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꿀에 50년 세월과 내 이름 건다"
        2009년 12월 15일 02:58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저녁 무렵 갑자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이다. 식은땀이 흐르고 속이 메스껍고 뭐가 꼬인듯하다. 어린 손자는 할머니에게 세상에 더없는 표정(?)으로 아픈 배를 호소했다. "할머니 배가 아파요" 할머니는 품으로 잡아들이시고 이마도 짚어보고 가만 가만 살피시더니 벽장 속에 고이 묻어두셨던 꿀병을 꺼내 오신다. 2~3숟가락 떠서 손자 입에 넣어주셨다. 그 달콤한 꿀맛에 아픈 배도 잡시 잊어버리곤 했다.

    입술주위를 샅샅히 뒤져서 빨아먹고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우면 윗옷을 가슴께로 밀어 올리시고는 ‘낫거라 낫거라 낫거라 낫거라아~“ “우리 손주 배는 똥배~ 할머니 손은 약손~~”“내 새끼 배는 똥배~ 할머니 손은 약손~~” 조용조용 뇌아리시며 둥글게 둥글게 배꼽주위를 손으로 한참동안 어루만져 주셨다.

    꿀맛에 취했나 할머니 무릎이라 편안해서 그랬나 스르르 잠들어 버린다. 얼마후 깨어나면 아프던 아랫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끗했다. 정말로 할머니손은 약손이었다. 간혹간혹 배가 아프고 싶어졌다. 꿀이 먹고 싶어서… ^^

    훗날 꿀은 밥알이나 음식을 삭히는 기능이 있어서 얹힌 속을 내리게 하는데 효과도 있고 할머니가 아랫배를 따뜻하게 마사지해주신 덕분이구나 이해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할머니의 손자 사랑하는 마음이 제일 큰 이유였슴을 안다.

       
      ▲ 벽장속 깊숙이 넣어두었던 꿀병(꿀단지)

    40년전 그때 그 어린손자는 에덴양봉원 가업을 이어 벌을 치는 사장이 되었고 온라인으로 도시민들과 정감어린 소통을 하며 벌꿀가족 이름으로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되었다.

    에덴양봉원은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추동리에 있다. 영동고속도로 새말IC로 빠져나와 좌회전 받아 직진하다 왼쪽으로 우천면사무소를 두고 지나면 조금 후 오른쪽으로 에덴양봉원이 보인다.

    에덴양봉원은 윤사장의 아버님이 먼저 시작한 사업이다. 1962년 편찮으신 어머님(윤상복사장의 할머니)에게 꿀이 좋다고 하는데 너무 비싸 떨어지지 않게 드시게 할 수가 없었다. 해서 직접 꿀을 떠보려고 두통의 벌을 사서 키우게 되었다. 그 효험이었을까? 꾸준하게 꿀을 드시던 할머니가 중하던 병을 털고 일어서시자 마을사람들도 놀라워했다. 그 일을 계기로 아버지는 양봉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할머니는 그후 40여 년을 더 계시다가 2006년에 97년 간의 역사를 담으시고 4대가 모인 온 식구들의 마음을 받으시며 하늘로 가셨다.

    하지만 너무도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골이 싫어 대학진학을 포기한 채 18세에 무작정 도시로 나가 5년여를 생활했다. 공장일도 하고 제과회사 납품영업사원, 볼링장 근무도 하다가 자영업에 자신감이 생겨 조그만 건어물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수십년간 해오던 농사와 양봉일을 힘겨워 하시고 아들이 내려왔으면 하는 눈치를 보여서 삭막한 도시 생활을 접고 1993년 고향 횡성으로 돌아왔다.

    벌 농사도 농사(農事)다.
    여느 작물과 같이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양봉은 자연과 밀접한 산업이므로 밀원식물은 많은데 벌들이 많은 양의 꿀을 따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어느 해는 풍년이 들어 꿀을 다량으로 준비했는데 미처 다 팔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별다른 해결책이 없이 4년여를 보냈다. 그 동안은 주로 꿀을 드럼으로 도매업자에게 납품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꾸려나갔다.

