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향·한겨레, ‘한명숙 보도’ 다른 길
        2009년 12월 23일 09: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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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과 7개월 전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몸을 던져 서거했을 때 언론은 검찰발 받아쓰기 보도를 반성했다. 검찰도 ‘여론재판’ 우려를 낳지 않도록 조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검찰과 언론의 ‘관행’은 달라졌을까. 한명숙 전 국무총리를 둘러싼 의혹과 그 전개 상황은 물음에 해답을 던지고 있다.

    검찰 보도의 기본적인 형태는 검찰이 흘려주는 정보에 언론이 의존하는 구조이다. 검찰이 의도에 따라 언론을 이용할 수도 있다. 언론도 이를 잘 알고 있지만 ‘빨대의 유혹’은 쉽사리 벗어나기 어렵다. 검찰이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내용만 보도하면 밋밋한 보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언론 보도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빗나간 특종경쟁이 검찰 언론플레이를 가능하게 했다면 그 책임은 언론에도 있다. 한명숙 전 총리를 둘러싼 의혹은 결국 법정에서 가려지게 됐지만, 이번에도 ‘여론재판’ 논란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은 23일자 전국단위 종합일간지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경향신문 <임금하락 직격탄 ‘서러운 일용직’>
    국민일보 <수능 영어 듣기평가 50%로 확대>
    동아일보 <수능 외국어 듣기평가비중 현 중2부터 50%로 늘린다>
    서울신문 <교육위원 직선 위헌 소지>
    세계일보 <"북, 2년 전부터 김정은 후계작업 올 케이블 방송 통해 집중 홍보">
    조선일보 <"회사 잘 되는 게 노조에도 이익" 빨간띠 풀고 세일즈 전선으로>
    중앙일보 <"곽영욱 석탄공사 사장 지원하라고 정세균 산자부 장관 지시로 전화했다">
    한겨레 <"곽영욱 석탄공사 사장 응모 정세균 장관 지시로 도왔다">
    한국일보 <"정세균 대표, 곽씨 사장 지원 지시">

    언론이 검찰발 뉴스를 전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아니면 말고’ 보도 태도이다. 언론은 검찰 쪽 주장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일반인들은 언론에 나오면 ‘절반은 진실’로 믿게 마련이다.

    한명숙 전 총리를 둘러싼 의혹은 복잡한 것 같지만 간명한 사안이다.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이 2006년 12월20일 국무총리 공관에서 한명숙 전 총리에게 5만 달러를 직접 건넸는지 따지는 게 논란의 핵심이다.

    검찰과 한명숙 공동대책위는 핵심 논란의 지점에서 상반된 주장을 펼치고 있다. 검찰은 “5만 달러를 건넸다”, 한명숙 공대위는 “단돈 1원도 받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맞서고 있다. 언론이 취해야 할 보도 태도는 어느 한 쪽 주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는 게 아니라 차분하고 냉정하게 진실을 찾아가는 노력이다.

    검찰 주장 1면 머리기사로 뽑은 한겨레

       
      ▲ 한겨레 12월23일자 1면.  
     
       
      ▲ 경향신문 12월23일자 2면.  
     

    그러나 상당수 언론은 검찰 발표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물론 독자들에게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기사 제목과 내용을 실었다. 검찰의 일방 주장을 기사 제목으로 뽑고 1면에 전진 배치한 것은 한겨레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향신문이 2면에 <한명숙 전 총리 불구속 기소>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낸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한겨레는 23일자 1면 <"곽영욱 석탄공사 사장 응모 정세균 장관 지시로 도왔다">라는 기사에서 “한명숙(66) 전 국무총리의 뇌물수수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 권오성)는 22일 정세균(59) 민주당 대표가 산업자원부 장관 재임 때인 2006년 11월말께부터 곽영욱(69·구속기소) 전 대한통운 사장이 석탄공사 사장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사실관계를 확인중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한겨레는 “검찰은 ‘한 전 총리가 오찬 자리에서 당시 정세균 산자부 장관에게 곽 전 사장을 잘 부탁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으며, 석탄공사 사장에 임명되지 못하자 다시 한 전 총리가 곽 전 사장에게 ‘다른 공기업 사장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한겨레 "김준규 총장 출범 이후 대표적인 뇌물사건"

    한겨레 기사의 출처는 검찰이다. 검찰이 곽영욱 전 사장 진술을 근거로 주장한 내용을 기사로 담았다. 한겨레는 3면 <검찰, 돈수수 대가성 입증에 주력/변호인단 "허위진술 허점 밝힐 것">이라는 기사에서 “검찰도 한 전 총리도 이젠 ‘퇴로’가 없다. 검찰은 김준규 총장 체제 출범 이후 대표적인 뇌물사건이라는 점에서, 한 전 총리는 도덕성을 앞세운 야권의 ‘얼굴’ 중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재판 결과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설명했다.

