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류 종교와 사민주의 유감
        2009년 12월 20일 10: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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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제가 지금(한국 시간 19일) 이 글을 파리에서 쓰고 있습니다. 어제 여기에서 한국학 관련 교육/학술 기관 두 군데에서 특강을 하고, 이제 곧 떠나렵니다. 한 때 김옥균을 쏜 홍종우가 근무했다는 기메 동양미술관이나 한 바퀴 돌고 바로 갈 생각입니다.

    파리는 각종 미술관이나 헌책방 등이 하도 많아 떠날 때마다 왠지 죄인처럼 느껴집니다. ‘다’ 둘러보지 못한 데에 대한 자책감인 셈이죠. 저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역시 인간의 탐욕이란 무한하단 이야기겠습니다.

    한국 불교근대사 강의와 어떤 스님

    어제 파리 7대학에서 불교근대사 강의했을 때에 참 웃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청중 중에서 구주에서 선구적으로 한국의 선불교의 씨를 뿌리시는 한 스님 분이 계셨는데, 아무래도 영어 강의인지라 알아들으시는 데에 약간의 지장이 있으실 수 있었습니다.

    저도 우리말로 했으면 하지만, 1학년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기에 ‘학술 한국어’로 소통이 될 리가 없어 궁여지책으로 영어를 택했습니다.

    강연의 한 부분은 태평양 전쟁 때에 소장파 승려들의 일군 입대를 ‘장려'(강요)하고 그 무슨 ‘황군무운장구’ 기도회나 열고 전몰군인 정토왕생을 빌고 ‘야소교 믿는 미영 귀축을 죽여주는 것도 보살도’라는 광언을 해대는 불교 동네 ‘주류’들의 전쟁 부역 행위 이야기이였는데, 제가 그 뒤에는 전후의 한국 불교도 군사주의와 결별하지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기독교도만이 군목을 보낸다는 데에 대한 경쟁심을 느낀 불교 종단이 줄기차게 정부에 군승 군포교 허가를 요청해왔는데, 결국 1966년에 그걸 따내자마자 파월 병사들에게도 군승을 보내는 등 월남 침략 행위를 사실상 합리화했으며 국방부와의 당당한 ‘협력관계’를 구축해놓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불교 지식인/승려 입장에서는 일반 군복무보다 9주 훈련받고 군승으로 가는 것은 훨씬 나은 일이지만, 군종실의 불교 관계자들의 활동에서는 불살생계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많이 결여되지 않는가 라는 점은 제 이야기의 골자이었습니다.

    살인 훈련기관의 종교적 인정

    스님께서 아마도 제 이야기의 뜻을 충분히 간파하시지 못하신 것 같은데, ‘군 포교’라는 단어를 이해하시고 강의가 끝나자마자 본인도 군승을 역임한 바 있다고 말씀하시고 "군 포교의 중요성을 아직도 종단에서 다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앞으로는 보다 활성화하여 기독교 못지 않게 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군 포교의 태생적인 문제점을 이야기한 부분을 모르시고, 군 포교의 부족함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이신 듯한 눈치였습니다. 귀의삼보해온 유발인지라, 제가 승보에 대한 숭상의 염이 그래도 많이 남아 있어 스님 분을 곤란한 입장에 처하시게끔 해드리고 싶지 않아 그냥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모종의 씁쓸한 여운이 남아 있습니다. 군, 전쟁, 살생의 현실을 당연시하는 불교와 기독교는 무엇이고, 이 종교들을 그래도 진지하게 대하려는 우리 중생들이 무엇인지, 우리가 똘레랑스하지 말아야 할 부분까지 왜 이렇게 쉽게 똘레랑스하는지, 계속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요.

    군 포교 등 살인 훈련 기관인 군대에 ‘종교적인 인정’을 해주는 대사회적인 관계를 맺는 방식은, 제가 조계종의 신도증을 따고 싶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자의와 무관하게 군에 끌려간 이들을 위해서 불법을 설법하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군 당국과 협력하면서 군 생활과 종교 생활을 일치화시키는 데에 대해서는 저로서는 지나친 타협으로 느껴집니다.

