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민혁명의 배후에는 세금이 있다
        2009년 11월 25일 04:0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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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 근현대사에서 혁명이라고 불릴만한 사건이 별로 없다. 4. 19가 혁명이라고 불리기는 하나 그로 인해 사회경제적 변화가 생겼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사실 일반적인 의미의 혁명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혁명의 경험이 있는 대부분 국가의 역사를 보면 혁명과정에서 세금 문제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경우가 적지 않다. 세금은 사회의 자원을 배분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으로 일반 시민들의 삶과 가장 맞닿아 있기 때문에 그 불만도 직접적이고 광범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특히 세금이 특권계급의 횡포와 맞닿아 있는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혁명은 항상 장밋빛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혁명의 원인이 되었던 문제가 혁명 이후에 더욱 심각해지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이는 세금문제 또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2.

    프랑스 혁명은 잘 알려져 있듯이 봉건제의 모순에 기인한 것이었다. 제3신분을 대변하는 부르주아가 이미 사회의 경제적 생산을 대변하고 있지만, 기생적 봉건귀족과 성직자들이 사회의 특권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 혁명으로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세금문제는 봉건제의 문제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역할을 했다. 혁명 전야의 프랑스는 예산의 절반을 국채이자로 지불하는 재정적 파산 직전의 단계였다.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들라크루아 그림

    그런데도 세금은 불평등한 정도를 넘어서서 특권 그 자체였다. 면세는 말할 것도 없고, 아예 특권계층들은 거액을 지불하고 조세원장을 사버려서 영구면세가 되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22등급으로 부과되던 인두세가 있었는데 성직자들은 1710년 2,400만 리브르(당시 프랑스 화폐단위) 조세의 원장을 사버린 것이다. 조세 원장을 사버렸다는 것은 조세징수권을 샀다는 의미다. 

    심지어 조세징수권은 국가의 손을 벗어나 개인들에게 입찰방식으로 도급이 되었다. 당연하게 이 과정에서 과도한 징수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1726년에는 총괄징세청부제라고 하여 프랑스의 모든 조세가 한 사람에의 도급 하에 놓이기 되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은 실제로 이름을 빌려준 사람이었고, 프랑스의 대금융업자들이 그 전주였다. 이들은 독자적 행정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조세징수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보았다. 프랑스에서 혁명적 봉기는 흔히 총괄징세업자의 사무소에 대한 방화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가난한 자들에게는 생필품인 소금에 과도한 세금이 부과되었고, 이것은 원성의 대상이었다.

    3.

    프랑스 혁명은 다 알다시피 삼부회의 소집에서 비롯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절대왕정의 특권층에게 세 부담을 늘리려는 온건한 조세개혁안을 특권층이 끈질기게 반대하였고, 이 싸움에서 절대왕정이 사실 상 패배하였기 때문에 삼부회가 열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특권층의 일체의 타협 거부가 혁명을 촉발시킨 것이다.

    일단 바스띠유가 함락되고 혁명이 진전되자 제헌의회는 아주 간명한 조세개혁을 시작하였다. 원성의 원인이 되었던 염세를 포함한 모든 간접세(등록세, 인지세, 관세제외)를 폐지하고, 토지세, 가옥에 부과되는 가옥세, 상공업의 수입에 부과되는 영업세로 대체하였다.

    그러나, 직접세는 제도가 잘 고안되지 않으면 그 징수가 결코 쉽지 않다. 혁명 상황인 프랑스 하에서는 행정조직이 잘 정비되지 않아 더더군다나 징수가 용이치 않았다. 제도가 본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 조세수입은 신통치 않았고, 역설적으로 재정적자는 혁명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어 혁명정부는 심하게 말하면 하루 하루 돈을 빌려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혁명정부는 재정위기를 맞아 교회재산을 몰수하고 아시냐라는 화폐를 발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적정한 재정을 확보하지 못했던 혁명정부는 이 아시냐를 남발하여 아시냐의 가치는 계속 떨어졌으며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당시 제4신분이라고 일컬어지는 파리 민중들의 생활을 몹시 위협하였다.

    4.

    이에 반해서 미국혁명은 재정위기라기 보다는 “대표없이 과세없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식민지에 대한 과세권이 그 핵심 문제였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보스턴 차 사건의 경우 과중한 세금이 문제는 아니었다.

    이미 영국 정부가 타운스헨드 법 등을 통해 식민지에 대한 과세권을 확보하려고 하였으나 이는 식민지의 반발에 부딪혔고, 이에 따라 제정된 차법(Tea Act)은 상당히 완화된 안이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의 반발을 없애기 위해 기술적으로 시행되었다.

    세금을 걷는 것을 숨기기 위해 세금은 차가 식민지에 하역되고 나서 런던에서 납부하게 하거나 차가 모두 팔리고 나서 납부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도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세금의 액수가 아니라 대표없이 과세없다는 정치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보스턴 차 사건은 약 100여명의 사람들이 차세반대 집회 도중 항구로 뛰어나가 하역을 기다리고 있던 차를 바다로 집어던진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미국혁명은 점화되었다.

    5.

    그런데 미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세금으로 인한 저항은 아이러니하게도 계속되었다. 세이스(Shays)라는 퇴역군인은 고향에 돌아와 보니 자신은 무보수로 미국 독립을 위해 싸웠건만 생계를 돌볼 수 없었던 관계로 과중한 채무였고, 채무자 감옥에 감금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혁명의 대가는 일반 퇴역군인에게는 가혹하였다. 일반 농민들은 수많은 세금을 부담하였고 납부하지 못할 경우 농민들의 가축과 집을 헐값에 팔아 세금으로 충당하였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미국의 각 주들은 많은 빚을 졌는데 유럽의 채권자들은 금과 은으로 변제할 것을 요구했다. 이 전쟁빚을 갚기 위하여 미국의 주들은 농민들을 쥐어짜기 시작한 것이었다.

    세이스를 비롯한 농민들은 정부에 의한 압류를 중단시키려고 무장한 채 진군하였고 이들이 진군하여 옴에 따라 법원은 압류절차를 중단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 미국혁명의 주역 중의 하나인 사무엘 아담스는 폭동법 및 인신보호 절차를 중단시키는 결의안을 제안하였고, 심지어 공화국에서의 반란은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란군들은 정부의 무기고를 확보하려고 진군하였으나 약속했던 원군이 도착하지 않았고 정부가 소집한 민병대가 먼저 무기고를 장악하여 결국 반란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6.

    이처럼 세금이 일 원인이 된 혁명이 발발했지만 그 이후의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반 인민의 입장에서는 나아지지 않았다. 물론 혁명이 특권을 타파하고 귀족계급이나 식민지 모국의 지배층들을 제거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새로운 지배층은 과거와 동일한 수단을 사용하였고, 이것은 세금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소득세가 도입되기 까지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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