    한겨레는 이번 사건을 김준규 총장 체제 출범 이후 대표적인 뇌물사건으로 규정했다. 곽영욱 전 사장이 건넸다고 주장하는 5만 달러는 2006년 12월 당시 환율로 5천만 원이 안 되는 금액이다. 액수로 본다면 ‘대표적인 뇌물사건’이라는 규정이 어색할 수 있다.

    정치권과 언론의 관심으로 놓고 보면 ‘대표적인 뇌물 의혹 사건’으로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겨레가 23일자 1면 머리기사로 내보냈다면 한 전 총리 혐의를 입증할 뚜렷한 증거라도 나온 것일까. 한겨레 보도만 놓고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한겨레 "완벽한 물증은 없다. 말과 정황만 있을 뿐"

    한겨레는 3면 기사에서 “한 전 총리가 곽영욱(69·구속기소) 전 대한통운 사장한테서 5만 달러를 받았다는 혐의를 입증할 완벽한 물증은 없다. 말과 정황만 있을 뿐, 배서된 수표같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없다는 뜻이다. 결국 곽 전 사장 진술의 신빙성, 이를 뒷받침할 정황증거가 무엇이냐에 따라 유무죄가 가려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한겨레 스스로 ‘완벽한 물증’은 없다고 밝히면서 1면 머리기사로 검찰 일방 주장을 전달한  이유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물론 다른 신문도 한겨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1면 <"공기업 사장자리 갈 거라고 한 전 총리가 내게 말했다">라는 기사에서 “곽영욱(구속) 전 대한통운 사장이 ‘내가 2007년초 대한석탄공사 사장에 임명되지 못한 뒤 한명숙 당시 국무총리로부터 ‘이번에 임명되지 못했으나 곧 다른 공기업 사장으로 가게 될 것’이란 말을 들었다’고 검찰에서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차이점이라면 조선은 한명숙 전 총리가 공기업 사장자리로 갈 거라고 말했다는 곽영욱 전 사장 진술에 관심의 초점을 뒀고, 한겨레는 정세균 현 민주당 대표가 산업자원부 장관 시절에 곽영욱 전 사장 석탄공사 사장 응모를 도왔다는 검찰 주장에 초점을 뒀다는 점이다.

    조선일보 ‘검찰이 밝힌 사건 전모’ 공개

       
      ▲ 조선일보 12월23일자 5면.  
     

    조선일보는 5면에 ‘검찰이 밝힌 사건 전모’라는 타이틀을 건 기사를 내보냈다. 조선일보 기사의 출처는 이번에도 검찰이다. 정확히 말하면 검찰 주장이다. 조선일보는 “검찰이 22일 한명숙 전 국무총리를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하면서, 그간 검찰이 수사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검찰 수사의 핵심은, 한 전 총리가 자신에게 공기업 사장 자리를 청탁한 곽영욱(수사) 전 대한통운 사장을 위해 실제 공기업 인사에 개입했고, 그 대가로 5만 달러를 받았다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중앙일보가 1면 머리기사를 통해 초점을 맞춘 부분은 한겨레와 유사하다. 중앙일보 1면 <"곽영욱 석탄공사 사장 지원하라고 정세균 산자부 장관 지시로 전화했다">라는 기사에서 “검찰은 한 전 총리에 대한 공소장에서 ‘한 전 총리는 2006년 12월20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당시 정세균 산업자원부 장관과 곽씨 등을 초청해 오찬을 함께 하면서 정 장관에게 곽씨를 잘 부탁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며 ‘곽씨는 오찬 후 다른 참석자들이 나가고 한 전 총리와 둘만 남게 되자 2만, 3만 달러가 든 봉투 2개를 전달했다’고 밝혔다"라고 보도했다. 

