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과 감각, 욕망의 해방
        2009년 11월 11일 02:5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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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파엘로 <의자의 성모> 1513년

    르네상스에 대한 오해와 이해

    르네상스(Renaissance)는 재생 또는 부활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르네상스는 중세와 근세 사이에 서유럽 문명사에 나타난 역사 시기와 그 시대에 일어난 문화운동을 일컫는다. 중세사회 내에서도 르네상스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대표적으로는 새로운 흐름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던 14~16세기를 꼽는다. 재생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은 고대 그리스·로마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키고자 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볼테르(Voltaire)는 르네상스를 "해방된 이성의 빛에 싸여 찬란하게 빛나는 시기"라고 했다. 이와 비슷한 시각에서 흔히 르네상스를 중세의 신 중심 사회에서 근대의 이성 중심 사회로 변화해 나가는 과도기로 규정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부분적으로만 타당한 말이거나,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르네상스의 특징을 왜곡하는 규정이기도 하다. 르네상스는 단순히 신을 ‘이성’으로 대체해 나가는 ‘과도기’가 아니었다. 이는 근대적인 시각을 중심으로 르네상스의 의미를 협소한 틀 내에 가두는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시기에 터져 나온 것은 이성만이 아니었다. 중세 신학은 단지 이성만이 아니라 감정과 욕망, 상상력 등 독립적이고 자연적인 요소 전반을 가두고 있었다. 르네상스는 이 모든 것이 봇물 터지듯 분출되어 나온 시기였다. 특히 신의 자리를 이성이 대신하면서 또 다른 절대자를 설정하려는 시도에 맞서 자연적인 감성의 역할을 동시에 옹호하려는 노력이 빛을 발했던 시기였다.

    그런 점에서 르네상스를 ‘이성’이라는 개념으로 협소하게 규정하는 것은 르네상스가 키운 나무에서 풍성한 나뭇잎과 꽃, 열매 등은 다 없애고 앙상한 가지만을 남겨놓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르네상스를 일종의 ‘과도기’로 규정하는 것은 근대를 중심으로 한 오만한 시각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인류에게 수많은 가능성을 여러 방면으로 제공했던 르네상스는 독자적인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철학으로부터 근대의 흔적을 발견하려고 기웃거리기보다는 오히려 근대가 놓쳐버린 것을 찾는 접근이 훨씬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르네상스를 가리켜 ‘인간과 자연의 재발견’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재발견’이라고 할 때 창조적인 요소는 사라지게 된다. 단지 과거 그리스․로마의 철학과 문화를 되살리는 정도의 의미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르네상스는 그리스․로마를 단순히 복원하고 복제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시기의 흐름이 ‘부활’이나 ‘재생’ 정도로 규정될 수 없다. 그리스․로마가 새로운 인식의 물고를 트는 동기로 작용하고 문제의식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나 르네상스는 이를 넘어서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진전을 일으킨 창조적인 과정이었다.

    르네상스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먼저 시작됐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태동하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탈리아는 로마제국의 유산이 집중적으로 남아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로마 문화에 대한 친근성을 가지고 있었다. 일차적으로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은 로마였으나 점차 로마 문화의 배후에 매력이 넘치는 그리스 문화가 숨어 있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가 총체적인 조명을 받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동서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이슬람권에 퍼져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수용하는 것이 용이했던 측면도 있다. 동로마제국의 멸망에 따라 빈번해진 비잔틴 학자들의 이탈리아 이주와 교류도 그리스에 대한 지식욕을 광범위하게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작용해서 플라톤 아카데미아의 창설로 이어진다.

    또한 이탈리아는 다른 나라에 비해 일찍부터 도시국가가 발달하고 이를 중심으로 상공업이 활성화되어 있었는데,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전쟁을 계기로 상공업을 중심으로 한 시민계급의 성장이 뒤따랐던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르네상스 철학은 독자적인 의미와 가능성을 갖는 철학으로 발전해나가지만 그 출발은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복원하고 다양한 문제의식을 분출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고전 복원을 위해 라틴어는 물론이고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이르는 언어공부와 헬라어 문헌들, 로마법전, 고대의 시문들, 초대 기독교 원전 등 고전 텍스트에 대한 공부가 활성화되었다.

    이는 스콜라철학의 발상법과 학문방법을 넘어서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원전 탐구는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이 기독교의 이해에 맞도록 고전에서 선별적으로 구미에 맞는 부분만 주제모음 방식으로 접근하고 그에 대한 해설을 달아놓는 학문 방법을 거부한 것이기도 했다.

    르네상스 철학의 특징은 교회의 엄격한 지배에서 일정부분 벗어나 새로운 인간관·자연관을 낳은 것에 있다. 15세기 초의 피렌체는 일명 피렌체-플라토니즘을 형성하면서 르네상스의 시발점 역할을 하게 된다. 기독교화된 플라톤이 아니라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고전 사상을 원전에 기초하여 섭취함으로써 인간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철학적 부흥을 이끌었다.

