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주의서 행복은 미션 임파서블?
        2009년 11월 09일 09: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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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르웨이 학술진흥재단이 재정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언제 어떻게 나올는지 기약이 없지만, 제가 지금 책임 편집인으로서 출판 준비하고 있는 한 영문 한국학 논문집이 있습니다.

    약 2년 전에 오슬로에서 ‘스칸디나비아 한국학자 총회’라는 거창한 이름의 학회에 스칸디나비아 한국학의 거의 전부를 대표하는 6명(!)의 참가자들이 와서 발표한 논문들은 골자를 이루는데, 그 논문 중의 하나는 어떤 한국 출신의 스웨덴 한 대학의 교수님이 쓰신 <서울과 유럽 주유 도시 주민들의 행복 지수 비교 분석>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떤 존재일까?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특히 스톡홀름 주민들에 비해서는 서울사람들의 행복 지수는 약 20~30%가 더 낮다는 것은 결론이었는데, 사실 정밀 조사 및 분석을 하지 않고 육안으로 봐도 대체로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사람들을 유치원 때부터 투계장의 닭 모양으로 계속 상호 경쟁시키고 "죽기 살기로" 해내라 요구만 반복하면 뭐 아주 행복해질 일이라고 있겠어요?

    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 직장인의 약 80%가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하는데, 역시 육안으로 보면 거의 95%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제가 그 옥고를 편집하면서 늘 고민했던 주제 하나 있었어요. 이 행복이란 과연 무엇인가요? 행복한 사람이란 과연 어떤 존재일까요?

       
     

    학술적으로 보자면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전환은 행복감의 ‘주관화’를 의미했습니다. 전근대 사회의 행복관은 대체로 객관적인 조건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많고(노동력이 필요하니까), 심신 건강하고(병이 나면 지금 노르웨이처럼 나라에서 먹여주지 않으니까), 되도록이면 오래 살고, 적당한 부를 축적하고 – 이 정도입니다.

    지금 보면 아주 단순한 행복관이지만, 유행병으로 인구의 10~20%가 쉽게 죽어버리고 평균 예상 수명이 30세이었던 시절에 "병없이 오래 산다"는 것은 사실 꽤 까다로운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대에 접어들어 행복지수라는 게 주관적으로 전환됩니다.

    큰 병없이 오래 살고 아이를 낳고(많이 낳지는 않지만) 적당한 재력을 가진다… 이 정도라면 다수의 노르웨이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행복하겠지만 주관적으로 볼 때에 전혀 행복감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관성과 ‘관계’

    그 이유는 간단하죠. 행복감이 주관적일 때에 그 기본 조건이 된다는 것 역시 ‘관계’입니다. 인간이란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이죠. 전통시대 같으면 인간 관계를 조절시켰던 장치는 ‘예의’, 즉 공동체적 에토스였습니다. 아주 이기적인 아들이라 해도 ‘불효막심’의 낙인을 피하려고 그래도 양친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기본’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지금은 관계가 상당히 개인화돼 더이상 옛날만큼 공동체의 룰에 좌우되지 않기에 이 관계에 있어서의 각종의 불화들은 전통적 의미의 오복을 두루 갖춘 이 부자 나라의 중산층들을 좀 불행하게 만듭니다.

    아이가 마약을 피워 부모에게 마약 살 돈만 자꾸 요구한다(노르웨이 10대 후반 아이들 중에서 한 번이라도 대마초 등을 피워본 사람들은 약 16%에 이릅니다) , 부부간에 서로에 대한 성적, 인간적 관심을 잃어 타성만으로 같이 산다, 직장에서 지루한 일만 하거나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지 않는다… 이 정도면, 전통적으로 봤을 때에 아주 행복해야 할 노르웨이의 ‘건강하고 적당히 재력이 있는 중산층 부모’는 불행감이 커 쉽게 우울증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여유가 있는 이들 사이의 ‘행복을 만드는 관계’가 잘 안되는 경우가 이리 많을까요? 왜 노르웨이에서의 자살율(10만 명당 11명)은 위대한 자유주의자 김대중과 노무현의 현명한 ‘시장 통치’ 하에서 OECD의 최다 자살국, 일종의 ‘자살의 공화국’이 된 대한민국(10만명 당 약 26명)의 거의 절반 가까이 도달할 수 있었을까요?

