을 아주 잘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한국은 대기업 내지는 재벌의 나라가 된 지 오래입니다. 삼성 하나만 두고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삼성이 가진 막강한 힘은 경제적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한국을 움직이는 각계의 유력자 중 삼성 장학생 아닌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삼성은 돈으로 자기 사람들을 만들고 있으며 그런 노력으로 자본권력으로서 군림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의원이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한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 위기는 민간부문이 이익의 극대화에만 치우쳐 사회의 공동선을 경시해서 발생했다”, “경제 발전의 최종 목표는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공동체의 행복 공유에 맞춰져야 하며, 정부는 공동체에서 소외된 경제적 약자를 확실히 보듬어야 한다.”

    여기서 민간부문은 대기업 내지는 재벌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거대 보수양당의 대표 선수들이 말한 것을 종합하면 이렇게 됩니다. ‘국가권력까지 좌우하는 기업(=자본)’의 ‘이익 극대화를 위한 탐욕’이 경제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민생고입니다. 그렇다면 민생문제 해결책은 자본에 휘둘리지 않는, 자본을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국가로 권력교체하는 것입니다. 노무현 전 민주당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말 속에서 내가 발견한 해법입니다.

    한나라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당도 심판 대상

    민생고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심판해야 할 당은 한나라당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노 전 대통령과 박 전 대표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내가 민주당도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난 대통령선거와 총선에서 심판받았으면서 그동안 면죄부를 받을 어떤 변신도 없었다는 그런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가관은 민주당의 국가관이자 한나라당의 국가관이기도 합니다. 노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과의 연정을 제안한 사실은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충분히 그럴 근거를 가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국가관의 일치입니다.

    구체적인 정책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있지만 ‘기업의 정책에 의해 정부의 정책이 움직여 갈 수 밖에 없다’는 정책기조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같은 당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한나라당과 함께 민주당은 부정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는 자본의 시대가 아니라 인간의 시대, 경쟁과 배제의 시대가 아니라 협력과 공존, 상생의 시대가 되어야 합니다. 두 보수 정당이 그간 보여준 여러 가지 행태나 정책은 사실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나 옹호하는 체제(자본주의적 가치와 자본주의체제)와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순진한 도덕주의의 과오

    그들의 정책이나 행태를 그들의 잣대와 다른 잣대(인도주의나 진보주의)로 평가하고 비난하는 것은 정치에 관한 순진한 도덕주의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에서 잘 드러나듯 정치에서는 계급적 당파성이 실제로 관철되고 있는데 이것을 망각하고 도덕주의에 빠져버리면 정치를 통해서 해결해야 할 ‘사회의 인간화와 민생의 안정’은 영원한 숙제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민주당 중심으로 한나라당을 심판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민주당의 민주주의는 어떤 민주주의 입니까? 나는 민주당의 민주주의를 앞에 인용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을 통해서 이해합니다.

    “ 단기적으론 기업이 제약받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정책에 의해 정부의 정책이 움직여 갈 수박에 없다”, “권력은 기업으로 넘어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 말이 민주당 민주주의의 상한선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민주당이 잘못해서 국민이 심판한 것이고 그 결과가 오늘의 이명박 정권이라고 말들 합니다. 그런데 민주당이 잘못했다는 사례로 등장하는 것들, 한미 FTA추진, 이라크 파병, 부동산과 아파트값 폭등, 양극화 심화 등은 국내외 자본의 이해와 직결되지 않는 게 없습니다. ‘기업의 정책에 의해 정부의 정책이 움직여 갈 수 밖에 없다’고 실토한 대통령과 당이 자본의 이익을 대변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결과가 위에서 말한 사례들입니다.

    민주당의 민주주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문턱을 넘어설 수 없는 민주주의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 민주대연합을 주장하는 분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도 이런 민주주의입니까?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폭주, 독주, 독선과 권위주의로의 회귀만 문제삼는 그런 민주주의 대연합입니까? 그 정도면 민주당을 중심에 세우는 방안을 주장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박근혜 전 대표도 인정하듯 ‘자본의 탐욕’이 초래한 것이 경제위기이고 그 경제위기의 결과로 도탄에 빠진 민생을 해결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민주주의는 민주당의 민주주의와는 다른 민주주의, 즉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아닙니까? 기업, 자본의 이해를 거슬러야 가능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민주당의 민주주의(자유=자본 민주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민주주의 아닙니까?
    반한나라 민주대연합은 성사되기도 어렵겠지만 민주당 민주주의의 이런 성격 때문에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발전할 가능성도 희박합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쟁점화해야 할 것-서울 독식과 지방쇠퇴

    사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집중적으로 쟁점화해야 할 것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자본편향과 함께 서울 편향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서울과 지방의 심각한 격차는 ‘지방은 서울제국의 내부 식민지’라는 말로 충분히 표현됩니다.

    국회를 삼분하고 있는 지역당들은 사실 자본가들의 당임과 동시에 서울당입니다. 고향에서 표만 싹쓸이 해가고 보답은 않는 고향배반당들입니다. 돈과 권력, 인재를 싹쓸이 하는 서울 독식구조는 영호남당들이 교대로 집권하면서 만들어낸 것이지 서울을 기반으로 한 당이 있어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기초·광역의회, 국회 모두 지역구 의원수가 비례의원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지역을 대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핑계를 대지만 사실은 정당명부비례대표 의석을 늘릴 경우 일어날 양당구조 와해, 즉 보수양당 독식구조의 와해를 두려워해서 그런다는 것 그들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지방과 서울의 격차, 아니 지방의 몰락은 공기업 본사 이전이나 혁신도시, 세종행정복합도시 같은 정책으로 접근할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서울과 지방, 그리고 지역간 불균형을 해소하려면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중앙정부가 권한과 재정을 독점하는 중앙집권국가체제 아래서 지금과 같은 지방자치제는 분권과 자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 포장하는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이건 이미 상식 아닙니까?

    중앙집권국가체제를 연방형 지방분권국가체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적극적인 논의가 필요합니다. 지방선거 시기가 제일 좋은 계기입니다. 끝으로 경쟁과 대결, 상호배제의 자본주의적 가치가 아닌 협력과 공존, 상생의 사회주의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진보적 대안으로서 사회보장제국가, 연방형 지방분권국가가 활발하게 논의되기를 기대해봅니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