    신을 중심으로 한 인간이 아니라, 세속적인 인간의 자연적․이성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로 인해 교회의 권위 아래 금기시되었던 온갖 가치들이 새롭게 부각되고, 신의 그림자에 가려있던 인간에 대한 관심이 활성화되면서 종교 자체에도 변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후 종교개혁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인간에 대한 관심은 자연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하면서 자연철학을 활성화시킨다. 다만 중세 기독교의 영향과 맞물리면서 한편으로는 과학적인 자연관, 다른 한편으로는 신비론적인 범신론적 자연관이 혼재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과학적인 자연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이들은 경험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자연 탐구의 길을 열게 된다. 신비론적인 자연관은 자연 탐구를 중시하지만, 주요하게는 자연의 근원적 생산력의 비밀을 파악하는 일에 중점을 두게 된다. 직관에 의한 자연의 총체적인 파악을 중시하고 현실에서는 마술·연금술적 방식을 추구한다. 자연에 대한 관심과 탐구의 증대는 근대의 새 장을 열게 될 과학혁명으로 나타나게 된다.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기독교 미술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우주의 성스러운 지배자로서 신격화된 예수나 성모가 아니라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라파엘로(Raffaello)의 <의자의 성모>는 이를 잘 보여준다.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그 곁에서 성 요한이 두 손을 모아 예배를 드리는 자세로 있다. 그런데 고딕시대의 제단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엄숙한 성모상이 아니다.

    성모 마리아는 의자에 앉은 채 무릎에 앉힌 아기를 사랑스럽게 끌어안고 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성모의 매혹적인 눈길도 새롭다. 마치 정면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유혹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망토를 완전히 벗어서 무릎을 덮고 있고 그 대신 녹색의 바탕에 화려한 수를 놓은 숄을 두르고 아름다움을 뽐내는 듯하다.

    중세의 엄격한 도상학에 따르자면 성모의 머리 위에 두터운 금색 원광을 그려야 하나 언뜻 보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가주 가늘게 묘사하고 있다. 그만큼 라파엘로는 성스러운 천상의 여인이 아닌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강한 여인, 한 아이의 보호자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종교적 제단화에서 볼 수 없는 인간적인 어머니 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요염한 듯 당당하고 세속적인 듯한, 르네상스 시대의 이상적인 여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도 어리광을 부리듯 어머니에게 바싹 안겨 있다. 표정이 없는 신의 모습,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라 귀여운 아이의 모습일 뿐이다.

    예수나 성인의 모습을 인간에 가깝게 그리는 것을 넘어서 인간의 모습 자체가 미술의 대상으로 자리 잡는다.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회화 중의 하나인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모나리자>도 그러하다. 그녀는 당시 비단 상인의 부인이었다. 모나는 마돈나, 리자는 엘리자벳을 줄인 말이다. 리자는 열여섯 나이로 열아홉 연상의 홀아비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와 결혼한 부인이었고 그래서 이탈리아에서는 이 그림을 <라 조콘다>로 부르기도 한다.

    다빈치는 아무 장식도 덧붙이지 않고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그 자체로 드러내고 있다. 중세에는 인간의 묘사가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웠다. 예수의 모습을 형상화하거나, 성경 속의 이야기를 극화식으로 그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모나리자>는 신이나 성경 속의 일화가 아니라 현실의 평범한 여인의 모습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그렸던 것이다. 드디어 현실의 인간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또한 다빈치는 인체를 정확히 묘사하기 위해 스스로 인체 해부를 했을 정도로 르네상스 정신을 치열하게 체화하고 있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1503~05년

    <모나리자>가 유명해진 이유 중의 또 하나는 미소 때문인데, 이 미소도 르네상스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조각과 회화에서는 웃는 얼굴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표정이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진지한 눈동자, 굳게 다문 입술만 고집했다.

    오직 예수의 죽음, 성인의 고난과 관련해서만 부분적으로 비탄의 표정이 나타난다. 엄숙주의적인 기독교 문화에서 웃는 표정을 묘사하는 것은 미술에서 금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다빈치는 입술 꼬리를 살짝 올림으로써 미소를 실어냈다. 드디어 그림 속에 인간의 감정이 실리기 시작하면서 인간을 위한 미술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다.

    또한 그림의 배경으로 산이나 나무 등 자연이 등장을 하는 것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중세의 그림은 대부분 배경에서 자연을 생략한 채 주인공을 통해 종교적 메시지를 던지는 데만 집중했다.

    조토의 <성흔을 받는 프란체스코>처럼 이야기 전개에 필요한 범위 내에서만 자연의 풍광이 보인다. 하지만 인물의 단순한 초상을 그린 이 그림의 배경으로 산과 들, 나무를 그림으로써 현실의 자연도 인간과 함께 예술의 영역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듯 <모나리자>는 여러 측면에서 인간과 자연의 재발견이라는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을 체화하고 있다.

    르네상스의 인식론 – 인간의 이성과 감성, 그리고 육체와 욕망

    [구원에 있어서 인간 이성과 감성의 역할]

    먼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의 중요한 변화는 문학을 통해서 나타났다.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문학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한 대표적인 사람으로 단테(Dante, 1265~1321)를 꼽을 수 있다. 그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중세 정신을 종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르네상스를 향한 새로운 돌파구를 여는 역할도 수행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최후의 중세인이자 최초의 근대인으로 평가받곤 한다. 그는 <신곡(神曲)>으로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집대성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고의 사랑으로 구현해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신곡>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단테 자신이 내세의 영혼 세계인 지옥, 연옥, 천국을 차례로 겪으면서 인간의 구원을 향한 길을 모색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지옥과 연옥에서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그의 길을 인도한다. 지옥과 연옥에서는 심판을 받고 있는 명사(名士)들의 모습을 상세히 그리고 있다. 연옥의 꼭대기에서 지고의 연인 베아트리체를 만나고 그녀의 인도로 천국에 이르러 삼위일체의 신비를 맛보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상의 줄거리만으로는 단테가 왜 르네상스의 선구자 역할을 했는지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신곡>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베아트리체의 존재이다. 베아트리체는 단테가 9세 때 처음으로 보고 그 이후 평생 동안 내면적인 사랑을 했던 여인이다.

