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숙연하게 만든 그의 책
        2009년 12월 04일 10:2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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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표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고집이 『진보의 미래 –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동녁)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이 책은 ‘진보의 미래’ 시리즈의 제1권이기도 하다.

    노 전 대통령이 유고에 남긴 질문들에 학자들이 나름의 답변을 단 책자(가제 – ‘노무현이 꿈꾼 나라’)가 이 시리즈의 제2권으로 내년 1월에 나올 예정이라 한다.

    이 책의 제1부 “진보의 미래”는 이미 인터넷에 공개되었던 글들이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 이후 ‘진보의 미래’라는 제목의 책자를 준비하면서 목차나 개요를 메모한 내용이다.

    이번에 처음 공개된 것은 제2부 “진보주의를 연구하기 위하여”인데, ‘진보의 미래’ 책자를 준비하는 세미나에서 그가 풀어놓은 생각들을 녹취한 것이다.

    그토록 잘 알았으면서 왜 그것밖에?

    사실 제1부의 내용을 인터넷으로 처음 보았을 때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보수의 시대’니 ‘진보의 시대’니 하는 말들이 생뚱맞게 들렸고, 정치인이 왜 사회과학자 풍의 글을 쓰려 했는지, 의아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그의 구술(제2부)을 보니 비로소 그가 고민했던 것, 말하고 싶었던 것이 실감 있게 와 닿았다. 성긴 활자로 200쪽 가량 되는 이 지면들에는 평소 그의 어투가 그대로 묻어 있어서 마치 그와 직접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면서 독서하는 내내 평자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 정도 깊이 있는 고민을 하는 정치가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과연 얼마나 될까”하는 경탄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토록 명석하게 알고 있던 사람이 왜 그것밖에 못했을까”라는, 그 경탄에 비례하는, 의문이었다.

    어쩌면 이 책 자체가 “왜 그 정도밖에 못했는가”라는 의문에 대해 노무현 스스로 내놓고자 했던 답변이라 할 수 있다. 평자가 받은 인상만이 그런 게 아니라, 책 곳곳에서 저자 자신이 그 의도를 솔직히 이야기한다.

    자기 비판과 변명 사이에서

    허나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에서 냉정하기란 쉽지 않은 법. 회고록이란, 그래서, 세상의 수많은 책들 중에서도 가장 냉정한 독서가 필요한 물건이다.

    『진보의 미래』도, 비록 회고록으로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애초의 동기가 전 정권의 자기 평가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이런 이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따라서 참여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평자와 같은 이들이 이 책 곳곳에서 자기 변호의, 썩 달갑지 않은 문구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노 전 대통령은 한미 FTA를 ‘개방’의 문제로 규정한 뒤에 이렇게 말한다. “개방은 본질이 아니다. 개방은 진보주의, 보수주의의 문제는 아니다.”(188쪽) 스스로 ‘좌파 신자유주의자’라고 말한 바 있는 그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그리고 그의 정권이 ‘신자유주의’라고 불린 것은 그렇게 한스러웠나 보다. 특히 한미 FTA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또, ‘동북아 금융 허브’를 이야기하고 자본시장통합법을 추진한 데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일자리 면에서는 내가 금융, 뭐 지식 서비스 키워라. 그중에 제일 큰 게 그거 아녜요? 금융 허브 해보자. 다 일자리 만들자고 한 소리인데. 그런데 요새는 금융이 사고 친 자식이 됐으니까 금융 허브 하자고 했다고 욕먹을까 봐 지금 눈치 봐야 하게 생겼어요.”(253쪽)

    보는 이에 따라서는 솔직한 반성이라 할 수도 있겠고 위트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평자의 시각은 너무 무책임하게 눙치고 넘어가는 것으로만 보인다. “금융이 사고 친” 게 무슨 우발적인 일도 아니고 충분히 예견됐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산 팔았는데 해만 쨍쨍해서 미안하다” 식으로 이야기해서 될 일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론으로 일관하고 있지는 않다. 아니,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과감한 자기 비판 역시 곳곳에서 돌출한다. 생전 노 전 대통령의 그 지나치게 돌발적이던 모습은 이제 이 책 안에서는 자기 비판과 변명이라는 양 극단 사이의 좌충우돌로 반복된다.

