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희, 왜 갑자기 노무현을 말했나?
    그녀의 최초 실책 & 두 개의 살길
    [말글비평] 마키아벨리즘의 모범 그녀가 던진 승부수
        2012년 05월 09일 03: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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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주목한 것은 이정희의 말과 그에 대한 SNS의 반응입니다. 정치인의 말은 그 자체로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 말에 대중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이것이 결정적이니까요. 지금 대중의 반응은 일방적입니다.

    “이정희는 당권파의 앞잡이 또는 꼭두각시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기본을 어겼다”, 여기에 덧붙는 것이 ‘종북’ 논리입니다. 다시는 되살아나지 못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여기에 그가 되살아날 뭔가가 숨었을 수 있습니다.

    왜 갑자기 노무현을?…이정희의 승부수

    대중의 반응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닙니다. 오히려 틀린 것으로 드러날 때가 훨씬 많아요. 그래서 그 반응을 거스르는 것이 종내는 ‘용기 있는 결단’이 되기도 합니다. 대중은 자신의 공격이 잘못이었다는 게 드러날 때, 엄청난 지지로 갚아주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리고 자신을 잘못된 판단으로 이끈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그에 대한 반응이 대표적인 사례죠. 공교롭게도 이정희와 김선동이 노무현을 끌어들이는군요.

    임기 말부터 “이 모든 게 노무현 탓”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습니다. 우스갯거리로 만들어버린 거죠. 일종의 ‘환원주의’입니다. 모든 잘못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원인이죠. 당사자 탓도 있겠지만, 이걸 만들어낸 한나라당과 조중동은 참 대단합니다. 이 말의 위력은 엄청납니다. 누가 나서더라도 ‘노무현편’이라 낙인찍히는 순간, 힘을 못 씁니다.

    그렇게 한껏 조롱했던 노무현이 스스로 목숨을 던집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조문 행렬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너무너무 미안했던 겁니다. 한마디씩 거들지 않은 놈이 없었던 거죠. 그의 진심과 소박했던 일상이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노무현은 부활합니다. 일종의 신격화라고 할 만큼 말이죠.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예수가 이렇게 신격화됐다고 설명합니다. 그럴수록 그를 죽음으로 내몬 쪽은 일방적으로 씹힙니다. 대중은 자기 잘못을 덮어씌울 ‘책임자’를 찾거든요.

    이정희는 7일 “지난 2009년 이 시점 노무현 대통령이 바라보는 마음은 어떠했을까”라 합니다. 8일 김선동은 이정희의 말이라면서 “실제로 부엉이 바위에 오르던 노무현 대통령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고 전합니다.

    이것을 기획으로 보든, 진심이라 보든, 이정희가 ‘노무현의 부활’에서 되살아날 길을 엿보았다 싶습니다. 실제로 트위터에서는 ‘이정희가 노무현처럼 죽기를 원하느냐’는 글이 오르기도 했죠.

    최초의 실책, 당보다 정파

    과연 되살아날 수 있을까를 따지려면 애초 일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를 봐야 합니다. 조사위원회가 총체적 부정선거였다고 발표하자, 이정희는 3일, “상황과 이유가 어떠했든 가장 무거운 정치적ㆍ도의적 책임을 지겠다.”고 합니다. ‘상황과 이유가 어떠했든’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당대표로서 책임지는 자세를 보인 거죠.

    그러다 하루가 지나자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못 믿겠고 따라서 대표 사퇴도 거부한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반발을 불러일으킨 첫 번째 발언입니다. 당 대표단이 승인한 조사위원회를 대표가 부정해버린 거니까요.

    그때부터 갑자기 ‘당권파’니 ‘비당권파’니 ‘참여계’니 ‘진보신당 탈당파’니 하는 당내 정파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경기동부’가, 관악을 부정선거에 이어, 두 번째로 급부상하는 순간이기도 하죠.

    결국 조사위원회의 부정은 ‘통합’을 내세운 당을 당내 정파들로 쪼개버린 셈입니다. 이제 당은 사라졌습니다. 기성 정당에서 익히 보던 계파의 등장은 ‘너희도 별 수 없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됩니다.

    당원과 조직원, 당원과 국민의 분리

    부글부글 끓는 여론에 기름을 부은 건, 이정희의 “모욕당한 당원에게 사과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발언이었습니다. 사실 ‘당원 보호’ 발언은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는 논리입니다. ‘그 당원’이 누군지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관심도 없고요.

    ‘총체적인 부정’이란 건 당의 부정이고, 그것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억울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밝히면 되는 거니까요.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말이 이중의 분리를 낳는다는 겁니다.