    물론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서 단테는 다른 여인과 결혼하였고, 베아트리체 또한 다른 사람과 살다가 요절하였다. 그 스스로 말했듯이 단테의 문학은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되었고 그 사랑을 표현하는 노력을 통해 문학적인 성숙을 실현한다.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는 천상의 여인으로 등장한다.

    중세 신학 아래에서 인간의 구원은 오직 신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중세철학에서 이미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듯이 원죄설에 입각한 은총설이나 예정설은 이를 극적으로 이론화한 것이었다. 하지만 <신곡>에서 구원을 향한 길의 시작과 과정에서 베아트리체라는 여인, 즉 인간과 그 인간의 감정에 해당하는 사랑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신곡>의 도입에 해당하는 지옥편 앞부분에서 베아트리체는 베르길리우스에게 단테를 안내해줄 것을 다음과 같이 요청한다. “오 만토바의 다정한 영혼이여. 나의 벗이되 행운이 없기에 황량한 산허리에서 헤매다 길이 막혀 두려운 나머지 바른 길을 벗어난 자가 있다오. 내 그에 대해 천상에서 들으니 그가 이미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데, 그를 구하고자 달려왔으나 늦었을까 두려운 마음이오. 이제 어서 가시어 그대의 귀한 말씀과 그이를 구원할 모든 수단을 쓰시어 나에게 위안을 베풀어주소서. 그대를 보내드리는 나는 베아트리체.”

    구원을 향한 긴 여정의 첫 단추를 여인의 사랑으로 시작하고 있다. 지옥의 참혹한 모습을 목격하면서 여행을 포기하려 할 때도 그녀에 대한 내적인 사랑이 이를 견디게 해준다.

    단테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역할도 베아트리체가 담당한다. 연옥의 마지막 단계인 지상낙원에서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만난다. 그녀는 단테를 신의 사랑과 완전한 평화로 인도하기 위해 온다. 단체는 그녀에게 “당신의 얼굴이 사라지자마자 그릇된 즐거움이 현세적인 것들로 나의 발걸음을 돌려놨다오.”라고 말한다.

    그가 속세적인 죄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기존의 신학에서 강조한 원죄가 아니라, 그녀의 죽음이라는 사랑의 상실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천국편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단테를 인도하는 영원한 안내자 역할을 한다.

    단테는 <신곡>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천국편 후반부에서 베아트리체를 찬양하는 시구를 읊조린다. “오 여인이시여, 그대 안에 내 희망이 힘을 얻고 그대 나의 구원을 위해 저 지옥 속에 발자취는 남기시는 괴로움을 겪으셨습니다. (…) 그대의 너그러움을 내 안에 간직하시어 그대가 건강히 치유해준 나의 영혼이 그대의 뜻을 따라 육체에서 풀려나게 하소서.”

    오직 신을 향한 믿음과 신의 질서만이 찬양의 대상이던 중세시대에 인간을 향한 사랑의 감정으로,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린 단테의 시도는 조용한 혁명이었다. 이제 인간의 사랑은 영혼에 있어서 부끄러운 그 무엇이 아니라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인간적인 사랑이 영혼을 병들게 하는 충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구원을 향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사랑이 인간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현존과 영원을 실현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를 잡는다. 단테는 <신곡>은 이렇게 신으로만 향하던 중세의 인식이 인간을 향한 열망으로, 자신의 내면에 대한 천착으로 방향을 트는 적극적인 작용을 하게 된다.

    단테는 이성과 감성을 역할 모두를 인정했다. <신곡>의 지옥편과 연옥편에 걸쳐 단테를 인도하는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인간의 이성과 철학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성만으로는 최종적인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가 없다. 베르길리우스를 단테에게 보낸 것은 베아트리체였고, 또한 목적지인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도 그녀의 사랑이 필요했다. 또한 종교적인 손길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신곡>은 신과 구원을 향한 유일한 통로로 여겨지던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통해서도 중세의 벽에 균열의 금을 만들어낸다. 오직 신과 교회를 찬양하는 것으로만 글이나 그림의 역할이 한정되었던 시대에 신의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교화이나 신부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은 일종의 금기였다.

    하지만 단테는 과감하게 성직자의 타락을 비판한다. 단테는 신앙과 교회의 상징인 교황들조차도 적지 않게 지옥에 떨어트려 놓는다. 지옥편의 제4지옥에는 인색한 수전노들과 낭비벽이 있는 작자들의 영혼이 있는데, 많은 교황과 성직자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이들이 곧 머리에 머리카락이 없는 성직자들, 교황들과 추기경들인데, 이들은 탐욕이 지나친 자들이다. (…) 여보게, 운명에 맡겨진 재화, 그 때문에 인류가 아귀다툼을 하는데 재화의 순간적인 헛됨을 이제 알 수 있으리라.”라고 경고한다.