    그러다가 1997년 벌꿀 수입이 개방된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농업여건도 더 어려워질 것 같아 드럼으로 도매 납품하던 일에서 탈피해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기로 결심한다. 그해에 결혼을 하고 강력한 후원자인 아내(여왕벌 한애정)와 함께 직판을 시작했고 2000년 말에 드디어 에덴양봉원 홈페이지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나를 파는 마케팅

    ‘벌꿀은 부자지간에도 속인다’라는 이상한 속설 때문에 가슴앓이 하는 농가들이 많다. “이 꿀 믿을 수 있어요? 어떻게 믿지요?” 이 질문에 아무리 정성스럽게 답을 해도 돌아오는 메아리는 여전히 같았다. 윤 상복 사장은 이 지점을 뒤집어서 생각하고 고민했다. 말이 필요 없다. 소비자들이 믿게 만들면 된다. 어떻게? 생산과정을 공개하는 것이 급선무라 판단했다.

    양봉인의 애환(이동양봉)을 공개하다

    벌은 1년 농사다. 도시민들은 대게 꿀 하면 아카시아꽃이 한창일 때부터 추석이나 설 명절 때만 연상을 하지만 양봉농가는 1년 내내 마음 놓을 날이 없다.

       
      ▲ 한겨울 트럭에 벌통을 싣고 있다. 윤사장은 그위에 에덴의 마음을 한켜 더 싣는다.

    12월말이면 벌통을 싣고 경남 창원으로 내려가 4월말까지 벌들의 세력을 키운다. ‘벌을 기르는 것’이다. 양봉(養蜂)의 의미 그 자체다. 여기서 왕성하게 세력을 키워야 이후의 생산과정이 순조롭기 때문에 온 정성을 다해 벌을 보살피는 것이다.

    5월 들어서면 경주를 거쳐 여주에서 꿀을 따고 횡성으로 올라온다. 5월말 6월초에는 강원도 철원으로 밀원을 따라 올라가 작업을 한다.

       
      ▲ 이동양봉장 양봉텐트안의 풍경이다. ‘벌을 친다’는 삶의 고단한 실재(實在)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길어온 물은 한겨울 텐트 속에서 얼어버려 그 얼음을 깨서 밥을 지어먹는다. 천막(양봉텐트)안에서의 그 황량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철원 김화에서 군대생활을 했다. 25년이 지난 일이지만 한겨울 동계훈련의 고단함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아무리 두껍게 옷을 껴입어도 자고 일어나면 팔이 뒤틀릴 정도의 추위속에 웅신 거리며 밥을 먹어야 했던 서글픔과 웬지 모르는 퀭한 마음…

    해서 한겨울 천막안 양봉인들의 애환을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한다.

    이런 고생 끝에 만드는 벌꿀은 돈을 받고 파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윤 상복 사장은 “꿀 한 병을 팔 때 이 윤상복이도 같이 파는 거예요”라고 이야기한다. 이동양봉을 하면서 겪는 사연들을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리기 시작했고 소비자들은 에덴양봉원 가족들의 벌꿀 생산과정을 생생하게 들여다보면서 에덴양봉원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진짜꿀과 가짜꿀을 어떻게 구분해요?
    이 꿀 믿을 수 있나요? 라고 물으면 뭐라 대답합니까?

    “그 사람을 보라”라고 답을 합니다.
    꿀에 대한 설명 아무리 정성들여 해도 진짜가짜 포맷으로 가면 구차해지고 말이 길어지거든요.
    “나를 보라” 그거 한 방이면 됩니다.

    윤사장 내외의 저간의 심정을 들여다 보자.

    어느덧 십 여 년을 훌쩍 넘기고
    이젠 벌에 어지간히 쏘여도 앗!! 따가워~~정도로 넘어갈 줄 알게 되었고
    이젠 쏘여도 붓지도 않으니 어디다가 엄살할 수도 없답니다.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어 그 때는 벌써 아득한 옛 추억이 되었습니다.

