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자동차 노조 & 비정규직 파이팅^^
    2009년 11월 11일 10: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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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성 동지가 기아차지부 조직실장으로 올라간 것 들으셨어요?”
“비정규직이 임원급 실장이 됐는데, 앞으로 더 잘해야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기쁨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잇따라 전화가 걸려온다. 2005년 설립된 기아차비정규직지회 첫 지회장을 맡았던 김영성 ‘동지’가 기아차지부 새 집행부의 조직실장을 맡아서 11월 9일부터 소하공장으로 출근했다는 소식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기쁜 목소리로 전한다.

   
  ▲김영성 조직실장.

기아차는 대공장 사업장 중에서 유일하게 금속노조 1사1조직 방침에 따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통합해 하나의 노조가 됐다. 그래서 11월 3일 끝난 기아차지부장 선거에서 정규직 2만8천명과 함께 비정규직 노동자 2,200여명도 똑같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대공장의 조직실장은 우스갯소리로 ‘끗발’ 있는 자리다. 물론 늘 감옥에 갈 위험에 있는 자리지만 그 만큼 힘도 있다. 노동조합의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핵심 자리에 대공장에서 처음으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올라온 것이다.

김영성 조직실장. 그를 처음 만난 건 2006년 8월 22일 기아차 화성공장의 낡은 천막에서였다. 그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수배가 떨어져 600여일째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2005년에 이어 또 다시 파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선한 눈빛과 당당한 모습으로 화성공장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는 야학에서 노동운동을 배웠고, 서울의 한 금형공장에서 노동자의 삶을 시작해 여러 공장을 다니며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2002년 기아차 화성공장 신성물류에 들어온 그는 2005년 400여명의 조합원을 모아 금속노조 기아차비정규직지회를 만들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안 짤린 이유는

2005~2007년까지 매년 계속된 파업으로 그와 동료들은 여러 차례 옥살이를 해야 했다. 회사 관리자들과 용역경비, 경찰의 연합 폭력과 일부 정규직 노동자들의 외면으로 인해 절망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지난한 투쟁은 천대받던 비정규직을 공장의 당당한 주체로 만들었고,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거쳐 정규직노조와 통합하기에 이르렀다. 화성공장에서 400명으로 시작한 조합원은 지금 1,800명으로 늘었고, 광주와 소하공장까지 합하면 2,300명이 됐다.

그와 노동조합을 처음부터 같이 만들고 함께 싸웠던 김수억 전 지회장과 이동우 전 부지회장이 여전히 감옥에 갇혀있지만, 그들의 희생과 헌신은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떼어먹은 임금을 되찾고, 비정규직을 해고할 수 없도록 합의서도 썼다.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이유로 전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수도 없이 짤려나갔지만, 기아차에서 단 한명의 조합원도 공장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다름 아닌 ‘투쟁의 힘’이었다.

   
  ▲금속노조 기아차비정규직지회 조합원 400여명이 2006년 8월 22일 오전 11시 2시간 파업을 벌이고 화성공장 본관 앞에 모여 임금인상과 원청의 사용자성 인정 등을 촉구하며 집회를 하고 있다.

김영성 동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가난한 비정규직들의 퇴직금을 떼어먹은 걸 돌려받기 위한 사업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그는 화성공장을 넘어 소화, 광주공장 등 전국을 다니면서 비정규직을 묶어세우고, 비정규직의 권리를 찾고, 투쟁을 조직하는 일을 할 것이다.

기아차 비정규직은 전국 비정규직의 맏형이다. 그래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통합한 이후 비정규직 힘이 약화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정규직의 그늘 아래 안주하려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들린다. 다른 비정규직 동지들과의 연대도 소홀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받는다.

비판이 크다는 것은 기대가 크다는 뜻이다. 기아차 비정규직 파이팅^^

2009년 11월 10일 영등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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