    가령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를 ‘노동의 유연화’에서 찾는 대목이 그러하다. “제일 아픈 게 어디냐 하면 노동의 유연성입니다.”(211-212쪽) “우리가 진짜 무너진 건, 그 핵심은 노동이에요. 핵심적으로 아주 중요한 벽이 무너진 것은 노동의 유연성을, 우리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것이에요.” (232쪽) “빈부 격차의 원인을 우리나라에서 얘기하면 노동의 유연화라는 게 굉장히 크게 작용하고 있거든요.” (249쪽)

    집권하자마자 지지층을 이반시키는 계기가 된 이라크 파병에 대해서도 이렇게 거침없이 회고한다. “근데 이라크에 파병했죠. 그죠? 그것 말고도 국가적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말하는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한 게 있을 거예요.”(303쪽)

    참여정부에 대한 ‘사회과학적’ 설명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겉으로는 좌충우돌하면서도, 역설적이지만 아주 논리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법률가였고, 또한 독서인이었다. 그래서 “왜 그것밖에 못했느냐”는 물음에 대하여 이런 저런 소재에 기대 답을 다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는 사회과학적 설명을 제시하려 한다.

    왜 ‘정치인’ 노무현이 ‘사회과학적’ 설명에 도전하려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자신을 어떤 비극의 주인공으로 표상하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비극의 주인공이란 누구인가? 모든 미덕과 분투에도 불구하고 그것들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운명의 지평으로 인해 고통 받고 실패하는 자이다.

       
      ▲ 재임시절 회의를 주재 중인 노 전 대통령

    “넘어설 수 없는 운명의 지평”, 그것을 노무현은 제시하고 싶어 한다. “김대중 ․ 노무현이 진보주의를 배신했다면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었던 것 아니냐”(124쪽)라고 토로할 때의 그 “사연” 말이다.

    이 “사연”을 해명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만 운명의 결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펼쳐보였던 그 미덕과 분투가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럼으로써 자신은 넘어서지 못했던 그 모진 운명에 맞서 새로운 주인공들의 투쟁을 고무하고 독려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이 도달한 그 해명은 한 마디로, 참여정권이 “보수 시대의 진보주의 정부”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세계사적 시대 인식이 중요해진다. 그는 이른바 ‘보수주의’, ‘진보주의’라는 두 주인공과 함께, ‘보수의 시대’, ‘진보의 시대’라는 시대 구분을 제시한다.

    세계사의 풍향이 1970년대부터 ‘진보의 시대’에서 ‘보수의 시대’로 바뀌었다. 그러고 나서 30여 년간 지속된 ‘보수의 시대’ 끝자락에 등장한 ‘진보주의’ 정권이 바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였다. 노 전 대통령이 전에 자신을 “지난 시대의 막내”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이제 ‘지난 시대’는 단순히 한국의 민주화 이행기만이 아니라 세계사의 한 시대로서 ‘보수의 시대’를 뜻하는 것으로 확대된다.

    그에 따르면, ‘보수의 시대’에 ‘진보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진보 원리주의’와 ‘제3의 길’, 두 노선으로 나뉘어 서로 다투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이 중 ‘제3의 길’을 택했고,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보수의 시대’에 그래도 제한된 수준에서나마 ‘진보주의’를 펼치려던 선택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러한 자기 이해로부터 참여정부의 공과에 대한 복잡한 소회들을 일관되게 정리해보려 한다.

    시대의 거대한 전환에 대한 도저한 인식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미래 전망을 덧붙인다. 그는 2008년 미국 발 금융 위기와 오마바 정부의 등장에서 조심스럽게 세계사의 또 다른 방향 전환을 감지한다. 이번에는 ‘보수의 시대’에서 다시 ‘진보의 시대’로. 그렇다면 이것은 이제 “진보의 시대의 진보주의”라는 새로운 전망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운명의 결박에 연연하던 비극의 무대 자체가 뒤집어졌다는 의미?

