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돌아갈 곳이 없다"
By 나난
    2009년 11월 16일 01:5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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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1. 07 – 노동자대회 전야제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2009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가 열린 서울 여의도공원,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장기투쟁 사업장이 각자 특성에 맞게 술과 음식 등으로 기금을 마련하고 있을 그 시각,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천막도, 그곳에 있었다.

‘대타협’ 100일, 화약고와 같았던 도장2공장에서 공권력과 자본, 그리고 죽음의 공포와 전쟁을 치러야 했던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조합원들의 얼굴은 생각보다 밝았다. ‘동지’들은 그들을 찾아왔고, 술과 안주를 준비하는 그들의 손놀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분주해져 갔다.

취중진담

아픔과 고통은 사라진 걸까. 발 딛을 곳 없는 천막을 대신해 여의도 공원 한 쪽 구석에서 술을 마시던 쌍용차 지부 조합원들과 소주 한 잔을 나눴다. 2시간여 동안 진행된 취중진담 속에서, 그들은 지난 아픔보다 지금, 이 순간 사라져버린 희망을 더욱 고통스러워했다.

사측은 함께 일하던 동료에게 ‘산 자’, ‘정리해고자’, ‘희망퇴직자’, ‘무급휴직자’, ‘징계자’라는 딱지를 붙여놓았다. 그렇게 타인에 의해 조각난 노동자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은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난 봄 공장 안으로 들어갈 때도 그리고 지금도,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하나다. “함께 살자.”

   
  ▲ 지난 11월 7일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가 열린 서울 여의도문화마당 한 켠에 지난 77일간 옥쇄파업 투쟁을 벌인 노동자들과 가족대책위가 모여 앉았다.(사진=정상근 기자)

2009. 08. 06

77일간 굳게 닫혔던 공장 문이 열렸다. 도장공장 내 전기와 물을 끊었던 회사는 “공장의 도료가 굳으면 수 천 억 원의 손실이 발생한다”며 호들갑을 떨어왔지만 전쟁터의 주 무대였던 도장공장의 상태는 ‘양호’ 이상의 판정을 받았다. 옥쇄파업을 벌여온 노동자들이 비상발전기를 돌린 덕이다.

"우리가 일할 곳이었기 때문에"

당시 공장 안에 있었던 산 자, 하지만 죽은 자와 함께 했다는 이유로 회사로부터 ‘징계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은 윤충열 씨는 “우리가 77일간 시설을 지켰기에 회사도 공장을 빨리 재가동할 수 있었다”며 시설을 지킨 이유를 “우리가 일할 곳”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하고자 시작한 정당한 투쟁이 경찰과 회사의 왜곡에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때도 “내가 일했던 일터”이고 “내가 일해야 할 일터”이기에 참고 견뎠다. 그것은 “나만 잘 사는 것”이 아닌 “함께 살고, 함께 복직하기” 위한 단 하나의 꿈이었다.

2009. 05. 22

“길어야 2주다.” 77일간의 싸움 후 무급휴직자로 분류된 김영우(가명) 씨는 지난 5월 21일 옥쇄파업을 위해 짐을 싸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산 자였던 정형구 씨 역시 “한 달”을 예상했다. 그 누구도 몰랐다. 그 싸움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산 자’의 신분으로 공장에 들어간 정 씨는 끝내 ‘죽은 자’로 공장을 나왔다. 지난 6월 8일 한 통의 문자를 받은 그는 동료들이 잠든 늦은 밤, 남몰래 눈물을 훔쳐야 했다. ‘정리해고.’ 18년을 일해 온 회사와의 인연은 그렇게 문자 한 통으로 끊어졌다.

"마음이 너무 아파 얘기하기도 싫다"

“가족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가족들은 ‘승산 없는 싸움’이라며 ‘공장에서 나오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나갈 수 없었다.”

그렇게 이들은 경영악화의 책임을 오롯이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는 회사를 상대로 싸움을 시작했다. 당시의 기억이 엄습하자 노동자들은 몸서리를 쳤다. 김 씨는 “마음이 너무 아파 기억도, 얘기도 하기 싫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을 공장 안으로 끌고 들어간 그 “억울함” 때문에 그들은 세상과 단절된 도장공장에서 녹물로 변한 지하수를 끓여 마시고, 주먹밥으로 세 끼니를 때우며 세상에 호소했다. “우리는 일하고 싶다.”