    뿐만 아니라 제8지옥에는 성직이나 성물, 성사를 대가로 돈이나 물건을 받는 고성죄(沽聖罪)를 범한 교황들이 우굴 거린다. 단테는 “너희는 금과 은으로 하느님을 삼았으니 우상숭배자들과 너희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들이 하나를 섬긴다면 너희는 백을 숭배한 것이 아니냐? 아, 콘스탄티누스여, 그대의 개종이 아니라 처음 부유해진 교황이 그대로부터 받은 봉물이 얼마나 큰 악의 어미가 되었던가!”라며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중세의 교회와 교황, 성직자들을 냉엄하게 비판한다.

       
      ▲ 미켈리노 <단테와 신곡> 1465년

    미켈리노(Michelino)의 <단테와 신곡>은 <신곡>에 등장하는 지옥과 연옥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림의 중앙에 서 있는 단테는 성벽 밖에서 <신곡>을 손에 든 채 지옥과 연옥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다.

    왼쪽 아래에는 저주받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끌려 내려가고 있다. 흉측한 모습을 한 지옥의 사자들에게 고통을 당하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지하 세계로 향하고 있다. 이들의 몸은 지옥의 벌로 당한 상처로 가득하다. 하늘을 바라보며 과거 자신이 죄를 한탄해보지만 이미 늦었다. 단테의 뒤로는 연옥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연옥의 입구에서 천사의 심사를 받은 후에 한 단계씩 자신의 죄를 정화하는 힘겨운 과정이 나타나고 있다.

    하늘 위로는 둥근 천공에 태양과 달과 행성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림의 오른쪽으로는 ‘꽃의 성모마리아 성당’으로 불리는 피렌체 대성당의 거대한 돔과 조토의 종탑으로 불리는 종탑 그리고 권력을 상징하는 피렌체 베키오 궁전의 성곽이 그려져 있다.

    <신곡>은 당시 문학의 주류였던 라틴어로 쓰지 않고 소위 지방어인 ‘페니키아어’로 쓰였다는 점에서도 르네상스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지방어란 특정 지방의 사투리를 말하는 것인데, 이는 라틴어로 상징되는 교회의 권위로부터 일탈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래서 <신곡>은 일반 대중들은 사용하지 않아서 알아들을 수가 없는 사어(死語)였던 라틴어의 족쇄에서 벗어나서 대중적인 언어로 예술과 사상을 표현하는 데 물꼬를 트는 분기점이 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나중에 이탈리아어를 구축해가는 밑거름이 되고, 또한 종교개혁 시기에 대중적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데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육체와 인간적 욕망의 수용]

    보카치오(Boccaccio, 1313~75)의 <데카메론>은 인간을 향한 여정을 더욱 본격화한 문학작품으로 꼽힌다. 그가 <단테전(傳)>을 집필하고 만년에 피렌체의 교회에서 <신곡> 강의를 했다는 점을 볼 때 단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단테가 가능성을 제시했던 인간을 향한 길을 더 대담하게 열어젖힌다. <데카메론>은 영적인 것으로 제한했던 중세적 시각의 한계, 더 나아가서는 인간적인 것을 추구하되 정신적인 진지함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단테의 한계도 벗어나서 과감하게 보통 사람들의 육체적 욕망을 주제로 삼아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데카메론’은 그리스어로 ‘10일 동안의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흑사병이 돌자 이를 피해 10명의 남녀가 교외의 별장에 머물면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하루 1인당 1편씩 열흘간 이야기한 것을 기록한 형식을 띠고 있다. 또 그들은 이야기를 하고 난 후에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이때 부르는 노래가 매일 한 편씩 총 10곡이 된다.

    다양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 100편의 글은 풍자와 직설을 넘나들면서, 우스운 이야기, 비련 이야기, 잔혹한 이야기, 꾀를 써서 남을 속이는 이야기 등 기발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인간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도 왕족․장관․지주와 같은 권력자, 신부․수녀와 같은 성직자 등의 지배층은 물론이고 군인․의사․법관․교사․학생․화가․상인․심부름꾼․농부․하인․범죄자․주정꾼․연인 등 현실에서 살아가는 온갖 종류의 인간들이다.

    흑사병을 피해 교외의 별장에서 이야기와 노래를 통해 즐거운 시간을 추구하는 소설의 형식 자체가 중세의 가치관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시대에 교회는 페스트를 신이 내린 재앙으로 규정했다. 이 두려운 병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신과 교회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카치오는 신에게 의지하는 대신 교외로 나가 인간만의 공간을 만들고 인간들의 이야기를 통해 병에서 벗어나는 설정을 한다. 그는 페스트를 신이 내린 재앙으로도 혹은 알 수 없는 신의 섭리로도 보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재앙에서 벗어나는 길을 신이 아닌 인간 스스로에게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이야기의 내용도 자연적 인간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섹스, 성직자의 부패, 지배계급에 대한 불만 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세식의 교훈적인 이야기 전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외설적인 애욕의 기쁨이 대담하게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아홉째 날의 두 번째 이야기를 보자. 거룩함과 깊은 믿음으로 이름난 수녀원의 이사베타라는 젊은 수녀가 어느 청년과 사랑에 빠져 섹스를 즐긴다. 다른 수녀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수녀원장에게 알리려 간다. 이때 마침 수녀원장은 신부와 함께 한창 육체적인 재미를 보고 있다가 어둠 속에서 황급히 수도복을 주워 입고 심판을 위해 이사베타와 수녀들 앞에 나선다.

