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의 음란함, 카메라의 음란함
        2009년 11월 09일 09: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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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중에서

    한 여인이 소녀의 초상을 앞에 두고 오열한다. ‘음란해’라고 평가하면서.

    초상을 그린 이는 오열하는 여인의 남편이요, 초상 속의 소녀는 그 집에서 부리는 하녀고, 그 초상을 그리도록 기획한 이는 바로 여인의 어머니다. 머리에 파란 두건을 두른 수수한 옷차림의 소녀가 살짝 몸을 비틀어 뒤를 돌아보는 자세의 단출한 초상에서 ‘음란함’을 느끼게 한 것은 무엇일까?

    소녀의 귀에 걸려 대롱거리는 진주 귀걸이의 반짝임, 살짝 벌어진 촉촉한 입술,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눈빛에 서린 영롱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는 한 점의 초상화가 한편의 영화와 맞먹는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사진이 등장하기 전, 오랫동안 초상화는 한 인물의 내력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장치였다.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대개 신분이 높고, 돈이 많은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초상화는 그 인물이 누구인지, 어떤 신분인지, 초상이 그려지던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소상히 설명한다.

    단지,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그런데 베르메르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 아무런 맥락도, 배경도 알 수 없다. 이 초상에서 단서가 되는 것은 오직 귀걸이와 입술, 눈빛의 묘한 반짝임뿐이다. 그 반짝임을 일으킨 빛과 그 빛을 포착한 시선을 따라가는 것이 영화의 목적이다.

    베르메르는 ‘들여다보는’ 화가였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대신 자신의 스튜디오 안에서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스튜디오 안으로 세상을 불러들인 것은 ‘카메라 옵스큐라’라는 장치였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렌즈를 통해 비춰진 영상이 사람의 눈으로 보는 영상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전방위적으로 보이던 세상이 빛의 방향과 반사된 정도에 따라 제한된 틀 안에서 어른거리도록 한다. 이 어른거리는 환영은 실제가 아니라 실제의 반영이다. 베르메르는 그 반영을 다시 붓과 물감으로 캔버스에 잡아내기 위해 카메라 옵스큐라를 들여다보며 그림을 그렸다.

    들여다보고 포착하려는 이 욕망이 똑바로 마주보는 시선과 맞닥뜨릴 때, 카메라와 대상 사이에 자리한 팽팽한 긴장감이 튕겨내는 빛의 세계가 한 점 초상에 담겨있다.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의 음란함은 바로 카메라의 음란함이다. 한 겹 렌즈를 통해 대상을 샅샅이 들여다보고 소유하려는 욕망, 대상 자체의 실체보다 대상에 투영된 화가 자신의 욕망을 농밀하게 담아낸 진주 한 알의 아찔한 반짝임.

    실체에 투영된 욕망 , 진주

    모든 것이 지워진 채 오로지 작품 자체로만 남은 소녀에게서 설명을 찾아내려는 또 하나의 욕망이 바로 영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둘러싼 카메라의 욕망이다. 또는 이름도 내력도 남기지 못한 채 그림 속에 담겨진 소녀가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나’를 주장하려는 욕망이 불러일으킨 환영이다.

    발터 벤야민은 이런 카메라의 냉정한 욕망을 지적하면서 보는 사람의 마음 속에 언어적 효과만을 연상시키는 기계적 연상작용에 대신해서 표제가 들어서야 한다고 했다. 표제는 대상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다. 표제가 없는 사진, 또는 초상은 불확실한 것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대상에 대한 정보를 지워버리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그림의 모호한 표제가 지워버린 진정한 실체를 찾아보려는 시도가 같은 이름의 영화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여전히 소녀의 시선은 우리의 시선과 부딪쳐서 반짝거리고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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