    중앙은 3면에 <"한명숙, 정세균 장관에게 곽영욱 잘 부탁한다 말해">라는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는 3면 <산자부-한전, 곽씨에 "사장 지원하라"연락…한 전 총리의 힘?>이라는 기사에서 검찰 발표를 해설 기사로 내보냈다. <검찰이 공개한 공소사실 요지 재구성>이라는 글씨와 함께 곽영욱 전 사장이 한명숙 전 총리에게 5만 달러를 건넨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도 곁들였다.

    동아일보 기사 이미지에 담긴 정치적 의미

       
      ▲ 동아일보 12월23일자 3면.  
     

    한국일보도 1면 <"정세균 대표, 곽씨 사장 지원 지시">라는 기사에서 “곽영욱(69·구속기소) 전 대한통운 사장이 2006년 대한석탄공사 사장에 지원하는 과정에 당시 산업자원부 공무원들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검찰이 밝혔다. 이 중에는 이원걸 전 산자부 2차관이 포함돼 있으며, 그는 검찰 조사에서 ‘정세균 당시 장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져 파장이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한명숙 공대위는 검찰 발표와 관련해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고 진술의 일관성과 신빙성도 없는 상황에서 병약한 70세 노인의 주장을 짜맞춰 작성한 공소장은 한국 검찰사의 부끄러운 기록으로 남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검찰 발표가 허술하다는 점은 언론도 인정하는 대목이다. 한국일보는 12면 <산자부가 미는데 왜 총리에 청탁>이라는 기사에서 “검찰 공소사실이 곽씨의 진술에 의존하고 있는 데다, 정작 인사청탁 대상이었던 석탄공사 사장에는 선임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속단은 이르다. 검찰로선 한 전 총리의 혐의를 입증할 ‘결정적 한방’이 없다는 뜻”이라며 “실제로 검찰의 공소사실에도 불구하고 곽씨 인사 로비의 전체 그림이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일보 "검찰 공소사실 곽씨 진술에 의존"

       
      ▲ 한국일보 12월23일자 12면.  
     

    검찰의 허술한 발표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다른 언론과 달리 경향신문은 검찰 발표에 의문을 제기했다. 경향신문은 2면 <한명숙 전 총리 불구속 기소> 제목을 통해 검찰의 일방 주장보다는 검찰의 법적인 행위를 있는 그대로 전달했다.

    경향은 <업계 "석탄공사 사장직 로비할 자리 아니다">라는 중간 제목을 뽑았고, 기사에서는 “대한통운 관계자는 ‘석탄공사가 해외로부터 수입한 석탄 비축장에 쌓인 물건에 대한 국내 운송권을 오래 전부터 대한통운이 갖고 있었다’며 ‘곽 전 사장이 석탄공사 사장직 공모에 나서면서 굳이 한 전 총리에게까지 로비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경향신문은 5면 <‘한명숙 수사’ 여야 없이 집중포화>라는 기사에서 “여야 의원들이 22일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한목소리로 검찰의 한명숙 전 총리 수사 행태를 질타했다”면서 “검찰 출신이 대거 포진한 한나라당도 ‘지켜보기 한심하다’며 비판의 대열에 가세했다”고 지적했다.

    경향신문 "한나라당도 검찰 지켜보기 한심하다 비판"

       
      ▲ 경향신문 12월23일자 5면.  
     

    경향신문은 “박민식 의원은 검찰이 한 전 총리에게 후원금을 낸 사람들도 조사하고 있다는 의혹과 관련, ‘핵심부분을 조사하면 그만이지, 후원금 낸 것까지 조사하는 것은 금도를 넘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12월23일자 지면만 놓고 보면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뚜렷한 관점의 차이를 보였다. 한겨레가 검찰 발표에 무게를 싣고 1면 머리기사로 치고 나갔다면 경향신문은 한발 떨어진 자세에서 검찰 발표의 진위를 살펴야 한다는 데 무게를 실었다.

    경향과 한겨레 누구의 선택이 옳았는지는 단정하기 이르다. 언젠가 진실이 밝혀진다면 언론도 보도태도에 대해 냉철하게 되짚어보는 과정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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