    그런데 수녀들은 수녀원장의 머리 양쪽으로 남자의 옷이 늘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급하게 수도복을 입다가 실수로 함께 섹스를 즐기던 남자 옷을 머리에 쓰고 나왔던 것이다. 자신의 육체적 쾌락 추구가 드러난 수녀원장은 인간의 육욕이란 억누를 수 없는 것이니, 남몰래 환희를 즐기는 것을 허용하겠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수녀원장과 수녀는 버젓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셋째 날의 첫째 이야기에는 농부가 벙어리인 체 행세하며 수녀들과 사랑을 나누는 내용이 펼쳐지기도 한다. 여덟째 날 네 번째 이야기에서는 신부가 귀족미망인에게 “신부인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을 기뻐하고 내가 사랑하는 것처럼 그대도 나를 사랑해야한다”면서 성 관계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한편으로는 신의 권위로 서민에겐 금욕을 강요하면서도 특권을 누리면서 인간의 욕망에 도취되어 있던 교회나 성직자의 타락과 기만성을 폭로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인간의 육체적 욕망은 지옥에 떨어져야 할 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한다는 메시지를 동시에 담고 있다.

    보카치오가 머리말에서 이 책이 ‘어디까지나’ 세상사의 고뇌와 우울증에 사로잡힌 사람들, 특히 여성들을 위로하고자 씌어졌다고 밝힌 점을 보더라도 육체적 욕망을 일정하게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데카메론>에 나오는 수많은 종류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본질적으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 그러한 점에서 현실적인 인간들이다. 성직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보통 인간과 똑 같은 육체와 욕망을 지닌 인간일 뿐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중세 종교적 세계관의 폐쇄적인 성 관념에서 벗어나 일정하게 전통적 가치와 규범에 대한 도전, 자연적 인간 본성 해방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성과 감성이라는 인간의 정신,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인간의 물질적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육체에 대한 적극적인 인정을 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긍정은 르네상스 미술에 있어서도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로 나타난다. 중세의 화가들이 인간의 육체에 대한 부정과 혐오라는 인식 내에서 작업을 했다면 르네상스 화가들은 인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로마의 조각들로부터 인체의 역동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이를 자신들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고자 했다. 인간의 벗은 몸을 미켈란젤로(Michelangelo)만큼 아름답게 창조한 르네상스인은 없을 것이다. 그 결정판이 유명한 조각상 <다비드>나 로마 바티칸의 성당을 장식하고 있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등일 것이다.

    <다비드>는 아예 성기까지 노골적으로 노출시키고 있다. 심지어 <최후의 심판>은 기독교의 상징인 바티칸의 성당을 장식하는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인체의 향연을 방불케 할 정도이다. 미켈란젤로가 작업을 할 때 몇몇 고위 성직자들이 성기만은 가려달라고 미켈란젤로에게 여러 차례 부탁과 협박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이를 거부했고 모든 등장인물을 완전 나체로 완성했다.

    미켈란젤로나 르네상스인들의 생각으로는 인간의 모습은 신을 닮은 모습이기에 그만큼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가 인간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닌, 신에 가까운 존재로 끌어올리기 위해 창조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작품이 완성되고 나서 교회 측은 다른 화가를 고용해서 팬티를 그리게 했다고 한다. 대신 그 화가는 미술사에서 ‘팬티 그리는 화가’라는 오명을 남겨야 했지만 말이다. 그 후 500년이 지난 1994년 복구 때 그 ‘걸레’들은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와 마리아를 비롯한 여성들은 옷을 벗지 못하고 있다.

       
      ▲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1534~41년

    그렇다고 해서 르네상스인들이 종교에서 완전히 벗어나 인간 그 자체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 종교적인 그림자에게 벗어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세월을 필요로 했다. <천지창조>나 <최후의 심판>은 기본적으로 신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것이었다. <최후의 심판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맨 위는 천국의 모습을 담고 있다. 심판자 예수를 중심으로 하여 중앙 부분은 연옥, 하단의 오른쪽은 지옥이다. 하단의 왼쪽은 연옥으로 오르고 있는 인간들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의 손동작은 천국과 지옥으로의 심판을 상징한다. 위를 향해 치켜든 오른 손은 천국, 아래를 향하고 있는 지옥으로의 심판을 의미한다. 하단 왼쪽에서 연옥으로 올라가는 인간들의 모습은 미켈란젤로가 아직 중세 신학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위에서 내려준 밧줄이나 손에 의지하여 연옥에 오르는 모습이 그러하다. 이는 인간의 자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은총에 의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은총설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인식과 행위 주체로서의 인간]

    모든 것을 신에 의지해야 했던 중세의 인간관을 넘어서 르네상스의 철학은 인간을 인식과 행위의 주체로서 인식한다. 에라스뮈스(Erasmus, 1466~1536)의 <우신예찬>은 자신의 변신이라고 할 수 있는 우신(愚神)을 통해 당시의 교회와 중세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르네상스 철학자들 대다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 역시 인식과 행위의 주체로서 인간 자신에 대한 믿음을 보여준다. 그는 우신의 입을 빌어 “누가 나보다 더 나를 진실하게 묘사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이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중세 철학의 관점에서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이가 바로 신이었다. 인간과 세계를 창조한 신이야말로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지극히 비밀스러운 개인의 내면적인 영역까지 모두 알고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 그 자리를 점차 인간이 대신하고 있다. 또한 그는 “자기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지, 자신과 싸우는 사람이 타인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자신에게 부담을 지우는 사람이 타인에게 편안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한 번 말해보라. 그렇다고 주장하려면 당신들은 나보다 더한 미치광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중세를 지배하던 원죄설과 비교해보라. 얼마나 큰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가? 중세철학은 원죄설을 통해 인간 자신을 죄인으로, 하찮은 존재로 격하시키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 신에게 다가섬으로써만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에라스뮈스는 인간 자신을 존귀한 존재로 인식해야 함을 역설한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은 몽테뉴(Montaigne, 1553~1592)의 <수상록>에서도 여러 차례 나타난다. 그 역시 에라스뮈스와 마찬가지로 인간 자신을 아는 것, 자신을 사랑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일을 하고, 너 자신을 알라는 위대한 교훈은 흔히 플라톤에 인용된다. 이 두 가지가 저마다 대체로 우리의 의무를 포함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다른 편을 포함하고 있다. 자기 일을 하려는 자는 먼저 자기가 무엇인가, 그리고 자기에게 적당한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아는 자는 남의 일을 자기 일로 혼동하지 않는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가꾸며, 쓸데없는 일이나 생각을 제안받기를 거절한다.”

