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주의, 그리고 인생의 의미
        2009년 11월 30일 08: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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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사진=레디앙)

    제가 요즘 하도 빡빡한 인생을 사느라 거의 소설책을 못보는데 한때에 영어를 배울 겸해서 영미권 소설 – 주로 이미 ‘고전급’이 된 책 – 을 좀 많이 본 일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는 이상하게도 지금도 그레엄 그린의 <조용한 미국인> (1955)은 가장 기억에 잘 남습니다.

    소련을 전체주의 국가라고 안좋게 보시는 분들이 믿으실는지 모르지만, 그 책은 소련 시기(1950년대에) 영문 원문 그대로 소련에서 재판되기도 하고 번역도 돼 러시아어로도 나왔습니다.

    저자가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세상을 꽤나 냉소적으로 보는 전직 영국 스파이 출신인데, 소련에서 그 책을 삭제할 것도 없이 이렇게 친절히 내준 이유는 미국의 월남 개입에 대한 냉소적인 비관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사회주의

    사실, 오늘날 아프간과도 다를 게 없는데, 경험이 풍부한 그레엄 그린은 월남이 미국의 계획대로 어차피 살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결국 그 특유의 길 – 일종의 유교화된 국가사회주의의 길 – 로 필히 갈 수 밖에 없다는 점 등을 다 간파해 책에서 그걸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저자의 ‘제2의 자아’ 격인 토마스 파울러(영국 기자)가 월남을 "구제하겠다"는 선민의식에 불타는 미국 공작원 올든 파일에게 그걸 역설하면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 하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월남의 농촌으로 가보면 농민들의 원한이 섞인 온갖 인생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이라고는 월맹(越盟) 간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이공 정부의 관료라는 자들이 대체로 약탈자 이상이 못되고 불란서인 등이 외국 침략자들인데 월맹 간부는 믿고 따를 수 있는, 그리고 민족 해방에 대한 연설로 농민들에게 고상한 인생의 의미까지 부여하는 유일무이한 ‘우리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란서와 미국과 그 현지 대리인이 아무리 강해도 그들이 현지인과 소통이 안되고 현지인들에게 그 어떤 집단적인 ‘인생의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이상 그들의 분투는 필패라는 건 그 냉소적 기자의 지론이었습니다. 뭐, 사실, 아프간에서 미국이 결국 패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대로 설파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제게 기억에 남는 부분은 바로 ‘인생 의미 부여’로서의 사회주의 사상의 의미이었습니다. 물론 그린이 이야기한 월맹 간부들은 사실상 어디까지나 유교적 목민관과 계몽주의자를 겸비한 이들이었고, 그들이 농민들의 이야기를 단순히 들어주었다기보다는 농민들을 ‘조직 통솔’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전통사회 해체기로서는 이와 같은 권위주의적 훈육/피훈육 – 통솔/피통솔의 관계는 불가피할 수도 있지만, 오늘날로서는 적합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의미로서의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는 꼭 그 때뿐만 아니고 지금이라 해도 그대로 유효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사실, 어찌 보면 ‘인생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다운 삶과 사회주의

    우리가 우리 생전에 돈이라는 매개체가 없는 지상낙원을 꼭 건설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이게 어디까지나 혹세무민일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굳이 확률을 이야기하자면 이 세계가 일련의 국지전을 통해 패권 재배치가 되어, 보다 야만적인 자본주의로 계속 이어질 가능성은, 이성에 입각한 세계적 규모의 사회주의를 실행할 가능성보다는 훨썬 더 높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는 – 오늘의 일본처럼 – ‘개혁사기꾼’형, ‘노빠’형 정치꾼들이 일본 민주당 식의 잡탕식 개혁 정당 하나 더 조립해서 언젠가 정권을 탈환하여 부르주아 국가를 약간 다듬어서 계속 과거대로 운영하는 것이,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의 집권보다 훨씬 더 현실적 시나리오라고 볼 수 있습니다.(물론 시스템의 위기가 아주 커져 진보정당의 집권이 부르주아에게마저도 시스템 전체를 구제하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을 가능성도 배제 못합니다)

    그런데 ‘진보’할 가치는, 그 무슨 ‘집권’에만 있는 것은 꼭 아닙니다.(이 부분도 물론 도외시할 수는 없지만) 옛날 유인석 선생이나 최익현 선생이 기의(起義)하신 것은, 왜적을 현실적으로 이길 수 있다고 한 것이 아니지 않았습니까? 인간답게 마지막까지 살든지, 그게 안되면 적어도 인간답게 죽어 금수 같은 왜양이 설치는 이 더러운 세계에서 살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굳이 ‘죽음’을 갖고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만, 대의는 같을 것입니다. 사회주의하는 목적이란 결국 ‘인간답게 살기 위함’일 듯합니다. 권력이 주어지고 말고 등등은 다 부수적 부분들이죠.

    인간의 삶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최저의 가장 기본적 층위는 생물적 생존입니다. 먹고 자고 성관계 맺고 번식하고 자녀 키우고 아플 때에 약을 먹고, 그리고 자연사하는, 이런 것입니다. 초기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이 기본적 생존마저도 노동자에게는 거의 ‘꿈’ 같은 이야기이었습니다. 원하는 만큼 못먹고 아파도 병원에 못가고 그랬기 때문입니다.