    해마다 이른 봄이면 주름이 가득한 시부모님께서 대궐(!) 같은 집을 떠나
    시린 찬물에 손을 담그시며 추운 텐트 속에서 주무실 것을 생각하니
    우리 양봉인들이 수고하며 흘린 땀을 무색케 하는 벌꿀에 대한 속설들과 의문들이 야속하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자연의 변화로 양봉 작황이 수년째 어려움 속에 있다 보니 자주 지치지만 그래도 또 다시 꿈을 꿉니다.
    우리를 믿고 찾아 주시는 고객이 있는 한 다시 오뚜기처럼 일어나 보자고.
    이렇게 정성으로 생산된 좋은 벌꿀을 넘쳐나는 의혹들 때문에 맘 편히 살수도 팔수도 없는 현실의 벽을 깨기 위해 더욱 노력하자고.

    언제나 어김없이 훈훈한 옛정과 아카시아의 향기를 함께 담아 드리기 위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자고…

    (에덴양봉원 여왕벌 한애정씨의 편지글)

    오래된 믿음

       
      

    양봉체험장 한 켠에 ‘오래된 믿음’들이 보인다. 아버님이 양봉을 시작하시면서 구독한 농업관련책들이 여러권 보였다. 축산대사전,농업기술,새농민,토끼치는법… 농업기술과 새농민은 지금도 발간이 되는 잡지다.

       
      ▲ 새농민 첫페이지에는 당시 왕겨를 이용하여 양봉작업을 하는 농부의 모습이 보이는데 발행일을 보니 1962년 3월31일자 발행이고 100환의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

    난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50년이 꽉찬 ‘색바랜 오래됨’이 주는 여운을 오랜만에 만끽했다.

    에덴양봉원에서 발견한 책이 믿음을 주기보다는 벽장속 소주 한되짜리 꿀단지의 추억과 더불어 저 책들을 읽어가며 공부하고 벌을 쳤을 아버지와 그 아들로 이어지는 대를 잇는 양봉가문의 세월의 무게와 무언의 몸짓 마음짓으로 주고받았을 아버지와 아들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방문객에게 ‘오래된 믿음’을 슬며시 전해준다.

    적어도 거짓이나 짝퉁으로는 50년을 일관되게 관통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세월을 일관성 있게 끌어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는 삶의 보편적인 가치 ‘믿음’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윤상복사장의 마케팅

       
      ▲ 2001년 MBC 아주 특별한 아침에 출연하여 30만마리의 벌갑옷을 입고 있다.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이슈가 되었다.

    자연그대로의 선물 벌꿀

       
      ▲ 아카시아꿀

    지난봄 아카시아가 한창일 때 화성 칠보산행을 자주 다녔다. 길섶 안쪽으로 들어가 아카시아꽃을 쭉 훑어서 한 입에 털어 넣고 힘차게(?) 씹는다. 약간의 풀냄새가 밴 달콤쌉싸롬한 아카시아꽃은 아주 친숙한 맛이다. 첫 맛이 느껴지면 아스라하지만 유년시절 씹던 맛하고 별반 다르지 않다.

    내몸에 내재(內在)된 맛이기 때문이다. 5월 아카시아향기는 우리들의 영원한 설레임 더덕향기와 더불어 계절의 고유함을 잘 드러내는 요소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아카시아꿀의 품질과 맛을 따라올 나라가 없다. 유명한 미국의 버몬트산 꿀이나 유럽의 꿀들은 왠지 맛이 간명하지 않고… 하여튼… (뭔가 노린내 비슷한 맛이 난다)

    아카시아는 우리나라 꿀생산량의 70~80%를 점유한다. 정말 하늘이 우리에게 베푸는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요즘은 개화시기가 짧아져 한 달 정도 안에 채밀을 해야 한다.

