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바마와 노벨평화상 "역겨웠다"
        2009년 12월 11일 09:2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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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만큼 계속 역겨움을 느끼는 날은 드물었습니다. 상국의 황제마마께서 그 번국(蕃國) 노르웨이에 행차하시니, 그 비상한 충성을 보이려는 백성의 무리들은 아주 수두룩합니다.

    특히 금상께서 – 서역, 즉 옛 안식국에서의 생번 토벌을 이제부터 계속 3년간 하겠다는 뜻을 보이면서도 – 도의 정치를 펴보겠다는 포부까지 보이시니, 착한 군자연한 이들은 아주 무리를 지어 배수고두사은 (拜手叩頭謝恩.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의 큰 절-편집자)의 자세를 취합니다.

    좌우파들의 오비어천가들

    황상께 이쪽 오랑캐의 말로 ‘노벨상’이라고 하는 특별 방물 헌상을 주도한 노동당계의 ‘진보적인 일간지’ 다그스아비센(http://www.dagsavisen.no/)은 "비록 약간 시기상조이긴 하지만 매우 지당한 결정"이라고 찬양의 합창을 지휘하고, 거기에다 이 번국의 일체 유수의 신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찬성, 찬양의 노래를 불러줍니다.

       
      

    우파쪽의 극찬에 대해 일단 지면상 생략하고 좌파의 ‘진보적인 소리’들을 열거해보면:

    – "오바마는 어차피 미국의 대외정책을 바꾸겠다고 그 누구도 기대하지도 않았죠. 단, 좌우간, 그는 이 세상 최고의 웅변가이오. 그는 모든 선한 것에 대한 메시지를 굉장히 잘 전달했소" (사회주의좌파당 당수 크리스틴 할보르센)

    – "비록 오바마의 수상 연설의 상당 부분은 필요시 군대 사용에 관한 이야기에 해당되지만, 너무나 존엄스러운 말씀이었소" (노동당의 국회 의원이자 구 당 총서기 마르틴 고르베르그)

    – "이상과 현실 정치 사이의 중도에 대한 고상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중앙당의 당수 리브 나바르세테) (http://www.dagsavisen.no/innenriks/article457766.ece)

    그리고 진보적 일간지든 보수적 매체든 오늘날 행차해온 그 높디 높으신 손님에 대해서 꼭 쓰는 말은 ‘세계 최고의 권력자'(verdens mektigste man)였습니다. 세계 최고의 권력자가 과연 세계 평화에 제대로 기여할 가능성은 이론적으로라도 존재하는가, 최고 권력자를 뒷받침하는 권력과 이해관계의 구조가 무엇이고, 그 구조에 의해 대통령에 뽑힌 사람이 어떻게 처신할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하등의 고려도 이 찬양의 합창에서 읽어낼 수 없었습니다.

    "수령님 만세"보다 더 큰 죄악?

    오바마가 묵고 있는 초호화 호텔 밑에서 그에게 참배(?)하러 오는 ‘일선 진보주의자’, 즉 노동당이나 사회주의좌파당 등의 일선 지지자들을 포함한 행렬을 보노라면 이건 이북에서 수령님 만세 부르는 일보다 조금 더 큰 죄악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북에서야 안 불러주면 본인과 가족들에게 아주 안 좋은 결과들이 올 가능성부터 크지만, 이 사람들은 하등의 강제없이, 마음의 부름을 받아 세계 최고의 권력자를 숭배하러 옵니다. 그가 세계 평화를 크게 진작하겠다는 믿음으로… 정말이지 정신병원에서 사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하기야 옛 ‘노빠’들의 저들의 ‘바보 노무현’에 대한 숭배의 염을 생각해보면 여기만 그런 것도 아닌 것이죠.

    진보에 재미를 붙이는 수많은 인간들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요? 대통령, 즉 자본과 관벌, 군벌들의 이해관계의 최고 조절자가 된 (반쪽)흑인 출신 오바마 내지 (아득한 젊은 시절에)가난뱅이 출신(이었던) 노무현이 치국평천하의 업을 훌륭하게 이루어내어 대동사회는 아니더라도 소강사회를 만들겠다는 그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이고, 왜 이 만큼 강력한가요?

