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끄러워야 하는 자, 누구인가?
        2009년 11월 12일 04:2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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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조중동이 연일 맹공을 가하고 있는 ‘사회주의혁명조직’에 몸담았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 시절에 대해 많은 회한과 쥐꼬리 만한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는 이로서, 마은혁 판사에 대한 몰지각한 비난이 매우 착잡하다.

    정상적 판결에 손가락질 해대는 조폭들

    국회에서 농성했던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의 공소를 기각한 마 판사의 판결에 대해 서울서부지법의 정영진 부장판사는 “공소권 남용 이론은 형사소송법 교과서에서도 소개되고 있는 기초이론”이라며 “마은혁 판사의 공소기각 판결은 대법원 판례에 기초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마은혁 판사의 이번 판결이 ‘사회주의혁명조직’에 속했던 그의 전력, 지금 그가 가지고 있을 어떤 사상이나 양심,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와의 친분에 의한 일탈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사법 시스템에 따른 정상적 판결임을 보여준다.

    마 판사에게 손가락질 해대는 또 한 가지 이유인 마들연구소 후원회 참석 역시 천부당만부당하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판사의 직업윤리가 한 사람의 자연권을 속박하지 않아야 함이 당연할뿐더러, 그런 연구소 행사에의 참석은 법원공직자윤리위가 권고하는 ‘정치 제한’에도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부적절한 처신…상식에 어긋나는 일(「김종배의 it」, <프레시안>, 11. 11)”이라는 양비론적 훈계는 비겁하다. 이런 식의 태도는 법률에 의하지 않으면서도 전근대적 관행과 봉건적 습속으로 자연인의 행위를 제약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일천함과 자칭 ‘민주주의자’들의 천박함을 보여줄 뿐이다.

    마은혁 판사를 공박하는 근거가 되고 있는 옛 조직들, 인민노련과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준위와 진보정당추진위원회는 부끄러운 과거인가? 그 조직과 함께 젊음을 보낸 많은 이들은 그늘진 어느 곳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하는가?

    민주주의자들의 천박함을 비판함

    천황에게, 박정희 총통에게 머리털을 뽑아 짚신을 삼을 만큼 견마지로를 다했던 <조선>과 <동아>의 기자들이 아니라, 왜 내가 부끄러워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나치 부역자 1만 명을 총살, 교수형 시킨 드골 같은 우익을 만나지 못한 죄밖에 없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이 판결은 누구나 법조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말이 안 되는 판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마 판사에 대한 한나라당의 공격을 부추겼다. 그가 말하지 않은 점은 그의 법조 경력이라는 것이 ‘사회주의혁명조직’이 출범하던 1987년 그해에 전두환 정권의 검사였다는 사실이다.

    인민노련의 참여자들은 민주화운동보상법에 의해 ‘민주화 활동’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헌정 파괴 반란 수괴’를 따르며 호의호식했던 자들이 지금 그 역사에 똥칠을 하려 한다.

    누가 부끄러워야 하는가? 731부대가 독립운동부대라는 어떤 전직 학자의 무지가 부끄러워야 하는 것 아닌가. 반일운동을 주도한 민족주의 학생회장에서 ‘다케시마’를 용인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변신한 사람의 그 놀라운 훼절을 질타하여야 하는 게 아닌가.

    드골 같은 우익을 못 만난 죄

    우리는 정의롭고자 했고, 마땅히 희생하고자 했다. 우리가 어리고 서툴러 잘못한 일이 많았다고 손가락질 받고, 희생이 부족하다거나 가식이었다고 지탄받을망정, 그 올바르고자 했던 젊은 마음이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올바름이 범죄의 증거, 탄핵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단지 부끄러운 것은 ‘사회주의혁명조직’에서 일했다는 기억이 아니라, 사회주의혁명의 성공은커녕 사상과 양심의 자유조차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데 대한 자괴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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