    생활의 질을 따지자면 대한민국과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행복이라는 게 성적순도 아니지만 생활의 질 순서도 아닌 모양입니다. 물론 이유들은 많을 수도 있지만, 저는 그래도 인간의 ‘관계’를 비뚤어지게 만들어 개개인의 ‘행복감’을 떨어뜨리는 주된 요인으로 자본주의적인 노동, 즉 자신의 노동력의 상품화의 필요성을 꼽으려 합니다.

    자본주의적 노동과 행복감

    물론 ‘칼 퇴근’이 거의 특권으로 인식되어지는 이 ‘위대한 대한민국’과는 역시 비교할 수 없지만, 노르웨이에서도 개인 인생의 중심에 대개 ‘직장’이 있습니다. 싫든 좋든 다들 거기에 다녀야 하는 것처럼 1년에 2~3번씩이나 스페인에 가서 일광욕과 쇼핑을 즐길 수 있잖아요?

    여성의 80% 정도가 직장에 다니기에 사민주의적 국가가 ‘여성복지 증진’시킨답시고 갓난 영아, 즉 1살 영아들의 유치원 보내기를 적극 장려합니다. 이게 사실 여성의 복지라기보다는 양질의 여성 노동력을 이용하려는 기업을 위한 ‘생산 복지’인데, 말이야 늘 ‘여성 복지’라고들 하죠. 육아학적으로 봐서는 어머니, 부모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1살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다는 게 잔혹행위입니다. 저도 많이 목격했지만, 울고 불고 엄마를 찾는 게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이 자본 세계의 물신인 생산을 위해 뭘 못하겠어요? 결국 그렇게 큰 아이들은 애정 결핍에 걸리고 부모와 거리가 멀어지고 대마초나 피우고 동료들을 이지매하고 그렇습니다. 비극의 씨앗은 자본의 필요성에 따라 움직이는 사민주의적 국가가 뿌리죠.

    아이를 가진 어머니들 내지 아버지들에게 아이가 적어도 3살 될 때까지 평균임금에 준하는 육아수당을 지급하면서 그냥 재택 육아노동에 자유롭게 종사케 하고, 그 다음에 순조로이 본직에 복직시켜주면 그만일 테고 노르웨이의 재정으로 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그렇게 절대 안 하려고 합니다. 생산의욕을 떨어뜨린다고 해서 말입니다.

    부부 관계를 봐도 그렇습니다. 현대 소비 자본주의의 특징은, 절대로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수많은 광고들은 ‘가족 휴식의 최적의 방법’으로 각종 여행상품 등을 팔아먹고, 어릴 때부터 텔레비전 소리에 익숙해진 어른들은 부부끼리 집에 같이 있을 때도 늘 텔레비전 등을 켜놓고 있고, 부부간에 같이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쇼핑이 부상되고 그렇습니다. 그저 같이 숲속을 거닐고 이런 것을 좋아하는 부부들은 친구 사이에 ‘구식’으로 몰립니다.

    자본주의와 행복

    경제가 불황이고 항공사들이 제일 타격을 맞고 있는데도 노르웨이 저가 항공인 <노르비젼>이 엄청난 이윤을 챙기는 걸로 봐서는 항공여행’이 노르웨이인들의 일상 속을 얼마나 파고 들었는지 알 만합니다. <노르비젼>만 해도 일년에 거의 9백만 명의 승객, 즉 전국 총인구 두배나 되는 승객들을 태우죠.

    그 와중에서는 부부들에게 서로에 대한 ‘인간적’ 관심, 배려, 사랑은 없어지고 맙니다. 풍족한 물질만 남는 것이죠. 직장에서의 인간 관계의 문제 – 여기에서도 있는 따돌림 등 – 를 제가 나중에 따로 쓰려고 하는데, 요지는 마찬가지입니다. ‘생산 요구’상 자아실현이 불가능해지죠.

    인간이 물질의 주술을 벗어나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으로 살 수 있는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아니라면 현재 선진권 인류의 불행함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규율화된 생산으로부터의 자유를 득하지 않으면 행복도 불가득입니다. 그런데 다수가 이 사실마저도 이해 못하는 걸로 봐서는 그 대동사회까지의 길은 아주 멀고도 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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