       
      ▲ 밤나무꿀

    밤꽃이 온 산하에 지천으로 깔리면 남자 정액냄새와 흡사한 냄새가 난다. 벌들에게 밤나무는 필요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달갑지도 않다. 꿀이 달지 않고 써서 시큰둥하는 것이다. 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먹이를 구하지 못해 아사직전이 되어서야 밤꿀을 물어온다. 물론 근처에 다른 밀원식물이 있으면 거들떠도 안본다.

    온도가 높고 습할 때 꿀이 많이 나온다. 장마 전 비가 올듯하면서 습도는 높고 불쾌지수가 한참 올라가 짜증이 나는 때에 밤 꿀은 많이 난다. 나오는 양은 아카시아에 비해 1/3 정도에 불과하다.

    밤꿀은 밤 껍질의 색깔처럼 짙은 갈색을 띠거나 검은 색을 띤다. 색깔만큼 맛과 향도 강하고 쓴 맛이 있어 음식보다는 약으로 더 많이 이용된다. 칼륨, 철분 등이 많이 함유되어 있고, 위와 간을 좋게 하는데 효능이 있으며 기침을 가라 앉히는 데도 좋다.

    양봉체험관

    에덴양봉원 농장에는 양봉체험관이 있다. 교육실습관하고 전시관의 기능이 있다. 방문객들로 하여금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도록 준비하였다.

       
      ▲ 양봉체험관 내부 전경/ 꿀벌해부모형/야생의 폭군 말벌집/ 벌체험하는 아이들

    고객살이 농촌살이

       
      ▲ 할아버지와 손주 녀석들

    에덴양봉원과 거래하고 있는 사람들은 벌꿀만 주고 받는 게 아니다. 젊은 사람들이 표현하는 3~4대가 모여 살아가는 벌꿀가족 이야기에 정감어린 시선을 보낸다. 요즘 같지 않은 풍경이라며 격려해 준다.

    고객들은 ‘동생 같은 사람들’이란 표현들을 많이 한다. 왜 내 대신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모시는 동생들을 대하는 형의 마음을 짐작하면 될성부르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고서리…^^

    그런 고객들의 격려가 늘 함께 하므로 농작물이 태풍에 날아가거나 고단한 상황이 발생해도 마음 한 켠이 든든해서 보람을 가지고 살아간다.

    윤상복 한애정 내외는 일기를 쓴다. 거의 10년 가까이 홈페이지에 쓰고 있다.

    경북 안동 처갓집에 다녀온 이야기를 홈페이지에 올린게 인연이 되서 처갓집에서 나오는 모과, 대추, 잡곡 등을 ‘처갓집’이란 브랜드를 붙여 절찬리에 판매하도록 고객들이 요구하여 지금은 하나의 어엿한 제철상품군으로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신뢰에 기반한 소비자가 만들어 가는 시장’의 전형을 보여준다.

    어느 해인가는 아이들 입히라고 깨끗하게 빨고 다려서 “헌옷이라 미안해요! 아이 입히도록 하세요”라며 정성스럽게 택배로 선물을 보내오는 고객도 있다. 이런게 ‘오는 정(情)’이다.

    상품이 나갈 때 감자라도 서너알 넣어서 보내주기도 하고 강원도 넘어갈 때 양봉원에 들려서 막국수라도 한 그릇 하고 가라고 초청도 한다. 이것은 ‘가는 정(情)’이다.

    에덴양봉원 관계안에서 ‘고객살이’는 즐겁다. 물론 벌꿀가족의 ‘농촌살이’는 정겹고… ^^

    필자와 윤사장 할머님 생전의 에피소드

    지금은 고인이시지만 2003년 10월 그 어른이 94세 되시던 해에 출장가서 만나 뵈었고 그후 두 번 인가 더 뵈었다. 어느 날 마당에 내려서니 할머니가 작업에 열중하고 계셨다.

