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에서, 향수와 희망
    2009년 11월 16일 08:14 오전

Print Friendly

제가 내일(16일) 아침에 학회 참석차 (한러 관계사 관련 세미나입니다) 러시아의 노보시비르스크로 떠납니다. 고등학교 시절, 고고학 동아리 다녔을 때에 여름 발굴 현장에 가느라고 그 노보시비르스크를 지나간 지 이미 어언 21년이나 지났으니 그 동안 그 도시가 못알아볼 만큼 바뀌었으리라 예상합니다.

지금 온도가 영하 20에서 영하 10도를 왔다갔다 하는, 눈보라가 치고 있는 그 설원 속으로 왜 가느냐고, 아내까지도 요즘 문책의 어조로 물어보고 그렇습니다. ‘시베리아’라고 하면 하도 안좋은 이미지들이 많이 떠올라서 그런가요?

   
  

그런데 제 자신에게 왜 가느냐 라고 물어보면 이렇다 할만한 쉬운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학회 때문에 가죠.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그 쪽을 가보려는 욕망의 원천은 아마도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보고 들추어보려는 마음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왜 그곳에 가려는가…

그러한 마음을 두고 종종 ‘향수’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제 경우에는 이 향수라는 말은 아마도 반쪽쯤 해당될 것입니다. 일단 향수라고 하더라도 이미 망하고 없어진 곳에 대한 향수, 즉 회복이 불가능한 과거에 대한 향수일 것인데, 역시 향수라는 말에 약간의 어폐가 있는 것 같기만 합니다.

대개 ‘향수’라고 할 때에 그 대상이 상당히 미화된다는 것이 전제가 되곤 합니다. 예를 들어서 ‘박정희 향수’라고 할 때에 ‘경제 기적’부터 ‘민족적 자신감 회복’, ‘국민적 단결’, ‘국민적 긍지’까지, 대체로 1960~70년대의 (조건부일 수도 있지만) 긍정론을 펴곤 하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소련에서 보낸 시절, 즉 이미 어느 정도 사회 생활을 인식할 수 있었던 1980년대의 학창 시절을 굳이 긍정할 근거도 갖지 못하고 있으며 긍정하려 하지도 않죠. 경제적으로는 성장률이 2~3%밖에 되지 않아 비군사 부문의 생산도 민간의 소비 부문도 정체를 겪은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관료주의 독재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긍정하기가 힘듭니다.

물론 ‘독재’라 해도 박정희 시절과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박정희 시절의 ‘재야’는 – 천관우 선생과 같은 얌전한 선비형 분들까지 – 야수적 고문을 당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지만, 소련에서 1970~80년대에 카갈리치키 선생처럼 반정부 재야 활동을 했던 지사들은 기껏 해야 비교적 ‘참을 만한’ 조건하에서 몇 개월에서 몇 년까지의 투옥 내지 강제 ‘노동교화’ 정도 겪고 출국허가를 받아 서방으로 나가거나 다시 사회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조직까지 만드는 ‘골수’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지 (그런 분들은 1987년에 일제히 석방됐지만 전국에서 대략 80명에 불과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반정부 가제 책자(사미즈다트)를 돌리는 정도라면 한번 ‘기관’에 불러 상담을 하고 "다음부터 반소 활동을 하지 않는 약속"을 요구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이미 명분과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나름의 복지국가를 세운 정권은, 박통과 달리 반대자를 고문하고 죽일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데 ‘소프트 독재’라 해도 어쨌든 독재는 독재입니다. ‘긍정’할 것은 절대 못되죠.

70~80년대의 복지국가 소련은 ‘소프트독재’

제가 향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부분은, 그 어떤 ‘긍정’도 할 수 없는 후기 스탈린주의 정치 체제는 절대 아닙니다. 차라리 그 체제 속에서도 그래도 고스란이 남은, 암흑 속에서 진주처럼 빛나는 것 같았던, 혁명 초기의, 내지 혁명 이전부터 혁명적 인텔리겐차에게 있어왔던 그 어떤 ‘정신’에 대한 애착입니다.

예를 들어서 1980년대에 대개 대학 전임강사의 임금 (그 당시 국정 확률로 약 300~400달러)은 고숙련 노동자의 임금 (약 500~600달러, 광부처럼 고위험 직업군의 경우에는 거의 600~700달러)보다 훨씬 낮았습니다. 생활 여건도 열악한 데가 한 두 군데 아니었습니다.