김 씨는 “조합원들은 상하이차가 쌍용차에 투자하지 않은 것에 배신감이 쌓여있었다”며 “2004년 흑자 기업이었던 쌍용차가 상하이차로 인해 법정관리에 들어가며, 회사는 구조조정으로 모든 책임을 노동자에게 돌렸다”고 분개했다.

   
  ▲ 비 해고자의 신분으로 77일간 옥쇄파업에 참여한 윤충열 씨.(사진=정상근 기자)

노동자들은 자신이 왜 정리해고자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회사 역시 그들이 왜 정리해고자가 되어야 했는지 뚜렷한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에 의한 처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단다"

비 해고자의 신분으로 파업에 참여해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윤 씨는 ‘왜 공장에서 나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럼 회사가 노동자들을 이렇게 해고하는 게 옳은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 하지만 징계위원들 역시 그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징계위에 ‘일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사람이 살아남았다. 그들이 살아남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회사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살아남은 이유에 대해 명확하게 답하지 못했다. 그저 회사가 정한 정리해고자 기준에 따른 것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윤 씨는 “해고된 사람들은 자신이 왜 정리해고 대상자가 되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른다”며 “자식들이 ‘아빠는 왜 해고됐느냐’고 물으면 ‘아빠는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09. 11. 07

‘쌍용자동차 노동자’라는 하나의 이름을 가졌던 이들은 이제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처음엔 ‘산 자’와 ‘죽은 자’로, 이제는 ‘징계자’(파업에 참여한 비 해고자)와 ‘대기자’(무급휴직자)라는 이름도 생겼다. 하지만 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동일하다. ‘쌍용차 출신’이라는 꼬리표와 ‘생활고.’

산 자, 죽은 자, 징계자, 대기자

희망퇴직자, 정리해고자, 징계자, 대기자. 이들은 모두 일하지 못한다. 일할 곳이 없다. “공사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윤 씨, “겨울이라 일용직 자리조차 구하지 못했다”며 소주 한 잔을 넘기는 김 씨, 쌍용차 정리해고 특별위원회(구로정비사업소)에서 복직 투쟁을 준비 중인 정 씨, 모두 생활고에 지쳐있었다.

“휴직조치를 받고 한 달에 고작 80만 원 나오는 게 전부다. 회사가 징계를 한 달 단위로 내리고 있어 공사판 일자리조차 구하기 어렵다. 보통 3개월 이상은 일해야 하는데 한 달 뒤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을 시키려 들지 않는다.”

겨우 “쌍용차 출신”인 것을 숨기고 “열심히 해보겠다”는 다짐 하에 들어간 공사판 아르바이트. 하지만 그는 동지들을 보기 위해 이날 아르바이트도 포기했다. 하지만 윤 씨의 사정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 옥쇄파업 후 노사 합의에 따라 48%의 무급휴직자로 분류된 김영우(가명) 씨.

김 씨는 “쌍용자동차 출신이라는 이유로 취직도 안 되고, 장사를 하려니 망할까봐 겁이 난다”며 “수입이 없다 보니 가정이 파탄 나고,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비통해 했다.

"쌍용 출신이라는 이유로"

“은행 대출, 마이너스 통장, 할부 모든 금융거래가 정지됐다. 당장 600만 원 정도가 필요했지만 아내에게 말할 수 없어 부모님을 찾아갔다. 부모에게 손 벌리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나마 아내가 돈을 벌어 나는 숨 쉴 틈이라도 있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김 씨는 “오늘 모인 정비지회 30여 명의 동지 중 직업이 있는 사람은 1~2명 뿐”이라며 “자식들 학원비와 공과금 등 지속적으로 나가는 돈은 있는데 재취업은 쉽지가 않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남자로서 무능력함도 느낀다”고 말했다.

남편을 지켜보는 아내들의 고통 역시 다르지 않다. 조혜숙 씨의 남편은 정리해고자로 현재 복직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조 씨의 남편은 여전히 지난 여름의 평택공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남편을 바라보는 조 씨는 “억울해서라도 희망퇴직은 하지 말자”며 “혼자 남을 때까지 싸우라”며 남편을 독려한다.