    불교까지도 살생의 전문화를 당연시하게 된다면 과연 껍질밖에 남을 게 아닌가 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끌려가게 된 무고한 이들을 휴가시 설법, 예불 등의 방식으로 위해주되, 그들에게 살인 교육을 강제하는 사회적 장치들을 그대로, 아무런 단서도 없이 인정한다면 ‘석가모니가 없는’, 석가모니를 떠나버린 불교가 되고 말죠.

    내가 사민주의자가 될 수 없는 이유

    저는 ‘주류’ 종교(사실, 주류의 개신교 내지 천주교도 불교와 이 점에서 다를 게 없지만)에 대해서 이 점에서 많은 이질감을 느끼지만, 사실 요즘 진보신당 동지 분들 중의 일부가 지향한다는 ‘사민주의’에 대해서도 똑같은 유감을 느낍니다. 제가 사민주의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조계종 신도가 될 수 없는 이유와 매한가지입니다.

    근대적 사민주의 역사의 전환점은 1914년 8월초였죠. 원래 제2차인터내셔날의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약속한 대로 총파업을 통해 지배자들의 제국주의 전쟁 음모를 분쇄하고 그 대신에 전세계적으로 계급갈등을 노골화시키는 일 대신에, 대중의 ‘애국적’ 몰이해와 탄압에 겁을 먹은 불란서, 독일, 영국의 ‘주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제국주의적 살육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거나 카우츠키 등 극소수처럼 ‘소극적 반대’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총동원령, 극우파 암살단, 경찰들의 검거 열풍 앞에서 그들이 느낀 생체적 공포심을 저도 십분 이해합니다. 저도 겁이 많은 중생이기에 말씀입니다. 그래도 수백만 명을 도살하겠다는 전쟁의 귀신 앞에서는, 적어도 노동자들과 같이 살고 같이 죽겠다는 사회주의자 정도면 그 생체적 공포심을 그래도 좀 스스로 극복하고 끝내 국제주의적 반전주의의 의리를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우중들의 ‘애국주의’에 휩쓸린다면 그 사회주의의 마지막의 인도주의적 명분이 없어지고 말죠. 그런데 그 운명적 순간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스스로의 인도주의적 명분을 포기했으며, 유럽 ‘주류’의 범죄의 공범이 됐습니다.

    그 뒤로는 예컨대 영국 노동당 같으면 케냐 독립운동 탄압, 말레이시아 독립운동 탄압, 북부아일랜드 민족운동 탄압, 아르헨티나와의 전쟁 등등 영국의 수많은 전쟁들 중에서는 제대로 반대한 경우는 하나라도 있나요? 이라크 침략에 바로 영국 노동당 당수가 한 주범으로 나선 것은 어디 우연입니까?

    사민주의, 전쟁부역죄로 명분 잃어

    레닌 등 그 시대의 급진주의자들이 그 손에 필요 이상으로 피를 묻힌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들의 ‘테러리즘’을 맹비난한 유럽의 얌전한 사민주의자들의 손을 검사해보면 기절할 만하죠. 피밖에 보이지 않죠. 그리고 전자보다 후자의 처신은 훨씬 비겁하고도 미래지향성은 결여됐습니다.

    사민주의자들이 1990년대의 신자유주의 총공격에 무방비로 무너지고 신자유주의적 광풍에 많이 편승한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우리가 결국 한국의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을 건설하자면 과거의 급진파에게도, 나름대로 복지 모델의 디자인에서 좋은 결과를 거둔 일도 있었던 온건파에게도 배울 점을 배워야 하지만, 전쟁 부역죄로 그 명분을 잃은 온건파’만’을 따른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도주의적, 인간다운 사회주의의 명분을 전혀 살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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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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