       
      ▲ [사진1] 조옥환 할머님(94세)이 도토리 고르기 작업에 열중이시다. 손길이 얼마나 경쾌하신지… 어릴적 세계사 시간에 배운 인도의 ‘간디’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진2] 사진 한장 찍어도 되냐고 여쭸더니 쑥쓰러우신지 망설이시는 빛이 보인다. [사진3] 필자가 아양(?)을 떨며 재촉을 했고, 손자 손님인줄 아시더니 머리매무새를 고치신다.
    [사진4] 세상에서 제일 예쁘십니다.

    난 이 사진과 느낌을 아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그 어른의 정감어린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서다. 이 사진을 찍으신 3년후 2006년 97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지금 계셨으면 100세다.

    손주 며느리는 어른 돌아가시고 난 심정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어버이 날 사망신고 하다

    97세의 할머니께서 인간에게 주어진 최장의 명을 다하시고 잠드시듯 돌아가셨다.

    남들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영정 앞에서
    "참 복도 많으시다"고 하신다.

    무슨 뜻일까? 다 알면서 물어본다.
    우리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정신을 놓지 않으신 채
    집안 식구 모두를 만나 말씀하시고
    떠 넣어 드리는 하루 세끼 식사도 잘 하셨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몸져 누우신후
    기저귀 40개중 채 30개도 못 쓰시고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식구들에게 조차도 섬김을 받기 보단
    줄곧 남을 위해 한평생 도움주시고 정을 쏟아 오신 정 많으셨던 우리 할머니…

    37세에 홀로되신 우리 할머니 모시느라
    우리 시어머니 그동안 참 많은 고생을 하신 듯 싶다.

    곧 70이 다 돼 오지만 어린아이 살피듯 얼마나 우리 할머니께 잘 해 오셨던지
    옆에서 지켜보며 많이 배우고 닮은 것 같다.

    9명의 대식구의 외동아들인 애기아빠와 결혼 후 줄곧 10년째 한 집에서 살아왔다.
    시할머니와 시어른을 모시며 4代가 한 집에 살기란 그리 쉽지는 않았지만
    우리가정 그동안 4代가 참 단란하고 오손~도손 정답게 살아온 듯 싶다.
    주위 어른들의 부러움도 한껏 받아왔는데…

    지난 5월 8일 어버이 날
    읍사무소로 돌아가신 할머니 사망 신고하러 갔던 애기아빠가
    한 장의 등본을 내어보인다.
    사망 신고 후 곧 빠질 할머니까지 포함된
    우리가족 4代 8명의 이름이 나란~히 들어있는 마지막 등본인 것이다.

    할머니의 정을 유난히 많이 받아왔던 애기아빠였던지라
    많이 많이 서운한가 보다.

    … 이하 줄임 2006년 5월 9일

    하늘이 내려준 약속 ‘벌(蜂)’

       
      

    벌은 인간에게 꿀을 제공하는 존재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리가 먹는 곡식의 70% 정도를 화분매개 한다. 우리가 재배하거나 야생의 농작물들의 암꽃과 수꽃을 시집장가 보내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온과 농약남용, 전자파, 질병 등 여러 가지를 원인으로 하늘이 내려준 약속 ‘벌’들이 사라지고 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박사는 “벌이 사라지면 인류는 겨우 4년을 버틸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우리가 자연을 잘 헤아리지 못하고 삽질식 막가파로 살면 ‘하늘이 내려준 벌(蜂)은 정말 ‘벌(罪)’이 되고 말 것이다.

    50년째 대를 이어 벌을 치는 에덴양봉원의 꿀은 위중하신 할머님께 아버님이 정성들여 입에 넣어드리던 ‘효자(孝子)의 꿀’이고, 소생하신 할머니가 배가 아픈 어린 손주에게 “낫거라 낫거라 상복이배는 똥배 할머니손은 약손…” 측은해 하시며 그 손자에게 먹여주던 ‘사랑의 꿀’이다.

    바로 그 꿀을 에덴양봉원 벌꿀가족들은 지난 50년 동안 소비자들에게 공급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나누어 드릴 것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