    그럼 더 이상 비극만은 아니게 된 새로운 무대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노 전 대통령은 그 주체를 ‘시민’에서 찾는다. “내가 말하는 시민이라는 것은 자기와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 사람, 자기와 정치, 자기와 권력과의 관계를 이해하고 적어도 자기의 몫을 주장할 줄 알고 자기 몫을 넘어서 내 이웃과 정치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 시민의 범위를 넓혀 나가자는 것이 진보주의, 시민의 범위를 넓혀 나가는 과정을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295쪽)

    평자가 보기에는, 이상의 내용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유고로 남긴 생각들의 기본 체계다. 물론 ‘보수주의’가 무엇인지, ‘진보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길게 논의한 내용들도 있다. 거기에서 그는 ‘신자유주의’란 무엇인지 묻기도 하고, ‘케인스주의’는 ‘진보주의’인지 자문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이런 대목에서 그가 ‘진보주의’의 핵심 내용으로 “분배와 복지”를 제시하는 데 고무받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의 ‘진보주의’가 일종의 사회민주주의에 접근했다는 증거라고 환영하기도 한다. 그런 그가 채 뜻을 다시 펴지 못하고 이 땅을 떠난 것을 아쉬워하면서. 그에 비례해, 그가 남긴 정치 세력의 행보에 주목하면서.

    하지만 평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그런 내용들보다는, 저자 노무현의 도저한 시대 인식이었다. 일정한 자기 변론의 취지에서 출발했다고는 해도, 어쨌든 세계사의 풍향을 읽으려는 노력을 통해 그는 뭔가를 감지했다.

    그 ‘뭔가’가 빛을 발하는 페이지들이 있다. 가령 앞으로 우리가 당면한 과제가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문제, 자연과 문명의 충돌 속에서 어떻게 지속 가능한 미래를 확보하느냐는 문제라고 요령 있게 정리하는 대목(134쪽)이 그러하며, 이러한 난문들을 해결하려면 근대적 이성주의만이 아니라 “보편적 위협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는 대목(296쪽)이 그러하다.

    미국 발 금융 위기가 ‘보수’와 ‘진보’ 사이의 새로운 시대 교체의 신호탄 아닌가 하는 고민 뒤에는, 집권 중에는 결코 생각할 수 없었을 이런 결론이 따라붙기도 한다. “금융이라는 것이 경제에 대한 지배력이 원체 크기 때문에 정부가 운영하는 게 낫다. 투기보다 안 낫겠나? 정부가 운영해라”(243쪽). 금융 공기업화나 정부 소유 금융지주회사를 모색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만시지탄이 있지만, 아무튼 그는 여기까지 고민하다가 떠났다.

    하지만 『진보의 미래』가 결코 말해주지 않는 것

    하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영역에서 그의 안목을 발견한다는 것과, “왜 그것밖에 못했느냐”에 대한 납득할만한 답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평자가 보기에 이 책은 그 본래 목적인 후자에 대해서는 결코 성공했다고 보기 힘들다.

    가령 그는 신자유주의와의 대립의 핵심이 “빈부 격차하고 노동보호에 관한 문제, 분배와 재분배에 관한 것”(192쪽)이라고 강조한다. 그것을 이토록 명확히 알고 있던 사람이다. 그가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그는 다름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실패했다. 그도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는가?

       
      

    이 난처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오직 ‘보수의 시대’여서 그랬다는 것뿐이라면 그것은 공허하다. 그리고 현실에 들어맞지도 않는다. 그와 같은 시기에 집권한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권들이 있다. 이들도 “보수의 시대의 진보주의 정권”들이었다. 그런데 왜 이들이 하려던 것, 그리고 해놓은 것은 노무현과 그의 정부의 기록들과는 그렇게 다른가?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노무현이나 그 추종 세력들과는 다른 방향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떠난 이가 남긴 말들에 어떨 때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것밖에 못한” 그 이유에 대해서만은 냉정하게 다른 답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그 답의 일단은 『진보의 미래』가 말하면서 또한 말하지 않는 그 ‘빈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진보의 미래』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책에는 ‘진보’에 대한 수많은 언급들, 우리도 충분히 수긍할만한 ‘진보’의 정의들이 넘쳐난다. “결국 ‘사람이냐 돈이냐’의 문제인 거죠. 정치를 되살리자, 민주주의를 되살리자는 겁니다.”(183쪽) “민주주의가 진보다.”(303쪽) “그럼 이제 진보의 가치는 뭐냐? 연대, 함께 살자.”(213쪽)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며, 결코 얕지 않은 인식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보의 미래』는 무엇을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저자가 이미 임기 중에 토로한 바 있고 이 책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는 “지배권이 사실은 이제 자본에게 넘어간 것이죠.”(307쪽)라는 언급과의 관계 속에서 ‘진보’의 의미다.