“남편은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에도 ‘헬기가 떴다’며 잠에서 깨곤 한다. 지금까지 보약 한 번 먹어본 적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 멍 하니 앉아 있는 형을 보고 시동생이 ‘보약 지어 먹으라’며 돈을 줬더니 제 발로 약을 지으러 갔다. 이 상황이 억울해 남편에게 ‘1년 복직 투쟁해도 우리 굶어죽지 않는다’며 ‘어떻게든 싸우자’고 했다.”

조 씨는 남편 동료들에게 “안 되면 내 집 팔아서 카센터라도 차려주겠다”며 복직 투쟁에 힘을 더하고 있다. 일만 했던 남편이, 그리고 남편의 동료들이 해고된 것이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한 대가가 해고라는 것이 억울할 따름이다.

2009. 10. 14

노사 대타협 후 회사는 48 : 52의 무급휴직자, 정리해고자의 분배를 끝마쳤다. 그리고 쌍용자동차의 작업복이 불태워졌다. 옥쇄파업을 푼 다음날인 8월 7일 회사 정문에서 출근 차량을 막아섰던 정 씨는 또 한 번 그렇게 울분을 터뜨렸다.

"불타던 작업복, 내 작업복이었다"

“회사가 일방적으로 무급휴직자를 발표한 후 보름 정도 지났을 무렵, 작업복을 모두 꺼내 본사 앞에서 태웠다. 작업복이 불에 타 들어가는 순간 내 몸이 불타는 것 같았다. 내 작업복이었다.”

   
  ▲ 옥쇄파업 중 정리해고 문자를 통보받은 정형구 씨.

회사의 ‘선택’으로 무급휴직자로 분류된 이들 역시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 김 씨는 “내가 왜 무급휴직자가 된지 모르겠다”며 “마음이 너무 아프다”며 차마 말을 맺지 못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는 “나는 적극가담자였으니 무급휴직자 기대도 하지 않았다”며 “어찌 되었건 돌아갈 것이란 희망으로 함께 투쟁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9. 11. 07

쌍용차 사태가 ‘끝난’ 지 이제 100일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지도 100일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많은 ‘동지’가 곁을 떠났다. 이미 갈라치기 당한 노동자들은 새로 시작된 2라운드에서 무엇보다 함께 싸울 동지가 절실하다.

희망퇴직자의 아내 서 희 씨는 “미안하고 아팠지만, 희망퇴직을 선택하기까지 힘든 시기를 보냈다”며 “복직을 한다 해도 쌍용자동차에서 일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회사는 노동자들을 갈라치기했고, 용역업체 직원과 임직원을 동원해 옥쇄파업 중인 조합원들은 물론 가족대책위에까지 폭력을 일삼았다. 이들을 ‘동료’라 하기엔 억지에 불과하다.

여기에 함께 한 무급휴직자와 정리해고자 사이에도 균열이 생겨나고 있다. 무급휴직자들은 회사가 파업에 참여한 비 해고 노동자들을 철저하게 가려 가담 기간과 수위에 따라 징계를 내리고 있는 것을 보며 복직 후 자신들에게도 불리한 처사가 내려질 수 있을 거라 우려하고 있다.

때문에 무급휴직자들의 투쟁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정 씨는 “무급휴직자들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함께 싸우고 징계를 받은 비 해고자들도 있는데’라며 서운한 마음이 든다”면서도 “아직 끝나지 않은 쌍용차 사태를 알려내기 위해, 그리고 무급휴직자들의 복직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함께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절망했지만 또 희망할 수밖에

윤 씨는 “이 땅에 두 번 다시 쌍용차와 같은 일은 없어야 한다”며 “77일간 잘 싸웠지만 결론이 없다. 쌍용차가 (자본에 의해) 박살나고 나니 패배주의가 생겼다. 이렇게 해서는 이후의 싸움을 이어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잊어버릴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 노동자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쌍용차 사태는 그저 잊어버리면 되는 하나의 에피소드 같은 게 아니다. 이들은 여전히 평택공장 앞을 지나가는 것조차 두렵다. 경찰과 용역업체 직원, 어제의 동료가 자신들을 향해 폭력을 일삼던 ‘과거’가 여전히 이들에겐 ‘현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엔 희망이 없다”면서도 “그래도 희망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돌아가야만 하는 현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어렵지만 끝나지 않은 제2의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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