    자신의 영혼에 대한 근본적인 자각을 강조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가 인간에게 하나의 필요를 넘어 의무로서 규정되고 있다. 자신을 아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이외의 것에 대한 탐구가 무의미하거나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내 사색의 목표는 나 자신밖에 없었고, 나는 나 자신만을 살펴보고 연구해 본다. 그리고 내가 다른 일을 연구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과 적용해 보기, 또는 적절히 말하자면, 내 자신 속에 적응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라고 한다. 자연이든 신이든 다른 영역에 대한 탐구를 하더라도 그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미란돌라(Mirandola, 1463~1493)는 <인간의 존엄에 대하여>에서 자신에 대한 인식과 사랑을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지의 개념으로 정식화하여 체계화한다. 그는 신이 부여한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여 인간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다. 인간이 지닌 이성에 따른 분별력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형성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근거 지운다는 것이다.

    그는 “완벽한 정의감을 가진 인류는 위대한 기적으로 여겨지고 또 그렇게 불리며 어떠한 찬양이라도 받아 마땅하다.”라고 한다. 인간에 대한 찬양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찬양의 근거를 인간이 지닌 자유의지에서 구한다.

    “우리는 그대를 창조하였으되, 천상(天上)의 존재로도 지상의 존재로도, 그리고 필사(必死)의 존재로도 불사(不死)의 존재로도 창조하지 않았다. 이는 그대가 그대 자신의 의지와 명예에 따라 자유롭게 되게 하기 위함이요, 그대가 그대 자신의 창조자가 되고 건설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오로지 그대에게만 우리는 그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성장과 발달을 주었다. 그대는 그대 안에 우주적 생명의 배(胚)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의지가 신이 부여한 것으로 정의한다는 점에서 아직 중세에서 말끔하게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에 의한 일방적인 창조에 머물지 않는다. 신이 인간을 만든 목적이 자신에게 속박된 대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자유 의지를 통해 자신의 창조자가 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인간과 신의 관계가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게 되었다. 적어도 인간의 상대적인 독립성은 확보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담, 너에게는 특정한 위치도, 고유한 모습도, 특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자기의 선택과 숙고에 의해서 스스로가 원하는 위치와 모습과 특권을 가질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자연은 자기 이외의 것에 의해 결정지어지며 신이신 나에 의해서 미리 쓰인 법 안에 속박되어 있다.

    그러나 너는 무엇으로부터도 방해와 속박이 없는 스스로의 의지와 상담하면서 그 의지에 따라 그것을 결정하면 되었던 것이다. (…) 자기 스스로 자유로이 가장 높은 기준에 의해 생각한 대로 어느 형태에 자기를 만들어 내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짐승과도 같은 것으로 추락할 수도 있었고 원한다면 신과 같은 높은 것으로 올림을 받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라고 다시금 강조한다.

    인간의 고유한 본질이 신에 의해 부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은 신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결정된 것이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인간은 자연에 대해 특권을 가진 존재인데, 그러한 특권은 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선택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다. 또한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인간 자신의 발전의 길을 열어나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신에게 다가설 수도 있는 존재가 된다. 중세라는 긴 터널을 뚫고 터져 나온 인간 독립선언의 맹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란돌라의 자유의지에 의한 인간 존엄성 규정은 후에 이성의 주체로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존중이라고 하는 근대 인권사상, 근대 자연법사상의 기반이 된다.

       
      ▲ 티치아노 <인간의 세 시기> 1513년

    이제 점차 미술에서도 성경이나 신화의 옷을 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인간의 삶을 묘사하는 작품들이 나타난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인 티치아노(Tiziano)의 <인간의 세 시기>에는 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단순한 초상화도 아니고 인간의 삶을 주제로 한 편의 작품을 완성시키고 있다. 인간의 삶을 어린시절, 청년시절, 노년시절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

    오른 편에 있는 유년기의 아이들은 배경의 피어나는 싹이나 잠자는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아직은 모든 것이 미숙하고 출발에 불과하다. 하지만 왼편의 청년기는 울창한 숲, 역동적인 신체, 피리가 상징하는 활기로 가득 찬 인생의 황금기이다. 청년기는 신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는 때이다.