    물론 저자는 이 문장 바로 뒤에서 이렇게 묻는다. “아직도 민주주의는 불완전한 단계에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기까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뭐냐?”(312쪽)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 저 ‘시민 주권’ 개념이 나온다. 그리고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허나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과 “지배권을 넘겨 받은 자본”이 도대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자본의 지배권’은 그러려니 하고 그 빈 구석에서 ‘시민의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자본의 지배권’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힘’으로 ‘분배와 복지’를 쟁취하자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자본의 지배권’ 그것에 맞서기 위해 ‘시민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비극이 되지 못한 비극

    아마 지금 저자가 살아서 우리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세 번째가 맞다는 답에 대해 “진보 원리주의자이시네요”라는 답을 돌려주었을 것이다. 『진보의 미래』의 ‘빈 곳’은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진보 원리주의’라는 간편한 규정에 떠밀려 조명 받지 못한 ‘진보’의 얼굴은 ‘자본의 지배권’과 정면으로 맞서는 어떤 입장이고 세력이며 지향이다.

    소극적으로 말하면, ‘자본의 지배권’을 용인하지 않고 그것을 해체하는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자본의 지배권’이 관철되는 그 영역, 즉 경제 영역으로까지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이 일에 도전하기 위해서다. 분배와 복지는 그 결과물일 뿐이다. 전쟁의 진짜 이름은 ‘자본과의 대결’이다.

    그러나 ‘대결’은 어디에 있었던가?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그런 대결은 없었다. 그리고 이 유고집 『진보의 미래』 안에도 그런 대결은 결코 이야기되지 않는 무언가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평자는 여기에서 이 책의 실패와, 또한 그의 실패를 본다.

    그가 맞부딪혔던 무대는 확실히 비극이 맞았다. 거기에는 그 어느 무대보다도 더 준엄하게 운명의 속박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두운 배경에 맞서 찬연한 대조를 이룰 미덕과 고투에는 뭔가 결정적으로 비어있는 게 있었다.

    그리고 그 공허가 비극 자체를 잡아먹었다. 비극은 종막을 향해 치달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본 게 과연 비극이 맞는지 아닌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직 해설자의 설명(그러니까 『진보의 미래』 같은 책의 설명)을 들어야만 그랬나 보다 할 수 있는 그런 비극이었다.

    “이것은 당신 이야기요”

    그러나 “그것밖에 못한 이유”가 꼭 이것만은 아니다. 또 다른 이유들은 아마도 완전히 이 책 바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책의 ‘바깥’, 즉 책의 문구는 물론이고 행간도 아닌 사연들 속에서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 중의 하나는 바로 하필 집권 이후에야 이런 책을 쓰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권좌에서 물러나고 나서야 자신의 철학을 짚어보고 있다는 사실, 실패 이후에야 정책과 전략을 따지고 있다는 사실, 권력을 놓고 나서야 권력의 주인이 누가 됐어야 했는지 이야기한다는 사실, 즉 모든 일이 저질러지고 나서야 이 모든 걸 돌아본다는 사실. 그토록 그와 그 주위의 사람들은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점이 우리로 하여금 이 책을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기지 못하게 한다. 참여정부의 집권 세력이 맞닥뜨린 이 상황은 고스란히 진보정당의 몫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자본에 맞설 조직된 힘이 성숙해있지 않다면, 이것은 필연이다. 맑스가 자신의 책에서 독자를 향해 들이밀던, 눈에 거슬리는 그 문구처럼, “이것은 당신의 이야기다.”

    그래서 평자는 이 책 <진보의 미래>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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