    가끔 생각해보면, 사실을 깡그리 무시하는 차원에서는 이 순진한 믿음은 꼭 이북 백성의 김씨왕조에 대한 숭배심과 모종의 흡사성을 보이기까지 합니다. 대기근 속에서도 군비 수준을 유지하고 제 아비의 초호화 무덤 대형 공사를 계속했던 이북의 통치자가 ‘애민의 군주’가 아니듯이 양극화, 비정규직 속출, 젊은 백수들의 절망 속에서 한미자유무역협정을 계속 추진했던 노무현도 ‘바보’라기보다는 삼성가 등 이 사회 진짜 ‘주인’들의 나름대로 충실하고 지능적인 대리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대기근 속에서 가족을 잃은 이북인들도, 참여정부 밑에서는 경제 생활에 제대로 참여하지도 못해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수많은 젊은 이상주의자들도 계속해서 그들을 불행하게끔 만드는 그 메카니즘을 조절하는 최고권력자에 대한 환상을 품는 걸 보니 인간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차악 담론’의 비극들

    물론 여기에서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갈등 관계 분석에 대한 다수들의 무지라는 요소 등도 작용되지만, 혁명적 변혁, 진정한 의미의 개혁을 포기하거나 무기한 유보한 지식인 사회의 ‘차악’ 담론에 포섭된 수많은 이들의 비극도 보이는 것입니다.

    현실을 크게 타파하여 새로운 사회를 이루어볼 끔을 포기한다면, 현실 정치에서 차악을 찾는 것은 그 다음 순서입니다. ‘비록 한계가 있지만 승산이 있는 후보 중에서는 그나마 좀 낫다’는 심정으로. 그 차악을 택하는 순간에는, ‘현실을 인정한’ 이상주의자의 머리 속에서 과연 그가 왜 현실적으로 승산이 있는지, 즉 이 사회의 진짜 주인네들이 그에 대한 나름의 지원을 왜 하는지(내지 왜 그를 결사적으로 막지 않는지)에 대한 하등의 고려도 없습니다.

    그냥 ‘승산’을 그 자체로서 인정하는 것이죠. 이를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에, 승산을 가능케 한 이 사회의 진정한 조절자들의 포로가 되는 법입니다. 그 다음은 기나긴 ‘자기 설득’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물론 이라크 전쟁은 잘못됐지만 우리 나라 대미 관계의 현실상 과연 파병 요청 불응은 가능했겠어요?" (내지 "비록 아프간으로 잘못 치고 들어갔지만, 펜타곤이 수만 명의 증파를 요구할 경우에는 그 요청에 오바마가 현실적으로 비토할 수 있겠어요?")

    "물론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잘못된 부분은 많지만, 일단 휴대폰, 자동차의 대미 수출도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하지 않겠어요?"(내지 "물론 월가 은행들에게 목돈을 주면서도 개인 파산, 주택 강제 경매를 당하는 주택 구매자들에게 별로 구제 정책을 펴지 않는 것은 잘못이지만, 은행의 요구를 무시해 은행들의 채무 불이행의 가능성을 방치할 수 있었겠어요?") 등등.

    ‘무력한 백성’ 신드롬

    결국 이 이상주의자들은 자신의 (이미 현실적으로 포기하고 만) 이상을 자위의 도구로 삼으면서 ‘최고의 권력자’에게 계속 끌려다닙니다. 이와 동시에 현실이 크게 바뀔 가능성은 진정으로 계속 줄어들죠.

    ‘무력한 백성’의 신드롬이라고나 할까요? ‘승산이 있는 괜찮은 사람’이 최고권력자가 되어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인자한 군주’를 대망했던 중세 백성의 희망, 대원군이 고종 대신에 집권하면 왜양도 물러가고 무명잡세도 없어지고 탐관오리도 응징 받을 것이라고 믿었던 전봉준의 기대와 같은 수준입니다.

    그러니 부모의 온정을 희망하는 아이처럼 오바마나 노무현에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대’는, 현실에 대한 전면적 부정, 그리고 급진적 타파에의 의지를 갖는 것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느껴집니다. 오바마에 대한 기대를 갖고 이 불안한 시대를 살기는 심적으로 약간 더 쉬운 일이죠.

    그런데 오바마의 집권이 언젠가 결국 아프간으로부터의 패주와 달러화 가치의 폭락 등으로 불가피하고 매듭지어지고 나면 어찌 할 작정이지요? 마취제 주사를 맞아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은 좋지만, 마취제가 풀리고 나면 어찌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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