    화가는 사랑하는 두 청춘남녀를 전면에 크게 부각시킴으로써 활력이 넘치는 인간의 삶을 찬양하고 있다. 신화니 역사적 인물이 아닌 현세의 인간의 모습을 나체를 통해 표현하는 과감함도 보이고 있다. 남성은 몸 전체가 거의 나체로 드러나고 있으며, 여성도 살짝 풀어헤친 어깨와 가슴을 보여줌으로써 육체적인 사랑의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에 비해 저 뒤편에 있는 노년기의 인간은 죽은 고목이나 구부정한 허리, 양손의 해골이 상징하고 있듯이 모든 것을 상실하고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전통적인 신학에 의하면 죽음은 신에게 다가서는 길목일 테지만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죽어가는 나무처럼 피하고만 싶은 순간에 불과할 것이다.

    [이성과 감성의 관계 그리고 이성의 오만에 대한 경고]

    그렇다고 해서 르네상스 사상가들이 이성을 일방적으로 찬양하기만 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이미 그들은 중세신학에서 이성이 어떻게 인간의 삶과 인식을 교란시킬 수 있는지를 인식하고 있었고, 또한 이성이 신학에서 독립했다고 해서 부정성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 또한 예감하고 있었다.

    에라스뮈스나 몽테뉴는 중세신학을 매개로 한 논쟁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예를 들어 연옥의 불이 물리적인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나 성부에 의한 성자의 출생을 둘러싼 문제, 최초의 물질은 무엇이었나 하는 문제 등과 같은 논쟁들은 현실의 문제에 도움을 줄 수 없는 일종의 수수께끼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 15~16세기 과학의 발전을 계기로 일대 부흥을 맞은 독립적인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가진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이성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태도, 즉 이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절대화나 지적 오만에 대해 경고를 한다.

    에라스뮈스는 <우신예찬>에서 기존의 신앙에 의해서든 아니면 이성에 의해서든 인간에게 강요되는 엄숙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을 한다. “스토아 학자들은 지혜는 이성에 의해 인도되고, 광기는 정열의 움직임을 따른다고 말한다. 제우스는 인간의 삶이 슬프고 지루하지 않도록 인간에게 이성보다 정열을 더 많이 주었다. (…) 이성은 의무라는 명령을 목이 쉴 때까지 울부짖는다. 그러나 울부짖는 이성의 소리는 욕설과 비난에 덮여버리고, 이성은 결국 교수형을 당하러 형장으로 가는 왕처럼 침묵하게 되며 정복되고 만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스토아학파에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스콜라철학을 스토아학파에 빗대어 비판하고 있다. 이성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은 의무라는 명령을 요구한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인간을 의무라는 억압적인 틀에 옭아매는 것은 기존의 신앙주의만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대신하고 있는 이성도 스스로를 절대화하고 인간에게 온갖 의무를 지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치광이와 현자를 구별하는 기준은 먼저, 미치광이는 정념에 끌려 다니며 현자는 이성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토아 학자들은 정념을 병으로 여겨 멀리하였다. (…) 그러나 그의 주장대로라면 그는 인간 자체를 제거하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조물주, 즉 새로운 신을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비판한다. 이성이 새로운 절대자로, 새로운 신으로 등장하는 상황을 날카로운 예지로 파악하고 있다.

    서양철학에서 이성을 절대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플라톤을 예를 들며 이성의 감옥을 비판하기도 한다. “당신들은 플라톤이 동굴에서 사물의 그림자와 이미지를 보고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놀랍도록 즐거워한 사람들과 동굴에서 바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본 현자들, 이 두 부류의 차이점을 알겠는가? (…)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현자보다는 어리석은 자의 상황이 더 낮다는 것이다. 그들이 행복은 비싼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즉 그들의 행복은 약간의 확신만 있으면 충분하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에라스뮈스가 마냥 어리석음을 추구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감성의 풍부함이다. 이성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는 감성을 충만하게 되살릴 때 진정한 행복은 가능해진다. 그리하여 그는 플라톤 이후로 오랜 기간동안 타락과 죄의 상징이 되어버린 디오니소스를 부활시킨다. “디오니소스는 왜 아름다운 머릿결을 가진 젊은이일까? 그건 바로 그가 축제와 춤, 노래와 놀이를 즐기고, 현자가 되기를 전혀 바라지 않으며, 그가 좋아하는 의식은 오로지 익살과 농담으로 가득 차 있다.”

    몽테뉴는 <수상록>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이성과 감각의 관계를 다룬다. 플라톤에서 신플라톤주의, 중세신학에 이르기까지 정신은 육체와 대립적인 관계로 규정되거나 아니면 이성이 일차적이고 육체적인 감각은 부차적인 영역으로 취급되곤 했다. 하지만 몽테뉴는 감각의 역할을 보다 적극적으로 부여한다.

    그는 “여기서는 모두가 공상으로만 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일에서는 사색한다. 사색에는 확실한 지식이 그 역할을 맡는다. 우리들의 감각 자체가 그 것을 판단한다. ‘만일 감각이 진실이 아니라면 이성 전체가 똑같이 우리들을 속인다.’(루크레티우스) 우리는 피부에게 가죽 띠로 얻어맞은 것은 간지럽다고 믿게 할 것인가? 우리들 혓바닥에게 쓰디쓴 알로에 맛을 그라브산 포도주 맛으로 느끼게 할 일인가? 고통을 받으면 떨리는 것은, 하늘 밑에 사는 모든 생명들의 일반적인 천성으로 타고난 본능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억제해야 하는가?”