그 때에 이미 개인 자동차나 개인 별장 (다차)가 흔해졌지만 미하일 박선생님을 비롯한 제 스승들에게는 거의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지식인들을 과잉 배출시킨 데다 전략적으로 고숙련 노동자 집단 사이에서의 지지를 확보하려 하는 체제로서 일부 필요한 전문가 (핵물리학자 등 군사적 용도가 있는 전공들을 말함) 이외에는 인테리들을 특별히 우대할 것 없었어요.

그럼에도 제가 아는 수많은 이들은 박봉과 사회적 푸대접 등을 각오하면서도 온갖 ‘돈이 안되는’ 공부들을 – 한문고전부터 마야족의 문자까지 – 열성적으로 했던 것이죠. 미하일 박 선생님 같으면 1960~80년대에 혼자서, 그 무슨 연구비 한 푼 받을 것 없이 고구려, 백제 본기를 다 러어로 번역하신 게 그 한 예입니다 (<신라본기>는 이미 1959년에 번역,출판됐습니다).

당에서 고대사에 관심이 적어 출판이 어려울 것도, 언젠가 긴 줄 서서 출판이 돼도 역시 돈이 될 일이 없는 것도 다 알면서 30년 동안이나 혼자서 어려운 한문을 푸는 이유는? 그저 공부가 좋아서였습니다 (물론 그외에 고려민족의 정신 보존 등의 고려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노동의 행복

‘일’에서 쾌감을 얻을 수 있는, ‘일’을 행복으로 보는 진정한 의미의 공산주의적 정신은, 왜곡된 대로 왜곡돼버린 스탈린주의 사회에서도 그래도 일각에서 간직되었던 것이죠. 저는 향수가 있다면 이러한 면에 대한 향수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혁명적 인텔리겐차의 그 유명한 ‘무푼주의'(besserebrennichestvo – 돈에 대한 무관심)가 그래도 간직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엇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관료주의적 중앙집중적 경제운영 체계 (‘한 공장과 같은 한 나라’)에서는 물론 부분적으로는 시장의 요소도 존재했지만 (국가는 고용자들이 만들어낸 잉여를 수취하여 재생산에 투입시키는 등 국가적 자본의 확대재생산은 경제운영의 원칙이었습니다) 수많은 부분들이 비시장적으로 운영됐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대학 입학시의 까다로운 입시, 의료서비스의 낮은 질, 연금의 박함, 주거 환경의 열악성과 새로운 주택을 배급 받기 전에 서야 하는 몇 년간의 긴 줄 등은 불만일 수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교육, 의료, 노후, 주거 등은 사회가 비시장적으로 책임지는 까닭에 개인으로서 두려울 것은 사실 거의 없었습니다.

아무리 마음 먹어도 직장을 잃어 장기 실업자 될 수도 없었고 (직장 알선은 국가 책임이었습니다) 굶어죽을 수도, 돈이 없어 병원에 못가고 아파서 죽을 수도 없는 세상이다 보니 사람들에게 마음의 여유가 생길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 마음의 여유의 표현은 바로 각종 벽(癖)들이었습니다. 미하일 박 선생님의 한문 원전 번역벽 같은. 좀 희귀한 일에 미치면서 서로 별로 다르지 않은 나날들을 그래도 재미있게 보내는 것은 소련 시민들의 낙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정치적인 권위주의로부터의 자유는 없었지만, 경제적 억압으로부터의 상당한 자유는 주어져 있었습니다. 지금 러시아 같으면 물론 이것도 저것도 다 없다고 봐야겠지요?

스탈린주의는 물론 사회주의도 아니고 그 어떤 이상 사회도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존에 절실히 필요한 일체 부문 (주거부터 의료, 교육까지)을 비시장화시킨 후기 스탈린주의 특징 등을, 사회주의자로서는 당연히 긍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자유로운 자아실현을 가능케 하는 ‘겁으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분에 한해서는 구 동구권 사회들은 우리에게 여전히 "나은 세상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심어주기는 합니다. 과거이면서도 우리의 바람직한 미래이기도 합니다.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