    복지가 해줄 수 있는 최대치

    지금 같으면 아직까지 제약이 좀 있지만(세계 최장 노동시간 대한민국 많은 노동자들의 수면 부족, 자녀 양육 문제들과 출산율 저하 경향, 무상 의료의 부재로 말미암은 제문제 등) 일단 후기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한국과 같은 준주변부 국가에서는 이 정도는 다소 보장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층위는 기본적 사회적 역할의 수행 가능성입니다. 아이로서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젊은이로서 연애를 할 만큼 해보고, 어른으로서 부모에게 제대로 해드리면서 아이를 잘 키우고, 노후 생활을 조용하고 안정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보내고, 이런 것입니다.

    아이의 절대 대다수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알바하느라 연애고 뭐고 다 때려치우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고, 집에 밤 한 시에 돌아오는 아버지들이 아이를 한 번 보는 것도 힘들고, 노인들의 빈곤율이 약 40%에 달하는 이 위대한 토건공화국 대한민국에서는 이 둘째 층위 정도는 벌써 거의 보장 못하죠.

    한데, 제대로 된 복지국에서는 이 정도까지도 보장해줄 확률은 좀 있습니다. 노르웨이 정도면 아이 때에 제대로 놀고 젊을 때에 제대로 연애와 섹스를 즐기고, 부모가 되면 저녁 5시부터 아이와 같이 놀고, 노후 인생을 인간답게 보낼 확률은 대단히 높습니다. 대다수가 그렇게 살죠.

    그런데 셋째 층위 이야기가 나오면 대한민국과 노르웨이의 차이는 벌써 느껴지지 않습니다. 바로 대인 관계를 통한, 창조적 노동을 통한, 그 어떤 애타적 실천을 통한 진정한 자아 실현입니다. 그게 인생의 진수며 인생의 가장 깊은 의미일 것입니다.

    창조적 노동, 애타적 실천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는, 나와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사귀고, 이름 모를 타인을 위해 그저 봉사하기가 좋아서 봉사를 해주고, 그리고 나만이 남길 수 있는 그 어떤 독특한 말, 글, 그림, 악보 등등을 남에게 남기고 가는 것….

    적어도 "나는 살 만큼 살았다. 불법을 광설하고 의발 전수하고 상구보리 하화중생할 만큼 했다, 이제 가면 된다"하여 안심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그런 ‘만족스러운’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만족스러운 인생의 복은 거의 주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예컨대 우리 신분과 학력, 돈 등등 외부적 요소들이 다 바뀌어도 우리를 계속 사귈 친구들은 몇 명이나 있는가요? 사실, 우리 대인 관계에서 ‘상호 이용’을 빼면 남을 게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하는 일 중에서는 남의 심금을 울려 이 세상의 마음의 밭을 조금이라도 더 정토처럼 가꾸는 게 얼마나 많을까요?

    우리에게 주어지는 노동 중의 99%는 대개 그 어떤 독립적 의미가 보이지 않는 단순 반복 행위입니다. 그리고 우리 머리, 마음 속에서 외부에서 주입된 지식과 생각, 감정 등을 빼면 과연 ‘우리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요?

    한국이든 노르웨이든 자본주의 하에서 사는 인간들은 자기 자신들로부터 아주 심각하게 소외돼 있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부질 없는 벌이, 오락, 상품화된 정보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란 묻히고 말죠.

    바로 여기에서 사회주의의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미 ‘뜻’을 잃은 세계에서는 진보활동이란 그 뜻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노력에 해당될 것입니다. 진보/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예컨대 ‘나만의 안목’ 같은 게 생깁니다.

    예수와 석가 뜻 받드는 사회주의

    연예계부터 ‘경제 회복’에 대한 당국의 망설까지, 이 세상을 이루는 그 모든 허위, 가식, 거짓말, 모든 거품에 대해서는 "이게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의식과 용기가 생기고, 진정한 의미의 ‘자아’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흐름에 몸과 마음을 그저 맡기기만 하면 진정한 의미의 ‘개인’도 될 수 없지만 사회주의는 ‘비판적 개인’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개인들이 만나면 소통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죠. 어떤 상호 이용 등이 개입되지 않는, 동지적 관계의 기쁨도 맛볼 수 있고요… 사회주의란, 단순히 ‘집권을 위한 정당 운동’ 차원만은 아닙니다. (그런 차원도 당연히 있지만)

    이 폐허에서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기 위한, ‘뜻’을 되찾기 위한 실존적 운동이죠. 종교가 이미 다 상품화돼서 의미를 잃은 세상에서는, 사회주의야말로 예수와 석가의 뜻을 제대로 받드는 ‘마지막 인간들’의 집합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진보정당 지역 위원회에서 문학 토론, 종교 토론, 인생 토론 해도 좋은 것 같고, 아마추어 연극, 인디 밴드 콘서트 등이라도 해서 돈으로 매개되어지지 않는 ‘삶’을 즐겨도 좋은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란, 문화가 상품화돼 죽어버린 시대에 인류의 문화를 끝내 지켜보겠다는 운동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1980년대적인 도식주의, 도그마주의에 아직도 빠져 있는 일부의 분들이 그걸 아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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