    적어도 공상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인식의 시작은 육체적인 감각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또한 감각이 일차적이라는 것은 사물의 독립성과 일차성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사물들이 일어나는 까닭에 보는 것이지, 우리가 보는 까닭에 사물들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되어지는 일이 지식을 만드는 것이지, 지식이 일을 일어나게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데아나 근원적 일자처럼 형이상학적인 존재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여겨졌던 인간의 인식이 다시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로, 또한 그러한 물질의 연장인 육체적 감각에서 시작된다는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몽테뉴는 보다 직접적으로 “모든 인식은 감각에 의해서 우리에게 온다. 감각이 우리의 주인이다. (…) 지식은 감각을 통해서 시작되며, 감각 속에서 해결된다. 결국 우리는 소리‧냄새‧빛‧맛‧크기‧무게‧무름‧굳음‧거칠음‧빛깔‧매끈함‧폭‧깊이 등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는 돌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여기에 우리 지식 구조의 기초와 원칙들이 있다.

    그리고 어떤 이들에 의하면 지식은 감각일 뿐, 다른 것은 아니라고 한다. 누구이건 내가 이 감각들에 반박하게 강제할 수 있는 자는 내 목덜미를 잡을 것이다. 그는 나를 더 위도 물러갈 길이 없게 만들 것이다, 감각은 인간 지식의 시작이며 마지막이다.”라고 단언한다. 이러한 경험론적 시각은 감각적인 경험에 대한 부정과 격하에 기초해 있던 중세신학을 뿌리에서부터 뒤흔들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의식에 해당한다.

    이를 통해 몽테뉴는 이성의 한계는 물론이고 인식의 상대성이라는 인식에까지 도달한다. 소피스트 이후로 거의 맥이 끊기다시피 해온 상대론적 인식이 경험론을 매개로 하여 조금씩 기지개를 펴고 있다.

    먼저 몽테뉴는 “테오프라스토스는 감각으로 지도된 인간 지식은 어느 정도까지는 사물들의 원인을 판단하지만, 궁극적으로 태고의 원인에 이르면 그 능력이 약하거나 사물을 이해하기가 곤란해서, 그 지식의 능력은 정지되거나 막힌다고 하였다. 우리의 능력은 사물들을 이해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으나, 그 일에는 한도가 있기 때문에, 그 밖의 일을 다루는 것은 당돌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중용의 온화한 이론이다.”라고 함으로써 이성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그는 어떻게 자기 지성의 힘으로 동물들의 내적 움직임과 비밀을 안단 말인가? 그는 어떻게 그들과 우리를 비교하며, 동물들에게 어리석은 성질을 주고 있는 것인가? 내가 고양이와 희롱하고 있자면,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소일하는 것인지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소일하는 것인지 누가 알 일인가?”라고 함으로써 인식의 상대성에 해당하는 논리를 펼친다.

    마치 <장자(莊子)>의 제물론편(齊物論篇)에 나오는 ‘나비의 꿈’, 즉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기는데, 나비가 장자인지 장자가 나비인지 분간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보다 직접적으로 아름다움이란 절대적 기준이 있을 수 없다는 예를 들어가며 논리를 보완한다. “인도 사람들이 미인을 그릴 때는 햇볕에 타서 검은 피부에 입술은 두툼하게 부풀고, 코는 납작하고 커다랗게 묘사한다. 페루에서는 귀가 가장 큰 자가 가장 미인이며 다른 곳에서는 사람들이 애를 써서 이를 검게 물들이고 있으며, 이가 흰 것을 경멸하는 국민이 있다. 바스크 지방에서는 여자들이 머리 깎는 것을 예쁘다고 한다. (…) 우리는 이런 것을 추하다고 말할 것이다. (…) 미의 기호에서도, 플라톤은 그것이 구형(球形)에 있다고 보는데, 에피쿠로스학파들은 미를 피라미드형이나 사각형에 있다고 보고, 신의 얼굴을 공의 형태로는 떨어뜨려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몽테뉴에게 이성이란 절대화된 도그마가 아니라 다양한 모색의 수단이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관념이나 학설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탐구 정신을 갖게 하는 가장 훌륭한 정신적인 수단이 이성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회의론적 사고를 통해 기존의 신학에 의하여 고정적으로 정리되어 온 인간 삶의 문제, 행복의 문제를 새롭게 고찰함으로써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했다는 점에서 르네상스의 문제의식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몽테뉴는 이성을 상대화함으로써 인간과 동물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도 특징적인 사상가였다. 기존의 신학은 신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이성을 인정하고, 오직 인간만이 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에게 다가설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몽테뉴는 인간만이 이성적일 수 있다는 규정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가 보기에 동물도 정신적인 능력을 지닌 존재이다.

    그는 “짐승들도 사람과 같이 상상력에 지배당한다. 그 증거로, 개들 중에는 주인이 죽으면 슬퍼서 죽어가는 놈들도 있다. 어떤 개는 꿈꾸다가 짓고 꿈틀거리며, 어떤 말은 자다가 울고 허우적거린다. 이런 것은 모두 정신과 육체의 작용이 서로 통하고 있는 밀접한 연결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라고 한다.

    동물에게도 기본적으로 이성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던 특권,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도록 만들어졌다고 성경에서 부여한 특권은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그는 자기 나름대로 사물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하되 정신작용을 통해 감각을 뛰어넘는 추상작용을 하는 데 있어서 “우리와 짐승들의 능력이 대등하며 상호 관련성이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하여 “우리 심령들의 특권, 바로 이 특권을 짐승들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인간과 동물을 대등한 존재로 규정한 것이다.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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