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는 왜 이 체제를 받아들일까?
    뼛속까지 대중-한국적 담론 창출하자
        2009년 12월 24일 08:0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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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우연치 않게 조지 오웰의 여러 에세이들을 보게 됐는데,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에세이는 제2차대전 초반에 쓴 <The Lion and the Unicorn>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대개 오웰을 반전체주의 작가로만 아는데, 사실은 그는 상당히 독특한 사회주의자였어요.

    조지 오웰의 인생 제일 화두

    영국 노동당의 대중성에 끌리면서도 그 비겁한 ‘온건성’에 찔리고, 공산주의자들의 급진성에 끌리면서도 서반아 내전 시의 그들의 정적 숙청에 커다란 실망을 하고, 트로츠키주의적 신문, 잡지 (특히 미국의 <파티잔 리뷰> 등)를 열독하면서도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그 기독교 신학을 초월할 만한 도식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이러한 좌파적인 정치 낭인이었어요. 아주 독특하고 시적인.

       
      ▲필자.

    모든 사회주의자들에게 그렇듯이 그에게는 "노동자들이 이 체제를 왜 받아들이는가?"라는 화두는 인생의 제일 화두이었는데, 위에서 말한 에세이는 그 답변의 시도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오웰이 노동자에게 혁명/계급을 ‘민족’이 대체했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노동대중들의 민족/애국주의는 꼭 ‘위에서 주입된 이데올리기’라기보다는 (그런 측면도 있지만)거의 자연발생적이다 싶은 일종의 ‘자애자중의 감’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습니다.

    그가 본 노동자들의 ‘영국 민족’은 학술적으로 정의되는 ‘공동 언어, 문화, 시장을 기반으로 한 수평적 연대’라기보다는 일종의 ‘속살, 관습, 아비투스’입니다.

    태어난 지방의 사투리를 쓰고 매일 저녁에 같은 주막에서 맥주를 마시고, 축구를 자존심으로 삼고, 그리고 모든 외국 것들을 다 ‘이상하다’고 느끼는 습성부터, 영국의 선거제나 사법부를 "문제는 있어도 일단 기본적으로 부패하지 않고 민의를 대변한다"고 고집스럽게 믿는 부분까지, 이 모든 것들은 다 노동자 대부분의 ‘영국성’ (Britishness)이었는데, ‘국제연대’를 외치는 극소수 지식인들의 그 어떤 노력도 이 유서 깊은 ‘습성의 영역’을 바꿀 수 없다고 그가 단언했습니다.

    영국노동자들의 ‘영국성’

    그리고 1920년 러시아 내전 간섭 반대 운동 이외에 영국 노동자들이 국제주의적 행동을 취한 적도, 앞으로 취할 가능성도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노동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믿는 모든 이들에게 아주 거북스럽게 들리는 ‘쓰라린 진실’이지만, 오웰의 역할이라는 게 원래부터 ‘불편한 진실 말하기’ 아니었을까요? 그것이야말로 오웰의 불멸의 가치입니다.

    노동자들에게 ‘이윤의 경향적 저하 법칙’을 잘 설명(설교?)하기만 하면 그들이 당장에 벌떡 일어나 불란서와 독일의 노동자와 연대해 영구적 혁명의 대열에 나설 것이라는, 일각의 나이브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설전하느라 오웰이 여기에서 약간의 ‘오버’를 하긴 했습니다.

    실제 최근 같으면 영국 노동자들이 폴란드 등지로부터의 이민 노동자들과 연대 행동을 꽤 잘 하긴 하고, 비록 아직도 "주된 부분이 됐다"고 할 순 없지만, 국제연대를 전혀 못한다곤 말할 수 없죠. 자본주의가 지구화돼가는 상황인지라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죠.

    그런데 ‘오버’가 있었다 해도 오웰의 말에는 근본적 진실의 일말은 담겨져 있긴 해요. 그렇습니다. 자본은 지구화돼가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대개 ‘국지적’ 인간들입니다. 자본가들이야 영어 실력이나 국제여행 연혁부터 화려하지만 노동자의 ‘국제경험’이란 잘해봐야 일본에서의 불법 체류 및 노동과 값싼 4박짜리 중국 내지 월남 여행 정도입니다.

    자본가는 유럽이나 일본 요리를 즐기지만 노동자는 여전히 삼겹살과 소주로 울고 웃고 삽니다. 강남족의 자녀들은 이미 중, 고등학교 때부터 세계 고전 공부를 잘하여 세익스피어의 연극을 관람하면서 즐길 줄 알지만, 노동자의 ‘문화’란 장동건과 김태희, 그리고 잘돼야 도올의 텔레비전 논어 강의 정도일 것입니다.

    국제적 자본가와 ‘국지적’ 노동자 

    일언이폐지하면, 자본가에게 다층적, 다각적 ‘세계’가 열려 있지만,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한국어와 한국 텔레비전, 한국식 대중요리와 오락,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평생의 (감옥과도 같을 수도 있는) ‘국내살이’입니다.

    그러기에 노동자는 꼭 ‘민족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마트에서 하루 종일 한 번 앉지 못해 일하느라 다리와 허리가 아파 죽겠는데, 뭔 ‘민족주의’가 필요하나요? 그 따위는 여유있는 인간들의 관심거리죠), 대개는 ‘한국적’이지 않을 수 없죠.

    그러한 측면에서는, 미국에서 체류하느라 병역을 면탈하는 ‘국제인'(부자집 자식놈)들에 대한 대다수 한국 노동자들의 분노는 십분 이해할 만합니다. 감옥 죄수는 감옥 옆의 호화 일식집에서 초밥을 즐기는 간수의 친척을 왜 사랑해야 합니까? 당연 밉죠.

    그러면, 이 현실에서 사회주의자가 할 일은? 두 가지라고 봅니다. 하나는, 그 모든 ‘경향적인 법칙’들을 학회 시간이나 학습시간에 이야기하는 걸로 하고, 대다수 한국인들이 찬성할 수 있는 ‘대중적, 뼛속까지 한국적 담론’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마트에서 일하고도 공짜로 대학에 갈 수 있는 세상을 위하여", "단칸방에서 사는 이들이 양질의 공공임대주택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을 위하여"라면 수많은 이들이 연대할 수 있겠지만, ‘동시다발적 세계 혁명’이란 어디까지나 ‘여유 있는 이들’을 위한 고심거리일 것입니다.

    "마트에서 일하고도 공짜로 대학가는 세상"

    그리고 또 하나는, 일본 노동자나 중국 노동자 등 이웃 나라 무산자들의 삶과 투쟁을 친숙하게 알 수 있는 대중화된 저서라도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이쪽에서 이마트와 삼성에게 맞서는 이들은, 비정규직을 양산하면서도 책임지지 않는 일본 기업들에게 맞서는 파견마을(하겐무라) 사람들과 점차 ‘아는 사이’라도 될 수 있죠.

    ‘아는 사이’를 넘어 친구가 되자면 산넘어산입니다. 말이야 쉽지, 국내식으로만 살게끔 구조적 조건이 다 맞추어져 있는, 국내라는 감옥에서 종신형을 살다 싶이 하는 분들에게 ‘국제 연대’란 결코 쉬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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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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