    첫째, ‘당원과 조직원의 분리’입니다. ‘모욕당한 당원’의 보호라는 말은 맞지요. 그러나 그건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늘 그런 건 아닙니다. 이미 계파가 드러날 대로 드러난 상황이고 그 자신이 당권파로 분류되는 상황에서 이 말은, ‘우리 정파의 보호가 당보다 우선’이라는 말이 돼버립니다.

    더구나 ‘과거 목숨 걸고 당원 정보를 보호한 당직자’ 얘기는 반대파의 머릿속에 들었던 아픈 과거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건 내부 문제니까 여기까지.

    둘째, ‘당원과 국민의 분리’입니다. 이것이 훨씬 아픕니다. 이정희는 ‘당원의 보호’가 지지자들에게 ‘아, 저 사람은 아무리 어려워도 억울한 한 사람을 지키는구나.’ 비치기를 바랐을 겁니다.

    그러나 지지자들의 생각은 어떨까요? 하루 종일 SNS는 들끓습니다. 그 당에 표 찍은 우리들의 억울함은 어떡하느냐는 게 주된 논조죠. 결국 표 찍은 지지자가 당원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해버리게 된 겁니다.

    마키아벨리즘의 모범, 이정희

    대중에게 이정희는 참으로 믿음직하면서 사랑스러웠습니다. 이정희, 하면 어떤 투쟁의 현장에도 빠지지 않고 앞장서서 싸웠던 모습을 떠올립니다. 희망버스 현장에서 최루액 맞고 기절하는 그 모습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반대도 있지만 진보진영 통합을 기어이 성사시킨 것이나, 야권연대가 막혔을 때 담판 승부로 해결해내던 뚝심과 결단력에 열광했죠. 그러면서도 늘 생글생글 웃음을 잃지 않는 그 모습이라니. 거기에 수능 인문계 여자전체 수석이라는 경력까지 더합니다. 도대체 없는 게 없습니다. 그것이 관악을 부정선거가 있었을 때 때늦은 후보 사퇴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바타’인 이상규를 뽑아준 겁니다.

    그러나 정치인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이 ‘이미지’, 즉 ‘가면’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가면’이라는 건 나쁜 뜻이 아닙니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일상인조차도 다들 가면을 쓰고 사니까요.

    좋은 아버지, 어머니라는 것조차도 일종의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군주더러 위장에 능해야 한다고 권유한 겁니다. 인민들에게 그가 자기편에 서서 착취하는 기득권층과 맞서는 인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를 믿고 싸우면 이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라는 거죠.

    저 보기엔, 그런 마키아벨리의 권유를 꽤 잘 실현한 인물이 이정희 아닌가 합니다. 마키아벨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렇게 인민과 더불어 얻어낸 권력을 아낌없이 인민에게 물려주는 데 있습니다. 이정희가 이 전망에 부응할 만한 인물이었는지는 따져볼 문제입니다만, 어쨌든 훌륭한 가면을 썼던 것만큼은 분명하죠.

    이정희가 살 길

    노무현의 부활은 이정희의 부활로 이어질까요? 지금으로선 난망해 보입니다. 노무현이 부활할 수 있었던 건, 옳고 그름이나 그의 진심을 떠나서, 그가 언제나 국민 편이었다는 인상을 줬기 때문입니다.

    그가 당을 버린 것이나 박근혜에게 연립정부를 제안한 것조차 미덕으로 부각됩니다. 이정희는 지금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국민보다 당, 당보다 정파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그가 노무현을 들먹인 것은 그리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외려 욕먹기 딱 좋죠.

    이정희가 살아날 길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정말로 부정선거가 없어야 합니다. 노회찬 말마따나 ‘금, 은, 동 가리기’ 식으로 ‘누가 덜 더럽나’를 가리는 것은 다 죽자는 겁니다. 불가능한 길이지요.

    다른 하나는 정파가 아니라 당, 당이 아니라 국민에게로 가는 겁니다.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원래 지지를 얻고자 했던 노동자, 농민, 서민의 편에 서겠노라 약속하면서 비례후보 사퇴는 물론 계파의 해체를 선언하는 겁니다. ‘계파의 배신자’가 되는 것만이 ‘국민의 배신자’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거지요.

    글을 쓰는 지금 이정희는 공청회에서 원맨쇼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 이 글이 아무 쓸모가 없지 싶습니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정의당의 당원이다. 수도권에서 오랫동안 논술 전문강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부산에 정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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